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늙는 줄도 모르게
  • 송혜진 숙명여대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9.18 17:00
  • 호수 161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너희 선생님은 어떤 분이셔?” 

질문을 받은 제자가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그냥 돌아온다. 

이 일을 전해 들은 선생이 제자에게 묻는다.

“너는 왜 내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 말에 대답을 못 하고 왔니?”

제자는 이번에도 가만히 있는다.

잠깐 동안 침묵이 흐르고, 선생이 제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말하지 그랬니? 우리 선생님은요, 무슨 일에 열중하면 끼니도 잊어버리고, 즐거움에 근심 걱정도 다 잊어버리셔요. 심지어 나이 들어간다는 것도 못 느끼시는 것 같아요.”

이 대화의 핵심은 몰입과 즐김, 그리고 ‘부지노지장지(不知老之將至)’다. 이 중에서 ‘부지노지장지’라는 말은 공자의 대표 어록의 하나로 ‘나이 들어가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다’는 뜻이다. 《논어》에는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 스토리가 추가로 소개돼 있다. 초(楚)나라의 ‘섭(葉)’이라는 지역을 다스리던 섭공(葉公)이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에게 ‘그대의 스승은 어떠신가’라고 물었을 때의 상황이다.   

역사 속 등장인물들의 실명과 지리 등을 갖춰 읽으면 좀 복잡한 느낌이 든다. 공자가 몰입했던 ‘일’, 즐거워했던 ‘것’에 대한 해석도 간단치 않지만, 앞뒤 자르고 그냥 요즘식 대화체로 풀어보니 좀 편하게 와 닿는 느낌이다. 그리고 ‘우리 선생님은요~’라고 시작되는 부분에서 많은 분이 ‘어? 이거 내 얘긴데?’라며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십 년 전에 102세로 작고하신 은사님 생각도 난다. 누군가가 내게 “네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냐”고 물으면 이와 비슷하게 설명되는 분, 1세대 한국음악학자 만당(晩堂) 이혜구(李惠求·1909~2010) 박사다.

9월 둘째 주, 이혜구 박사의 10주기를 추모하는 학술회의가 온라인으로 열렸다. 선생님께 배운 여러 세대의 학자들이 모여 토씨 하나 허투루 용납하지 않으셨던 치밀한 연구업적을 다시 살피는 자리였다. 국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거의 없었을 무렵인 1948년 ‘한국국악학회’를 조직해 학문적 연구를 시작한 일, 1959년 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국악과를 창설해 인재 양성의 기반을 다진 일 등이 거론됐다.

교수가 된 후에는 국악학 연구와 함께 격조 높은 외국어 실력으로 해외 음악학자들과 교류하면서, 동양음악이라면 중국과 일본 음악밖에 모르던 이들에게 한국음악의 존재감을 뚜렷이 부각시켰다. 이를 계기로 미국과 유럽 대학에서 한국음악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배출되는 등 서너 사람 몫이라 해도 좋을 선생님의 업적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2010년 2월 3일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에서 엄수된 국악계 큰별 故 이혜구 박사 영결식에서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인 한명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이 고인을 추모하는 조시를 읽고 있다. ⓒ연합뉴스
2010년 2월 3일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에서 엄수된 국악계 큰별 故 이혜구 박사 영결식에서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인 한명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이 고인을 추모하는 조시를 읽고 있다. ⓒ연합뉴스

선생님 연구의 상당수는 노년에 발표됐다. 건강하게 장수하시면서 은퇴 이후 30년도 더 넘는 긴 연구 생애를 누리셨기 때문이다. 한 번 품은 학술적 ‘의문’을 끝까지 풀어내려 몰입하셨던 선생님은 백 세 무렵까지도 당신의 관심 주제에 대해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을 즐기셨다. 신진 연구자의 글을 읽다가도 다른 의견이 생기면 격을 갖춰 논평하셨고, 한 번 발표한 글을 고치고 또 고쳐 ‘보정’하시느라 그야말로 세월 가는 줄 모르셨다. 80대 중반을 넘기시면서 부쩍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바쁜’ 심정을 토로하셨지만 ‘우연히 문제를 발견하고, 우연히 해석의 단서를 발견하는 재미’ ‘문제의 산을 넘고 또 넘고 싶은 마음’으로 세월을 잊으신다고 했다. 이렇게 백수를 너끈히 누리신 선생님의 노년은 정말 대단하셨다. 

이따금 ‘직장 그만두고 공부에만 전념하고 싶다’고 말씀드리는 이가 나타나면 ‘공부는 정년 후에 해도 늦지 않아’라시며 조급증을 다독여주시던 모습도 생생하다. 그야말로 공자가 말한  ‘부지노지장지’의 노년이었다. 앞으로 점점 더 길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은퇴 이후의 노년, 공자처럼, 이혜구 박사처럼 재밌게 몰입해서, 오래, 계속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중요하겠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