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면 시대, ‘N차 신상’도 자판기에서 산다
  • 조유빈 기자 (you@sisajournal.com)
  • 승인 2021.01.11 16:00
  • 호수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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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 안전 도모하기 위한 비대면 중고 거래 방식 등장해
중고 거래 플랫폼이 비대면 트렌드를 좇는 이유

자판기 속에 구찌 가방이 있다. 펜디, 생로랑 등 명품 가방도 보인다. 백화점 안에 놓인, 투명한 사물함처럼 생긴 이 자판기에 담긴 물품들은 새것도 아니고,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올해 신상 제품도 아니다. 일명 ‘N차 신상’. 누군가 구매하고 사용하다 판매하는 중고 명품들이다. 마음에 드는 제품이 있다면 자판기 옆 키오스크에서 구매 버튼을 누르면 된다. 상품에 대한 설명도 화면을 통해 볼 수 있다. 직접 보고, 직접 결제하고, 상품을 뽑아 들고 간다. 판매자와 연락할 필요도, 직접 만나 현금을 건넬 필요도 없다. 중고 명품도 자판기로 사고파는 시대가 왔다.

중고 명품이 자판기에 등장한 이유를 찾기 전에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중고 거래를 해 본 적이 있는가. 아직 중고 거래를 해 본 적이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사기 위험성, 직접 보지 못하는 제품에 대한 불안감, 누군지 모를 판매자에 대한 우려, 낯선 사람과의 접촉에 대한 두려움 등 여러 요소가 있을 것이다. 수십 년째 해결되지 않는, 중고를 판매하는 플랫폼들의 필연적인 과제는 ‘사기’다. 몇몇 악성 판매자로 인해 플랫폼의 신뢰도까지 추락한다. 10명 중 8명이 중고 거래를 하는 이 시대에도, 중고 거래의 위험성은 꼬리표처럼 남아 ‘만약에’라는 의혹을 만들어낸다. 여러 걱정 때문에 제품을 직접 보고 구매할 수 있는 직거래 방식을 선택하지만, 시간과 장소를 맞춰야 하는 불편함이 있는 데다 범죄에 노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존재한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대면의 불안함은 더 커졌다.

서울 용산구 아이파크몰에 설치된 ‘파라바라’의 비대면·무인 중고 거래 자판기 ⓒ시사저널 임준선 

중고 거래 방식에 대한 불안감 커져

그러나 이런 우려에도 중고 거래 수요는 늘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경기가 불황의 지표를 가리키는 상황에서도 중고 거래 시장은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 MZ세대(밀레니얼+Z세대)를 중심으로 실용적 사고, 경험 가치의 중시, 윤리적 소비라는 흐름이 맞물리면서 중고 거래는 더 활성화됐다. 신상을 구매할 여력이 되지 않아 선택하는 차선책이 아니라 사용성이 남아 있는, 합리적인 가격의 상품. 그렇게 중고 상품은 ‘N차 신상’으로 불리게 됐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중고 시장의 성장을 주도하고 있는 MZ세대는 어릴 때부터 많은 브랜드와 상품에 노출된 자본주의 키즈다. 시장이 성숙되면서 새 제품이 주는 차별화나 효능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며 “새로운 것을 사도 결국 중고가 된다는 것을 알고, 굳이 비싸게 값을 치러야 하는 신상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시장도 커지고 있다. 2008년 4조원 규모였던 중고 거래 시장은 2020년 20조원 규모로 성장했다. 저렴한 제품만 중고로 사고팔던 때도 지났다. 중고 명품 거래 시장도 2012년 1조원에서 2019년 말 7조원 규모로 커졌다. 이용자도 급격히 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닐슨코리아클릭에 따르면 중고 거래 애플리케이션(앱) 이용자는 2018년 45%, 2019년 66%, 2020년 117%로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에 따르면 소비자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중고 물품을 구매한 적이 있다는 응답자가 76%였다.

중고 거래 플랫폼이 증가하면서 거래를 꺼리는 심리적 장벽은 어느 정도 해소됐다. 대다수 소비자가 중고 거래를 ‘원하는 제품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합리적인 소비 방법’이라고 평한다. 그러나 중고 거래에 대한 거부감은 여전히 존재한다. 10명 중 6명이 ‘중고 거래는 거래 중 사기를 당할 위험이 높다’고 응답했고, ‘제품을 직접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실제 제품과 차이가 큰 경우가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을 절반가량이 갖고 있었다. 주목할 점은 여기에 있다. 중고 거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중고 제품 자체’보다 ‘거래 방식’에서 기인한다는 점이다.

AK플라자 분당점에서는 파라박스를 통해 중고 명품들이 거래된다. ⓒAK플라자

‘비대면-중고 거래’ 장점 융합한 새로운 모델 등장

중고 거래 플랫폼들이 이용자 신뢰도를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거래 방식을 선택하게 된 이유다. 이제 하나의 산업으로 우뚝 선 중고 거래 시장은 각종 기술과 새로운 거래 모델을 장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등장한 것 중 하나가 중고 거래 자판기다. 기존에 없던 거래 방식의 탄생이다. 이 자판기는 비대면 중고 거래 플랫폼 파라바라가 만들었다. AK플라자 분당점, 용산아이파크몰, 롯데마트 등 유동인구가 많은 백화점과 쇼핑몰, 마트, 지하철역에 중고 거래 자판기 파라박스가 설치돼 있다.

자판기가 태어난 배경은 거래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서다. 판매자는 앱에 판매 물품을 등록하고 3명 이상이 보낸 하트를 받으면 오프라인 자판기에 물건을 넣을 수 있다. 구매자는 앱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미리 살펴볼 수도 있고, 지나가다가 자판기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하면 바로 구매할 수도 있다. 판매자와 구매자는 서로가 누군지 알 수 없지만, 물건이 없을까봐, 물건을 보내주지 않을까봐 전전긍긍할 일은 없다.

구매자가 자판기에서 카드로 결제한 금액은 물품에 문제가 없다는 전제하에 3일 뒤에 판매자에게 입금된다. 중고 거래 특성상 단순 변심으로 인한 환불은 불가능하지만, 고지하지 않은 하자가 있는 물품이나 작동하지 않는 전자 제품을 구매한 경우에는 고객센터를 통해 환불을 받을 수 있다. 제품에 대한 신뢰도를 확보하기 위해 중고 명품 감정 스타트업 ‘엑스클로젯’과도 손을 잡았다. 백화점에 설치한 파라박스에 들어가는 중고 명품은 엑스클로젯의 감정을 거친다. 검증된 정품에는 인증 태그가 부착된다. 비대면 서비스와 중고 거래의 장점을 융합한 새로운 중고 거래 모델에, 불안감을 없애는 요소를 더한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직거래보다 비대면 거래를 선호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헬로마켓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안전한 거래가 가능하다면 직거래보다 비대면 거래를 하고 싶다’는 비율이 89%에 달했다. 보통 중고 거래 플랫폼은 이용자들이 오프라인에서 만나 거래하는 직거래와 택배를 이용한 비대면 거래 모두를 허용해 왔다. 그러나 당근마켓, 중고나라, 번개장터에 이어 업계 4위인 헬로마켓은 지난해 10월, 대면 거래를 아예 없애는 파격적인 전환을 했다.

헬로마켓에는 비대면 거래 상품만 등록할 수 있다. 돈을 보냈는데 물품을 보내지 않는 사기 행각이 늘어나자 이에 대한 해결책도 내놨다. 구매자가 지급한 돈은 물품이 수령되기 전까지 판매자의 손에 들어가지 않는다. 자체 개발한 안전결제 서비스 헬로페이를 이용해서다. 더치트 등 사기 피해 방지 플랫폼과 제휴해 사기 이력 사용자의 접근도 막는 등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장치도 도입했다. 개인의 거래를 연결하는 것으로 플랫폼의 역할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래 전반의 안전을 담보해야만 안전한 중고 거래 시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그 취지다. 과연 국내 중고 거래 시장은 비대면을 중심으로 재편될 수 있을까. 새로운 서비스를 들고나오는 플랫폼의 움직임에 시장의 관심이 모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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