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세대를 연결하고 시대를 위로하다
  • 조유빈 기자 (you@sisajournal.com)
  • 승인 2020.10.12 10:00
  • 호수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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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한민국은 트로트에 빠졌나…‘트로트 열풍’에 숨은 4가지 시크릿 코드

누군가는 “역사 속에서 ‘끈질기게’ 명맥을 이어왔다”고 했고, 누군가는 “잊을 법하면 다시 뜬다”고 했다. 그렇게 트로트의 생명력은 꾸준하게 거론됐지만 이 정도로, 이만큼 뜰 줄은 아무도 몰랐다. 바야흐로 트로트 전성시대다. TV를 틀기만 하면 트로트 가수들이 등장하고, 트로트를 중심으로 재편된 예능 프로그램들이 방송가를 점령했다. 추석 연휴에도 그랬다. 방송가가 명절 연휴를 테스트베드 삼아 쏟아내던 다양한 파일럿 프로그램 대신 트로트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트로트=성공’이라는 공식을 입증하듯, 트로트를 주무기로 삼은 프로그램들은 높은 시청률이라는 결과물을 획득하면서 트로트가 국민적인 장르로 부상했음을 보여줬다.

단순히 ‘부활’이라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명맥을 이어온 긴 역사 속에서 트로트는 변했다. 지금의 트로트는 이전의 그것과 분명 다르다. ‘듣는 트로트’에서 ‘보는 트로트’로 진화했고,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하면서 젊은 세대와의 거리감을 좁히더니, 이제 댄스·힙합과 같은 다양한 장르와 녹아들면서 새로운 면면을 펼치고 있다. 색달라지고 다양해진 트로트의 부흥에 대중은 환호한다. 트로트가 세대를 연결하고, 시대를 위로하고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움직이고 있는 트로트라는 장르 속 어떤 지점들이 국민의 마음을 흔들었는지 그 ‘시크릿 코드’들을 살펴봤다.

10월1일 '2020 트롯 어워즈'에 참석한 신구 세대 트로트 스타들은 세대를 통합하는 무대를 꾸미면서 '트로트 대통합'을 보여줬다. ⓒTV조선 제공
10월1일 '2020 트롯 어워즈'에 참석한 신구 세대 트로트 스타들은 세대를 통합하는 무대를 꾸미면서 '트로트 대통합'을 보여줬다. ⓒTV조선 제공

#1 뜨거운 메시지가 만들어낸 세대 통합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으로 시작된 열풍을 타고, 트로트는 말 그대로 ‘트며들었다’. 트로트라는 장르가 영화 스크린에까지 등장할 정도로 대한민국의 곳곳을 잠식한 덕에 일각에서는 지겹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트로트를 기반으로 한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유튜브의 조회 수가, 신곡에 대한 반응들이 여전한 인기를 보여준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트로트가 보이는, 트로트의 시대가 됐다.

트로트는 풍진(風塵) 세상의 애환을 달래주고 어깨를 다독여주던 정서적 동반자였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한(恨)의 정서와 맥락을 같이해 온 장르’로 표현돼 왔던 것도 그 때문이다. 힘든 세상에 트로트가 던지는 위로의 메시지는 가수와 팬덤 사이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요소이기도 했다. 코로나19라는 또 하나의 풍진 속에서 정동원이 부르는 《희망가》는 국민들의 심금을 울렸고, ‘세상이 왜 이러냐’고 하소연하면서 맺힌 한을 쏟아내는 나훈아의 《테스형!》에 국민들은 열광했다.

나훈아는 9월30일 방송된 KBS 2TV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단독 콘서트에서 신곡 《테스형!》 무대를 대중에 공개했다. ⓒKBS캡쳐
나훈아는 9월30일 방송된 KBS 2TV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단독 콘서트에서 신곡 《테스형!》 무대를 대중에 공개했다. ⓒKBS캡쳐

가수들이 지닌 스토리를 외면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홀어머니와 함께 자라며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생계를 위해 군고구마를 팔아야 했던 임영웅은 자신의 굴곡진 인생을 트로트에 투영하면서 특유의 한과 정서를 가득 그려냈다. 지금의 트로트는 이전의 트로트와는 달리 젊은 세대의 가슴도 울린다. 《미스터트롯》에 등장한 젊은 가수들의 스토리에 들어 있는 ‘N포 세대’의 시련은, 2030세대들이 자신의 경험을 대입하게 만들며 그들의 공감대까지 이끌어냈다.

미풍양속이라는 가치도 지속적으로 담는다. 자신을 키워준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전하는 정동원의 효심이 그랬고, 편찮으신 아버지와 막걸리 한잔을 하는 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영탁의 마음이 그랬다. 강진의 《막걸리 한잔》에 등장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태진아의 《사모곡》을 통해서도 언급됐던 효라는 가치는 여전히 국민들의 마음을 흔드는 코드다. 그렇게 여러 세대에 공감과 감동을 전하면서, 트로트는 스마트폰을 쥐고 흩어졌던 가족들을 대동단결하게 했다. 이미자·남진부터 미스터 트롯맨들까지 등장한 TV조선의 ‘2020 트롯 어워즈’가 추석 연휴, 다양한 연령대의 가족들을 브라운관 앞에 모여들게 만든 것처럼 말이다.

 

#2 ‘보는 트로트’의 등장과 트로트의 혼성화

아이돌 음악은 공장에서 만든 공산품이라는 편견이 존재한다. 그러나 BTS와 블랙핑크를 비롯한 한국 아이돌이 K팝 열풍을 불러일으키며 세계를 휩쓴다. 이유는 실력이다. 편견을 이겨내고 능력을 증명한 결과다. 트로트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많은 편견에 둘러싸인 음악이었다. 일찍이 왜색 논쟁이 일었고, 대중가요 전반의 황금기가 도래한 1990년대에는 한물간 노래 취급을 받았다. 대중가요 중에서도 가장 하위 장르, 쉬운 노래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치어리딩, 칼군무 등 다양한 요소들이 트로트 무대를 장식한다. ⓒTV조선 《미스터트롯》 캡쳐
치어리딩, 칼군무 등 다양한 요소들이 트로트 무대를 장식한다. ⓒTV조선 《미스터트롯》 캡쳐

지금의 트로트는 실력에 기반해 편견을 없애고 있다. 기본적인 정서에 각자의 능력을 더해 퀄리티 높은 무대를 완성한다. 가창력뿐 아니라 편곡과 무대 구성 등 예술적인 측면에서도 인정받는다. ‘꺾기’라 불리는 노래 기술도 진화한 데다, 노래를 부르며 다양한 댄스를 선보이는 등 ‘보는 트로트’로의 변화도 꾀한다. 태권 댄스와 폴댄스, 단체 칼군무가 트로트 무대를 장식하는 새로운 쇼 문화의 등장이다. 트로트의 변화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은 아니다. 이애란의 《백세인생》은 국악기와 협업한 결과물이었고, 김연자의 《아모르파티》는 EDM의 요소를 가미한 곡이었다. 트로트의 변신은 효과적이었고, 최근 그 변화는 급물살을 탔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미스터트롯》에서도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와 같은 포크, 《젊은 그대》와 같은 록음악 등 다양한 장르가 트로트의 지평을 넓혔고 봉춤, 태권도, 마술, 비트박스, 삼바춤, 아이돌 퍼포먼스 등 다양한 요소들을 결합시켰다”며 “이러한 변신과 확산은 ‘뉴트로’라는 복고 트렌드와 맞물리면서 젊은 층까지 잡아냈다”고 평가했다. 최근의 트로트는 다양한 콜라보를 통해 더욱 적극적으로 변하고 있다. 힙합듀오 배치기와 트로트 가수 김나희가 만나 ‘세이브 마이 라이프’ 앨범을 발매했고, 래퍼 마미손과 《주라주라》 김다비는 《숟가락 행진곡》을 함께 발표하며 ‘성인 힙합 동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3 비엘리트·비주류를 호출한 미디어

콘텐츠를 전달하고 포장하는 것은 미디어의 몫이다. 그렇기에 트로트의 부흥에 미디어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명 ‘쉬운 음악’ ‘뽕짝’이라 불리던 트로트가 대중문화의 중심에 들어온 것은, 그동안 엘리트주의 틀에서 밀려나 있었던 트로트를 미디어가 호출했기 때문이니 말이다. 트로트를 둘러싼 편견에 억눌려왔던 대중들의 열망과 욕망이 《미스터트롯》 등 방송을 통해 표출되기 시작했다. 임진모 음악평론가는 트로트의 인기에 대해 “아직은 세대를 관통하는 열풍이라기보다는 TV 프로그램의 인기인 것 같지만, 트로트에 부활의 가능성이 주어진 것만은 분명하다”며 “그동안 주류에서 소외돼 매체에 덜 비친 게 도리어 음악 인구의 반가움을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한 바 있다.

유재석의 ‘부캐’인 트로트 가수 유산슬은 휴게소 버스킹 무대 등을 펼치면서 시민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다. ⓒMBC
유재석의 ‘부캐’인 트로트 가수 유산슬은 휴게소 버스킹 무대 등을 펼치면서 시민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다. ⓒMBC

실제로 미디어는 비엘리트·비주류 영역이었던 트로트를 끊임없이 호출하면서 신(新)주류 반열에 올려놨다. 트로트 가수가 출연할 수 있는 TV 프로그램이 딱히 없었던 과거와 달리, SBS 《트롯신이 떴다》, MBC에브리원 《나는 트로트 가수다》, MBN 《보이스트롯》, TV조선의 《뽕숭아학당》 등 트로트와 관련된 프로그램 경쟁이 펼쳐졌다. MBC 《트로트의 민족》 등 하반기에 출격할 예능들도 대기 중이다.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트로트를 호출하면서 비엘리트주의를 적극적으로 소비한다. 예술의전당에서 슈트를 갖춰 입고 하프를 연주하는 ‘유르페우스’보다, 반짝이 옷을 입고 길거리에서 노래하는 ‘유산슬’에 국민들이 더 호응하는 것도 지금의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논두렁에서, 버스 안에서, 노래방 기기 앞에서 노래하는 트로트 가수들의 모습은 결코 화려하거나 엘리트적이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다.

 

#4 트로트를 부흥시키는 팬덤의 힘

임영웅의 가창력과 감수성은 그를 대한민국의 핫 아이콘으로 만들었고, 팬들의 든든한 지원은 그를 2020년 상반기 가장 핫한 스타로 거듭나게 했다. 공식 팬카페 영웅시대의 회원 수는 13만3900명(10월8일 기준)을 넘어섰다. 다양한 연령대의 팬들이 노래와 영상을 스트리밍하고 사진을 공유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 나간다. 임영웅도 이에 화답하며 팬들과 같은 공간에서 소통한다. 기업에 ‘역(逆)러브콜’을 보내며 애정하는 가수를 광고모델로 세우는 팬덤의 강력한 힘은 트로트라는 문화를 확산시키는 또 하나의 큰 요소가 되고 있다. 착한 기부활동에 동참하며 가수의 선한 가치를 확산시킴은 물론이다.

가창력과 감수성을 갖춘 《미스터트롯》 진 임영웅은 2020년 핫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TV조선 제공
가창력과 감수성을 갖춘 《미스터트롯》 진 임영웅은 2020년 핫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TV조선 제공

여기서 주목할 것은 팬덤의 세대 확장이다. 누가 팬덤 문화를 젊은 세대의 전유물이라고 했는가. 어찌 보면 지금은 중장년층의 ‘덕질’이 어색하지 않게 된 최초의 시점이기도 하다. 김난도 서울대 교수는 2020 트렌드 중 하나로 5060세대인 ‘오팔(OPAL·Old People with Active Lives)세대’를 지목한 바 있다. 경제력과 소비력을 지닌 오팔세대가 새로운 소비 트렌드를 형성하고 자신들만의 콘텐츠를 구매하면서 관련 업계의 판도를 바꿀 것이라고 분석한 것이다. 실제로 트로트를 매개로 오팔세대는 팬덤 시장의 큰손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장년들의 것이라 여겨지던 트로트에, 1020세대의 것이라 여겨지던 오디션 프로그램이 결합한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이 신5060세대를 소환했다. 단순히 무대를 보거나 노래를 듣는 수동적인 역할이 아니라, 트로트를 찾아 직접 소비하고 무대와 영상을 즐기는 주체로 거듭나면서 트로트의 부흥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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