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어게인 ‘초아 신드롬’으로 재평가되는 한국 아이돌
  • 하재근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1.18 16:00
  • 호수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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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 세계에서 K팝이 성공하는가’ 물음에 제대로 답해

크레용팝의 멤버였던 초아(허민진)가 JTBC 《싱어게인》 오디션에 출연해 부른 《빠빠빠》 영상이 유튜브 조회 수 730만 회를 넘어섰다. 댓글은 1만5000여 개에 달한다. 가히 신드롬급이다. 프로그램은 아직 59호라고만 소개하지만 초아는 모두가 아는 이름이 됐다. 

처음 등장했을 땐 아무도 몰라봤다. 크레용팝에 큰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 상당수이기 때문이다. 《빠빠빠》라는 노래가 우스꽝스러웠다는 기억은 많은 사람에게 남아 있지만 멤버 한 명 한 명에 대해선 무관심했다. 그만큼 크레용팝은 대중에게 경시당했던 팀이다. B급 병맛 코드로 잠시 반짝한, 그저 그런 비주얼 아이돌 중 하나라고 치부됐다. 

처음엔 몰라봤지만 ‘헬멧가왕’이라는 소개 문구에 비로소 《빠빠빠》의 ‘직렬 5기통’ 춤을 떠올렸다. 초아가 바로 그 노래를 부른다고 하자 모두 놀랐다. 노래 자체가 혼자 가창하기엔 힘든 곡이어서 다른 오디션 도전자가 선곡했어도 놀랐을 텐데, 심지어 원곡자인 크레용팝의 멤버가 부른다고 하자 더 놀랐다. 크레용팝에게 그런 정도의 실력이 있을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망신이라도 당할까봐 심사위원들이 지레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초아는 ‘진짜 나를 보여줄게’라는 듯한 표정으로 무대를 시작해 완벽하게 가창해 냈다. 음원으로 들었던 그 목소리가 생음악으로 구현되자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당연히 기계음으로 아주 많이 다듬었을 거라고 속단했었는데 알고 보니 실력이었다. 화려한 조명이 지원되지 않고 댄서도 동료도 없는 그 적막한 무대에서 초아는 《빠빠빠》를 직렬 5기통 춤과 함께 마치 CD처럼 소화해 냈다. 

유튜브 반응도 폭발했다. 초아에게 그동안 무시해 미안하다는 게시글들이 나타났다. 초아는 바로 뒤이어 또 다른 걸그룹 타이니지 출신인 67호(제이민)와 함께 《한바탕 웃음으로》를 댄스곡으로 편곡해 불렀는데 역시 완벽한 노래와 퍼포먼스로 신드롬을 이어갔다. 오랫동안 무시당하다 마침내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는 장면은 감동을 준다. 초아가 바로 그런 순간을 보여줬기 때문에 울컥했다는 사람이 많다. 댄스음악이지만 왠지 눈물이 난다는 댓글도 많았다. 이런 배경에서 크레용팝도 재조명됐다. 

크레용팝 《빠빠빠》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유튜브

오해 속에 묻힌 비운의 걸그룹 

크레용팝은 2012년 데뷔해 《댄싱퀸》을 발표했다. ‘비 오는 금요일 밤 아무도 놀아주지 않는 한 소녀가 결국 달빛 아래서 홀로 춤을 추는 모습’을 표현한 곡으로 코믹한 설정이 인상 깊고 음악과 퍼포먼스의 완성도도 높았다. 하지만 대중적인 반향이 없었다. 크레용팝은 동대문 등에서 길거리 공연을 하며 B급 활동을 이어갔다. 이때 소수지만 뜨거운 남성 팬덤이 생겨 ‘팝저씨’라 불렸다. 

2013년에 《빠빠빠》로 떴다. 헬멧 쓰고 뜀뛰기를 하는 직렬 5기통 춤이 선풍을 일으켰다. 인터넷에 입소문이 번지면서 ‘밈’에 등극했다. 2만5000원 주고 산 헬멧이었는데 이것도 히트상품이 됐다. 레이디 가가의 북미 투어에 오프닝 밴드로 설 정도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뮤지션으로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우스꽝스러운 퍼포먼스 그룹으로만 소비됐을 뿐이다. 그 퍼포먼스 때문에 음악적으론 오히려 저평가됐다. 

후속곡도 B급 분위기로 가면서 병맛 이미지가 완전히 자리 잡았다. 실력 없이 우스꽝스러운 퍼포먼스만 하는 팀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 와중에 한 멤버의 손가락 모양이 빌미가 돼 ‘일베 걸그룹’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아무 근거가 없는 소문인데도 사람들은 ‘정의 구현’을 한다며 크레용팝을 단죄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크레용팝은 잊힌 팀이 되고 말았다. 

초아의 공연으로 사람들은 크레용팝의 실력을 뒤늦게 인정하게 됐다. 헬멧 퍼포먼스를 보고 퍼포먼스 팀이라는 선입견을 가졌던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헬멧을 씌워 제자리뛰기를 시켰다니’라면서 한탄하는 댓글이 줄을 이었다. 

ⓒJTBC 제공

대중의 선입견을 바꾼 K팝 아이돌의 힘 

자연스럽게 한국 아이돌의 경쟁력도 재평가됐다. 《싱어게인》에서 초아와 제이민은 듀오 무대를 준비하며 ‘아이돌의 끈기와 악바리와 근성과 한을 보여주자’는 대화를 나눴다. 공연을 본 사람들은 아이돌의 힘에 경탄했다. 

‘아이돌 메인 보컬이었던 친구들은 다 초인들이구나. 노래 잘해 춤도 잘 춰 거기에 예쁘기까지’ ‘혹독한 과정을 견뎌낸 대한민국 아이돌의 근성을 처음으로 깨닫게 하는 무대입니다’라는 댓글들이 나타났다. 오랫동안 아이돌은 실력 없이 팬덤 지원만 받는, 가수 자격도 안 되는 가수라는 식의 대우를 받았다. 크레용팝의 헬멧춤만 보고 병맛 퍼포먼스 팀이라고 오해했던 것처럼, 아이돌의 춤만 보고 음악적으로 무시했던 세월이 길었다. 하지만 K팝 아이돌이 세계를 휩쓸면서 아이돌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다. 노래와 퍼포먼스를 혹독하게 수련한 실력자들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난다. 꿈을 향해 모든 것을 던진 열정의 주인공이라는 이미지도 생겼다. 초아의 무대를 보며 사람들은 한국 아이돌의 근성에 새삼 감탄했다. 

최근 《미스트롯2》에선 아이돌 연습생 출신 홍지윤이 놀라운 가창으로 예선 선에 올랐다. 본선 1차 팀미션에선 아이돌부가 현역부를 뛰어넘는 공연으로 올하트를 받았고, 아이돌 출신인 황우림이 본선 1차 팀미션 진에 올랐다. 퍼포먼스를 하면서도 노래에 흔들림이 없는 아이돌의 진가가 다시 한번 발휘됐다. 이들은 댄스트로트가 아닌 정통 트로트를 소화해 폭넓은 음악적 소화력을 과시하기까지 했다. 

이런 사건들이 모두 K팝의 힘을 보여줬다. 왜 전 세계에서 K팝이 성공하는지, 왜 지구의 젊은이들이 한국 아이돌에 경탄하는지 말이다. 우연이 아니었다. 한국 아이돌들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기량을 갈고닦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한때 아이돌은 립싱크의 대명사였지만, 요즘은 한국 아이돌처럼 고난도 퍼포먼스와 가창을 동시에 소화해 내는 뮤지션이 세계적으로 드물다. K팝 아이돌의 ‘끈기와 악바리 근성과 한’이 한류 열풍을 만든 것이다.  

초아의 무대를 보며 ‘저렇게 춤을 추면서도 숨 한 번 흐트러지지 않고 노래하기까지 얼마나 노력했을까’ 하며 감동하는 사람도 많다. 자신의 안일했던 삶을 돌아보기도 한다. 초아 신드롬이 사상누각이 아님을 확인시켜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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