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와 싸우다 트럼프 닮아가는 마크롱
  • 최정민 프랑스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11.26 15:00
  • 호수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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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통령, 이슬람과의 갈등 지렛대 삼아 재선 겨냥한 행보 보여

5년 전,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를 풍자한 프랑스의 한 주간지 만평으로 촉발된 프랑스와 이슬람권 국가 간의 갈등이 최근 프랑스 내 연쇄 테러를 낳는 등 다시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프랑스 시민들은 이에 대처하는 모습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닮아가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지난 10월16일 프랑스 파리 북서 지역 한 중학교의 역사 교사가 체첸 출신의 18세 청년에 의해 거리에서 참수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사건 당일 벨기에를 방문 중이던 마크롱은 파리로 귀국하는 길에 곧장 사고 현장으로 직행했다. 그로부터 2주가 채 지나지 않은 10월29일, 이번에는 니스에서 이른 아침 성당을 방문한 두 명의 신자와 성당 관리자가 이탈리아를 통해 입국한 튀니지인에게 흉기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에도 마크롱은 다시 니스 현장을 곧장 찾았고 “테러와의 전면전에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연이은 테러 사건의 출발점은 2015년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의 무함마드 풍자 만평이다. 지난 9월1일, 당시 사건에 대한 공판이 시작되면서 다시금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르던 차였다. 10월16일 테러의 희생자인 중학교 교사는 수업시간에 문제의 만평을 인용하며 수업을 진행했다. 이때 교사는 이슬람교도 신자인 학생들에겐 불쾌할 수 있으니 원한다면 자리를 비워도 좋다고 배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수업에 만평이 인용된 것이 한 학부형에게 사실과 다르게 전해지며, 이슬람 신자들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결국 잘못된 정보로 인해 분개한 한 체첸 청년에 의해 그 교사는 무참하게 살해됐다.

10월18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광장에 수천 명이 모인 가운데 이슬람 극단주의자에게 살해된 프랑스 중학교 교사를 추모하는 집회가 열렸다. ⓒEPA연합

마크롱이 ‘표현의 자유’ 강조하는 이유

문제가 다른 차원으로 번진 것은 피해자의 추모 열기와 함께 마크롱이 “프랑스엔 신성모독을 포함해 자유롭게 풍자하는 문화가 있다”고 강조한 데서 시작됐다. 마크롱은 “표현의 자유를 끝까지 사수하겠다”는 주장까지 연거푸 내놓으며 이슬람 문화권과의 갈등에 더욱 불을 지폈다. 레바논의 한 언론은 “마크롱의 표현의 자유 수호 주장으로 터키와 프랑스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된 셈”이라고 지적했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왜 마크롱이 ‘표현의 자유’라는 구호를 들고나와 이슬람에 날카롭게 맞서고 있느냐는 것이다. 실제 지난 2015년 샤를리 에브도 테러 직후 전 세계 50여 개국 정상이 함께한 추모행사 ‘공화국 행진’에서도 ‘테러에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나도 샤를리다”라는 구호가 유행했지만 그때도 ‘표현의 자유 수호’가 첫 명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번 사태에서 마크롱이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 어떤 이유보다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다.

마크롱의 이러한 모습은 2022년 대선을 염두에 둔 정치적 행보로 분석된다. 표현의 자유와 함께 들고나온 근거가 바로 ‘정치와 종교를 엄격히 분리 구분한다’는 프랑스 특유의 ‘라이시테(laicite·정치와 종교 분리 원칙)’였다. 이 법은 1905년 만들어진 것으로, 종교계의 부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 법령은 2002년 이슬람과 이민자 문제가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고 극우정당이 인기를 끌자, 극우 지지층을 끌어오기 위해 프랑스 우파에서 선제적으로 들고나와 다시 이슈가 됐다. ‘공화국 앞에 어떠한 종교적 행위도 일절 금지한다’는 명제를 내세워 이슬람의 확대를 우려하는 극우 지지층을 흡수하겠다는 전략이었다.

2019년 8월26일 프랑스에서 열린 G7 폐막 기자회견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악수를 하고 있다. ⓒEPA연합

혐오 자극해 표심 얻으려는 방식 여전

현재 마크롱은 “프랑스는 다문화 사회 이전에 모두 시민”이라며 ‘공화국’이라는 명제를 ‘다문화’보다 우선시하고 있다. 이러한 ‘공화국 이념’에 대한 집착 역시 극우 지지층을 끌어들이기 위한 포석이다. 다시 말해, 이민자 추방이나 이슬람 배척 등 극우적 주장을 하지 않으면서 극우 지지층을 끌어올 수 있는 좀 더 우아한 주장이 바로 ‘공화국’을 내세우는 것이다. 우파였던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도 재임 당시 재선을 준비하며 가장 먼저 한 일은 ‘대중운동연합’이라는 당명을 바꾸는 일이었다. 그리고 만든 새 당명이 바로 ‘공화당’이었다.

지난 대선에서 부인의 위장취업 문제가 불거지며 대권 문턱에서 낙마했던 프랑수아 피용 전 총리가 최근 정계 복귀 움직임과 함께 제일 먼저 언급한 것도 공공장소에서의 부르카 금지 법안 강화였다. 이슬람 혐오를 자극해 표심을 끌어들이는 방식이 여전히 만연하는 것이다. 마크롱의 행보 역시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한 이민자·이슬람 문제의 근본을 해결하기보다는 ‘트럼프 스타일’의 극단적이고 근시안적인 선거전략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 마크롱은 최근 자신에 대해 비판적인 칼럼을 쓴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항의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유럽 국가 간 자유 왕래의 출발점인 ‘솅겐 조약’마저 조만간 손을 보려는 기세다. 이를 지켜보며 시민들은 자신을 비판한 언론을 SNS에서 저격하고,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던 과거 트럼프를 떠올리고 있다. 파리의 국제관계전략연구소(IRIS) 에두아르 시몽 소장은 “솅겐 조약 개혁 이야기가 마크롱에게서 나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좌파도 우파도 아닌 중도 중의 중도, ‘급진적 중도’라고 추앙받아온 마크롱이 극우적 주장을 서슴지 않는 대통령이 돼 가고 있다는 것이다.

2021년은 9·11 테러 20주년이 되는 해다. 미국의 상징이던 뉴욕과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국 국방부 펜타곤이 공격받은 것은 물론 정치 수도 워싱턴까지 위협당한 초유의 참사였다. 그해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테러와의 전쟁’이 한창인 곳은 미국이 아닌 바로 프랑스가 되고 있다. 여기에 재선을 준비하는 대통령의 정치적 셈법까지 더해져 사태 해결은 점점 요원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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