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다시 ‘친이·친박의 힘’으로 [쓴소리 곧은소리]
  •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 소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12.15 09:20
  • 호수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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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4연패 교훈 잊은 제1야당, 여권 탓에 오른 지지율에 취했나

대의제 민주주의는 대표와 책임 원리로 운영된다. 선출된 대표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도 따르기 마련이다. 대표와 책임은 정치, 정당, 선거 분야에서도 작동한다. 2007년 이명박 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끌었던 범진보진영에 책임을 물은 것이다. 2016년 촛불시위와 탄핵 정국,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은 범보수진영에 책임을 추궁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국민의힘 계열 정당들은 2016년 총선부터 내리 패배했다.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 그리고 올해 총선에선 패배의 내용도 매우 나빴다. 지지 기반은 영남 중심, 수도권 일부 부촌과 충청·강원 일부 지역, 60대 이상으로 축소됐다. 연이은 선거 패배로 유력 정치인들도 자의반 타의반 정계 은퇴의 길을 걷고 있다. 이는 국민의 대표성이 급격하게 약화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혹독한 책임 추궁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의 ‘이명박·박근혜(MB·박) 전 대통령 과오’ 사과 방침에 불거져 나온 당내 반발은 국민의힘 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김 위원장은 취임 이후 종종 MB·박 과오 사과를 언급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여름 광주 5·18묘지를 찾아 무릎을 꿇었을 때도 사과를 예고한 바 있다. 12월9일은 박 전 대통령 국회 탄핵 가결 4주년이기도 해 실제 사과가 점쳐지기도 했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주호영 원내대표가 12월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시사저널 이종현 

‘사과’ 둘러싼 국민의힘 논란, 변화·쇄신 거부로 읽혀

당내 반발은 예상보다 전방위적으로 터져나왔다. 배현진 원내대변인, 서병수 의원, 장제원 의원 등은 김 위원장 사과 방침을 강하게 비판했다. 주호영 원내대표도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주요 당직자, 중진 등 이들의 무게감도 남달랐다. 비대위 사퇴 배수진까지 내비쳤던 김 위원장도 슬그머니 물러섰다. 올해 정기국회 일정 이후로 사과를 미뤘다. ‘당 혁신 부족, 문재인 정권 탄생 초래한 잘못’도 사과에 추가돼 내용도 모호해졌다.

이번 사과 논란은 국민의힘이 여전히 ‘MB·박 전 대통령 정치세력’을 대표하고 있음을 일깨워줬다. 네 차례에 걸친 역대급 선거 패배는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책임을 실천하라는 국민의 요구였다. 인물, 정책, 이념 좌표, 행태와 같은 소프트웨어까지 다 바꾸라는 근본적인 주문이었다. 국민의 요구에 비하면 사과는 책임으로 들어가는 작은 관문에 불과하다. 선거 패배 때마다 고개를 숙였던 국민의힘은 ‘내가 뭐 어때서’ 식으로 돌변한 것이다.

국민의힘이 변한 이유 중 하나는 ARS(자동응답시스템) 여론조사 때문이다. 리얼미터는 매주 두 번씩 결과를 발표한다. 12월7일 국민의힘 지지율은 30.5%로 민주당(31.4%)과 접전을 펼쳤다. 이전 조사에선 국민의힘이 오차범위 내에서 민주당에 앞서기도 했다.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문 대통령 긍정 평가도 37.1%로 정부 출범 이후 최저로 나타났다. 리얼미터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윤석열 검찰총장 갈등 부각, 국회 민주당 주요 법안 일방 처리가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풀이했다(TBS 의뢰, 7~9일 1509명 대상, 표본오차 95% 신뢰수준 ±2.5%p).

국민의힘의 지지율 선전 현상은 주로 ARS 방식에서만 나타난다. 12월4일 발표한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국민의힘 지지율은 20%에 그쳤다. 이는 지난해 초 황교안 대표 출범 이후와 비슷한 수준이다. 총선 전 기록한 20% 중반에도 미치지 못한다(1~3일 1000명 대상, 표본오차 95% 신뢰수준 ±3.1%p). 10일 전국지표조사에서도 국민의힘 지지율은 22%를 기록해 의미 있는 변화가 없었다(4개 기관 공동의뢰, 11월30일~12월2일 1004명 대상, 표본오차 95% 신뢰수준 ±3.1%p). 이 두 차례 조사에서 민주당 지지율은 소폭 하락했지만, 그게 국민의당 상승으로 이어지지는 않은 것이다.

야당이 열세인 정치지형, 여전히 지속

ARS 방식은 녹음된 음성으로 여론조사가 진행된다. 안내 음성에 따라 전화기 버튼을 눌러야 하기 때문에 귀찮게 생각할 수도 있다. 정치 분야 관심이 적거나 소극적 지지층이라면 여론조사를 중단할 가능성이 커진다. ARS 방식에서 국민의힘 지지율이 높은 이유는 응답률이 낮기 때문이다. 응답률이 낮으면 열성 지지층이나 적극 비토층 여론이 상대적으로 더 반영될 개연성이 커진다.

응답률 35.9%인 전국지표조사에서 문 대통령 지지율은 44%로 상당히 높았다. 국민의힘 지지율은 22%로 민주당(34%)과 큰 격차를 유지했다. 전화면접조사는 면접원이 직접 전화를 걸기 때문에 정치에 관심이 적거나 소극적 지지자라 하더라도 응답할 공산이 크다. 여론조사 업계나 학계에선 응답률이 높아질수록 정확도가 더 향상될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총선에서 확인된 더불어민주당 우위 정치지형이 변했다는 근거는 부족하다. 일반적으로 여론은 다수의 생각이 모인 것으로 잘 변화하지 않는다. 일단 형성된 여론은 지속하는 경향이 있다. 수많은 발원지와 지류가 얽히고설킨 큰 강물과도 같다. 여론이 변화하려면 그럴 만한 계기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추 장관-윤 총장 갈등 부각, 민주당 주요 법안 일방 처리 비난 여론도 국민의힘 지지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국민의힘의 반등은 대표와 책임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국민의힘이 ‘MB·박 정치세력’으로 비쳐지는 한, 그리고 과거 국민의힘 계열 정당과 차별화되지 않는 한 국민의 대표로 인정받기 어렵다. 지금 국민의힘 모습으론 60대를 벗어나 50대 혹은 20대의 대표가 될 수 없다. 영남을 벗어나 서울 또는 인천·경기에서 뿌리내리기도 어렵다. 선거는 곧 선택이다. 양당제 관행에 익숙한 우리 현실에서 대개 민주당 또는 국민의힘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한다. 코로나19 이후 소통, 탈권위, 평등, 공동체, 연대, 협력, 자원(自願)과 같은 미래 가치들이 확산하고 있다. 국민들이 볼 때 어느 정당이 이런 가치를 선점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내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이듬해 대선이 쉽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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