‘와이어카드’ 몰락은 독일의 IT 열등감이 낳은 참사
  • 이수민 독일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8.06 08:00
  • 호수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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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도 홍보했던 핀테크 기업 ‘와이어카드’ 몰락에 정치권도 충격

‘유럽 핀테크계의 희망, 와이어카드의 몰락’. 지난 6월말 독일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대서특필된 기사의 제목이었다. 독일 기업 와이어카드는 1999년 스타트업으로 시작해 유럽을 뛰어넘고 아시아 시장까지 넘보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2018년 9월24일부로 ‘닥스 지수’에 포함될 정도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닥스 지수는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주식 중 시가총액 상위 30개 기업으로 구성된 종합주가지수로, 아디다스·바이어·BMW·지멘스 등 한국에도 잘 알려진 글로벌 대기업들이 속해 있다.

이렇게 독일에서 상장 기업 상위 30위권에 들 정도로 거대하며 디지털 시대에 적합한 핀테크 업계 선두주자로 알려졌던 와이어카드의 파산 소식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파산은 와이어카드 측에서 필리핀에 있다고 주장한 19억 유로(약 2조6600억원)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시작됐다. 이어서 전년도 와이어카드의 회계를 감사했던 EY 측의 부정이 있었는지에 대한 의혹이 제기됐으며, 연방 경제부 장관 올라프 숄츠와 독일 연방금융감독청(Bafin)의 책임 여부에 대한 논의 등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2002년부터 와이어카드의 CEO였던 마르쿠스 브라운은 책임을 지고 사퇴했고, 곧이어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짧은 기간,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이 사태는 와이어카드의 파산과 책임자들의 법적 책임으로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 소식이 처음 알려진 지 한 달도 지난 현재까지 와이어카드는 독일 언론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독일 정계 인사들의 이름이 함께 거론되면서 사태는 오히려 더욱 확장되는 모양새다.

독일 IT 자부심이었던 ‘와이어카드’가 회계부정과 정치권 인사들과의 유착 등의 의혹으로 몰락을 맞았다. ⓒ연합뉴스
독일 IT 자부심이었던 ‘와이어카드’가 회계부정과 정치권 인사들과의 유착 등의 의혹으로 몰락을 맞았다. ⓒ연합뉴스

차기 총리 후보 숄츠, 정치적 타격 불가피

2019년 9월초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중국을 방문했다. 이때 그는 현지에서 와이어카드를 적극 홍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와이어카드는 중국 베이징 소재의 ‘All Score Payment Services’ 인수를 발표했다. 이로써 와이어카드의 아시아 시장 진출은 공식화된 셈이었다. 문제는 9월 당시 메르켈이 와이어카드 회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여부다. 이미 이 시점에 Bafin의 자체 조사가 6개월째 이뤄지고 있었으며, 공개적인 조사였던 만큼 총리가 이 부분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연방정부가 와이어카드에 특혜를 주고 있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전 기술경제부장관이자 국방장관이었던 기독교사회연합 출신 구텐베르크와 현 정부 간의 연결고리 때문이다. 구텐베르크는 2011년 박사학위 논문 표절 시비에 휘말린 후 정치권을 떠나 ‘슈피츠버그 파트너스’라는 컨설팅 전문회사를 창립했다. 뉴욕에 위치한 이 슈피츠버그는 훗날 와이어카드의 아시아 시장 진출을 위한 고문 역할을 했고, 중국 측과의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독일 연방정부에 로비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국가 수장을 비롯해 정치권 인사가 본국의 기업을 해외에 홍보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해당 기업이 비리에 연루돼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면서 이 같은 친밀한 관계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메르켈은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2019년 9월 중국을 방문했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당시 메르켈 총리가 현지에서 와이어카드를 적극 홍보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연합뉴스
2019년 9월 중국을 방문했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당시 메르켈 총리가 현지에서 와이어카드를 적극 홍보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연합뉴스

잠적한 회사 2인자 마살렉 행보에 주목

기업 감사에 실패한 올라프 숄츠 재무장관의 향후 정치적 행보 역시 관심의 중심에 있다. 메르켈은 내년 선거 후 총리직을 내려놓겠다고 선언했으므로 정치적 커리어에 큰 타격을 입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숄츠의 경우는 다르다. 사회민주당 소속인 숄츠는 차기 총리 후보를 노리고 있다. 관건은 숄츠가 와이어카드의 부정행위에 대해 언제부터 알고 있었느냐다. 슈피겔지는 이번 문제가 IT 분야에 취약하다는 독일의 열등감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했다. 와이어카드는 마치 이러한 열등감을 해소해 줄 구원자처럼 등장했던 것이다. 2018년 와이어카드가 닥스 지수에 포함되었을 때 기독교사회연합 총비서인 마르쿠스 블루메가 이를 두고 독일 기술력의 모범사례라고 칭찬했던 점을 고려해 보면 와이어카드가 독일인들의 자긍심을 고취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사례를 두고 파이낸셜타임스는 2019년부터 와이어카드의 돈세탁과 시장조작 의혹을 꾸준히 제기해 왔다. 이 보도를 접한 숄츠는 그해 2월 Bafin에 와이어카드를 조사할 것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다. 따라서 그 무렵부터 와이어카드에 대해 Bafin의 보고를 지속적으로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숄츠의 오른팔로 여겨지는 요르크 쿠키스 재무부 총비서가 Bafin 감사회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 숄츠가 와이어카드 조사 경과를 몰랐다는 주장은 어불성설로 여겨진다. 이 때문에 독일 내에선 숄츠 지휘하의 독일 연방 재무부가 와이어카드를 제대로 감시하지 못했거나, 숄츠가 모든 비리에 대해 알고 있었으면서 이를 눈감아줬을 것이라는 의혹이 쏟아지고 있다. 그가 이에 대해 얼마나 책임을 인정할지, 어떻게 의혹을 해소하고 차기 총리직에 도전할지는 앞으로의 관전 포인트로 꼽힌다.

와이어카드 파산에 대해 독일 사회가 유독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요소가 하나 더 있다. 와이어카드의 2인자로 손꼽히던 얀 마살렉의 행방이다. 브라운이 체포된 후 이내 보석금으로 풀려나고, 또다시 체포되는 과정을 겪는 동안 마살렉은 지난 6월18일 마지막으로 회사에 나타난 후 현재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그의 체포영장은 이제 국제 무대로 확대됐으며, 그가 어디 있을지 여러 추측만 난무하고 있다.

처음에는 사라진 19억 유로를 찾아 필리핀으로 도주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그가 벨라루스에 머무르고 있을 거란 얘기가 들리고 있다. 심지어 러시아 연방 보안국이 2015년부터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설과 함께, 현재 마살렉이 러시아 정보총국의 보호하에 모스크바 근처에서 지내고 있다는 주장과 그가 예전부터 국제 첩보활동에 관련돼 있다는 주장 등이 무차별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경제사범의 도주를 할리우드 첩보영화 서사로 전환시켜 연일 대중의 흥미를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와이어카드에 대한 정치권의 개입 의혹을 논하기보다, 마살렉의 비밀스러운 삶과 행적 등을 가십거리처럼 소비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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