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 혼란 가중시키는 佛 엘리제궁의 갈팡질팡
  • 최정민 프랑스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10.21 08:00
  • 호수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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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통행금지령 내리며 바캉스 권장하는 정부에
“‘바이러스가 뱀파이어냐” 조롱·비난 속출

코로나19 확진자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자 프랑스 정부가 ‘야간 통행금지’ 카드를 꺼내들었다. 10월13일 기준 확진자가 75만 명을 넘어서고 도통 잠잠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결국 고강도 대책을 내놓은 것이다. 4주간 밤 9시부터 다음 날 새벽 6시까지 실시되는 이번 통금은 2주 더 연장돼 12월1일까지 이어질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프랑스는 지금 병상 부족 우려가 심각해지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코로나 최대 위기라 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 휴가철과 연말연시도 코앞으로 다가왔다. 정부로선 고강도 대책이 불가피했던 상황이다.

프랑스 국민은 이 역시 늑장 대응이라고 본다. 프랑스 정부는 코로나 정국에서 줄곧 느슨한 대처로 비난을 받아왔다. 대표적인 예로 집회 허용을 들 수 있다. 지난 6월13일 프랑스 최고행정법원은 ‘코로나로 인한 집회 금지 명령’은 위법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는 미국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촉발된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프랑스로 옮겨와 파리를 중심으로 연달아 이어지던 상황이었다. 이에 법원은 “코로나 확산을 이유로 기본권인 집회의 자유를 침해해선 안 된다”며 시위대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집회가 허용된 이날 프랑스의 코로나 확진자 수는 536명이었다.

코로나19 확산세가 가장 심각한 프랑스 남부 대도시 마르세유에서 9월25일(현지시간) 술집과 식당 운영을 금지하는 정부 지침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AP 연합

‘코로나 승리 선언’ 4개월 만에 확진자 50배↑

이튿날인 6월14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코로나와의 1차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2차 대유행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는 상황에도 코로나로 주저앉은 경제를 만회하기 위해 서둘러 ‘승리’를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10월10일 프랑스 코로나 확진자 수는 승리 선언 때보다 약 50배 증가한 2만6896명으로 집계됐다. 올해 초 1차 대유행 당시 최고치였던 7587명(3월31일)보다 3배 넘게 증가한 수치였다. 우려했던 상황이 현실이 된 것이다.

지난 5월 이동제한령이 해제된 후 정부는 식당 및 주점의 영업을 전면 허용하기도 했다. 감염 위험이 높은 실내를 피하기 위해 식당 외부에 테이블을 설치하는 것까지 전면 허용했다. 모처럼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전역의 식당가는 활기를 보였다.

불안 징후를 먼저 경고한 이는 프랑스 과학자문위원회의 수장인 장 프랑수아 델프레시 위원장이었다. 9월9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가가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가 올 것”이라며 상황의 엄중함을 지적했다. 정부의 안일한 대처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이튿날 대통령 주재로 대책회의가 열렸고 총리발 대책안도 나왔다. 당초 이동제한령에 준하는 강력한 방안이 발표될 거라 예상됐으나 결과는 뜻밖이었다. 정부의 입장은 모든 결정을 ‘지방자치단체장’ 단위에서 결정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국가 단위의 일괄적인 제재를 취하기엔 지역별 편차가 크다는 판단에 따라 내려진 결정이라고 강조했지만, 누가 봐도 지방정부에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또한 대책회의 당시 보건부 장관이 고강도의 제재 카드를 꺼내들었지만, 경제위기를 우려한 대통령이 정색을 하고 반대했다는 후문까지 전해지며 논란은 거세졌다. 코로나19 사태보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명백히 드러난 것이다.

현재 결정적으로 프랑스를 코너에 몰고 있는 것은 코로나 확산세로 인한 공공의료 시스템의 붕괴 조짐이다. 이미 기존 진료 및 수술 일정이 차질을 빚기 시작했으며 무엇보다 의료진의 ‘번아웃’ 사태에 대한 우려가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반년 넘게 코로나19 사태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2차 대유행을 맞닥뜨린 지금, 프랑스 공공병원의 의료인력은 탈진 상태다. 프랑스 일간지 ‘르 파리지엥’이 전국 6000명의 간호사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40%에 이르는 응답자가 “직업을 바꾸고 싶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도 전문채널 BFM에 따르면, 남부 도시 마르세유의 한 병원의 경우 코로나 확진 판명을 받은 의료진이 계속 현장에 투입되고 있는 것으로도 파악됐다.

프랑스 파리의 문 닫힌 술집 앞을 행인들이 지나가고 있다. ⓒAP 연합

정부 방침 비웃듯 파리의 밤은 여전히 불야성

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음에도 마크롱 정부의 어설픈 행보는 멈추지 않았다. 한쪽에선 총리와 보건부 장관이 코로나 사태의 엄중함을 경고하고, 다른 한쪽에선 관광부 장관이 겨울 휴가 예매를 독려하고 있다. 정부의 코로나 관련 대국민 소통전략도 코미디 수준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9월24일 전 국민을 상대로 코로나 사태를 설명하기 위해 생방송에 출연한 장 카스텍스 총리는 정부가 만든 코로나19 추적 앱을 설치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왜 설치하지 않았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애플리케이션이 필요 없는 곳만을 다닌다”고 얼버무리면서 국민에겐 설치를 강조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도 그대로 전파를 탔다.

이러한 정권 수뇌부의 안이한 행보는 그대로 시민들의 경각심 해이로 이어지고 있다. 정부의 뒤늦은 고강도 방침을 비웃기라도 하듯 파리 일대엔 밤 시간에도 영업을 이어가는 식당과 주점들이 즐비하다. 최근 파리시의 확진율은 17%까지 치솟았으며 20~30대 확진자는 10만 명당 800명을 기록했다.

프랑스의 ‘통금’ 조치가 코로나19 확산 기세를 잠재울 수 있을까. 회심의 카드처럼 보이는 이번 발표에서도 그동안 보여온 마크롱 정부의 모순된 행보는 이어졌다. 마크롱은 담화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밤 9시부터 통금이라고 했지만, 이동을 제한하지는 않겠다는, 이해하기 힘든 발언을 했다. 아울러 야간통금령 하루 전 시작되는 2주간의 바캉스 기간에 여행을 떠날 것을 권고하기도 해 국민들에게 더욱 혼선을 주고 있다.

정부의 야간 통금령에 대한 정치권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 야권의 아드리안 캉테네 의원은 자신의 트위터에 아침 출근길 빽빽이 들어찬 지하철 사진을 게재하며 “‘아침’ 바이러스는 무슨 수로 막을 것인가”라고 반문했고, 질베르 콜라르 하원의원도 “바이러스가 무슨 뱀파이어인가”라고 야간 통금 실효성에 의문을 던졌다. 일반 시민들도 SNS 등에 “지난 6개월간 바이러스에 대해 연구한 결과가 고작 이 정도냐”며 조롱 섞인 반응들을 쏟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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