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기업인 3인이 전하는 위기극복 노하우
  • 송창섭 기자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21.04.14 10:00
  • 호수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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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시사리서치 여론조사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은?
이건희-정주영-박태준-이병철-구본무 順

모두들 위기를 말한다. 그러나 위기처럼 양면성을 가진 것 또한 없다. 남들이 위험 앞에 옴짝달싹 못할 때 반대로 기회를 찾는 이에게 성공이 뒤따라가는 것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등 쟁쟁한 거목을 길러낸 오사카(大阪) 센바 상인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전해 내려온다. “장사꾼은 화살 바로 밑을 뚫고 걸어가야 한다.” ‘마케팅의 선구자’ 필립 코틀러가 “위기 마케팅은 무엇을 파는 게 아니라, 고객이 무엇을 사고 싶어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말한 것이나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가 “나만의 강점을 만들라”고 한 것도 같은 이치다.

ⓒ일러스트 신춘성
ⓒ일러스트 신춘성

정작 진짜 위기는 따로 있다. 우리가 믿어온 신념과 같은 고정관념이 점차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괴짜 경영자 호리에 다카후미(堀江貴文) 전 라이브도어 사장은 “‘일자리를 얻는다=회사에서 일한다’는 과거의 상식은 소리 없이 무너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우리 경제의 기초체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분석은 구문(舊聞)이 된 지 오래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중화경제권이 커지면서 우리 기업의 경쟁력은 점차 약화되고 있다.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의 쇠퇴가 단적인 예다. 좀 지난 통계지만 2019년 6월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의 조사(한·중 대학생 창업생태계 비교 연구)에서 중국 대졸자의 창업률은 8%인 반면, 한국은 0.8%를 기록했다. 유통기업 암웨이가 매년 펴내는 글로벌 기업가정신 리포트(AGER)도 이러한 현상을 잘 보여준다. 세계 25개국 35세 미만 청년들에게 ‘당신의 미래를 위해 창업하겠느냐’는 질문에 한국 응답자는 44%만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세계 평균치(57%)는 물론, 중국(49%)·일본(52%)보다 낮은 수준이다.

정년 보장 공시족 늘고 기업가정신 후퇴

그런 점에서 전설의 경영자에게 해답을 구하는 것은 나름 괜찮은 방법이다. 시사저널은 여론조사기관 시사리서치에 의뢰해 지난 3월29일 전국 506명을 대상으로 가장 존경하는 전설의 기업인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이들이 위기를 어떻게 돌파했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어록을 남겼는지 짚어봤다.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위기 이후 옛날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많다. 하지만 그냥 옛날이 아니다. 새로운 옛날이어야 한다. 그리고 “현재를 결정하는 것은 미래다”(킹 리우 대만 자이언트 자전거 창업자)는 말은 두고두고 곱씹어볼 대목이다.

“바람이 강할수록 연은 더 높게 뜬다. 지금 필요한 건 땀·희생 그리고 용기와 지혜”

이건희 삼성그룹 전 회장(1942~2020)

서울사대부고(1961), 일본 와세다대 졸업(1965)

삼성그룹 회장(1987~2020), IOC 위원(1996~2008)

이번 조사에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응답자의 31.1%가 선택했다. 세대별·지역별로도 고른 지지를 얻었다. 부친인 이병철 창업주가 삼성의 기초를 다졌다면, 이건희 전 회장은 삼성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부당한 방법으로 경영권을 세습하거나, 정부·국회 등 전방위적으로 로비에 나서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음에도 삼성의 영향력은 단연 국내 톱클래스다. 주력사인 삼성전자는 지난해 미국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 기업 인터브랜드가 발표한 ‘글로벌 100대 브랜드’에서 브랜드 가치 623억 달러(약 71조원)로 세계 5위를 기록했다. 이 전 회장이 총수에 오른 1987년 12월1일 시가총액이 1조원에 불과했던 삼성전자는 2021년 4월7일 종가 기준 511조원으로 늘어났다.

삼성과 이 전 회장의 성공신화에서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독일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다. 많은 경제사가들은 삼성 성공의 분기점을 이것으로 삼는다. 여러 언론을 통해 일화와 관련해 숱하게 소개된 것 역시 프랑크푸르트 선언이었다. 이건희식 신경영의 시작을 알린 이 선언은 1993년 6월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펜스키 호텔로 임원들을 소집하면서 시작됐다. 발단은 그 전 일본 오쿠라 호텔에서 이 전 회장과 일부 그룹사 사장단이 회의를 열면서다. 세탁기 조립 과정에서 생산직 직원이 세탁기 뚜껑 여닫이 부분이 맞지 않자 칼로 깎아내는 영상을 보던 이 전 회장은 순간 분노했다. 품질 경영을 외쳐온 자신의 말이 공염불이었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당시 이 전 회장의 해외순방에 동행한 손욱 전 삼성종합기술원 원장은 “지금도 마치 사자처럼 이글거리던 이건희 회장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며칠간 자지도, 먹지도 않고 마치 광인(狂人)처럼 삼성의 문제점을 쏟아냈다”고 술회했다. 임원들을 상대로 한 강연을 마친 뒤인 6월10일 10여 명의 사장을 따로 불러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이수빈 당시 비서실장이 “회장님, 질도 중요하지만 아직은 양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질과 양은 동전의 양면입니다”라고 말하자 이 전 회장은 들고 있던 티스푼을 테이블 위에 집어던지고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러고는 나중에 다시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질을 높이면 양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단기적으로는 그럴지 모르지만 질이 좋으면 고객이 그 물건을 찾게 되고 결국 양도 는다. 이것이 질과 양의 선순환 관계다.”

1987년 회장 취임 직후만 해도 이 전 회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 종종 나섰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정치는 3류”라는 발언을 한 뒤 언론 인터뷰는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신년사 등 회사에서의 공식 인사말이었다. “지금은 어느 나라에서 만드는가(Made in)는 의미가 없어진 반면, 누가 만드는가(Made by)가 중요한 시대가 됐다” “21세기는 단순히 물건을 파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물건뿐만 아니라 이미지와 문화까지 팔아야 한다”는 말이 이런 방식을 통해 흘러나온 것이다.

1997년 말 외환위기는 전대미문의 위기였다. 삼성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듬해인 1998년 신년사에서 이 전 회장은 “바람이 강하게 불수록 연은 더 높게 뜰 수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기를 도약의 계기로, 불황을 체질 강화의 디딤돌로 삼을 수 있는 땀과 희생 그리고 용기와 지혜”라고 임직원들의 용기를 북돋는 말을 했다.

학창 시절 럭비선수로 활동했으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활동한 그는 기업 경영을 스포츠 경기에 자주 비유했다. 에세이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그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몸을 던져서라도 난관을 돌파하는 럭비 정신으로 현재의 정신적 패배주의를 극복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주변에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실패 자체가 아니라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 전 회장은 난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승부사적 기질도 다분했다. “돌다리를 두드려보고 건너라지만, 돌다리를 왜 두드려보는가. 나는 나무다리라도 다리가 있으면 건너가라고 한다. 위험을 각오하고 선두에서 달려가야, 기회를 선점할 수 있다”는 그의 말에서 이러한 기질을 엿볼 수 있다. 또 “대나무는 속이 비어 있지만, 마디가 있기 때문에 강하다. 개인이나 조직, 국가도 위기를 이겨내고 새로운 마디를 만들어낼 때 더욱 발전한다”고 말한 대목에선 위기 때 기업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잘 보여준다.

“일이 힘들고 어렵다는 건 가치 있고 열매가 크다는 뜻”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1915~2001)

통천송전소학교 졸업(1930), 현대그룹 회장(1971~1987)

통일국민당 대선후보(1992)

올해는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 딱 20년째 되는 해다. 정 전 회장을 지칭하는 말 중 가장 많이 쓰이는 게 도전과 혁신 그리고 소통이다. 평소 그는 “나는 열심히 일해서 성공한 노동자일 뿐 재벌이 아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재계 1위 기업을 이끈 기업인답지 않게 근검절약의 삶을 살다간 것은 그의 사후 세상에 알려졌다.

‘현대맨’으로 불린 현대건설 임직원들 사이에는 한때 “현장이 있는 곳에 (정주영) 회장이 있다”는 말이 자주 회자됐다. 직원과의 소통에서도 정 전 회장은 발군의 능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6년 11월 미국 타임지는 지난 60년간 각 분야의 아시아 영웅을 정했는데 기업인으로는 유일하게 정 전 회장 이름을 올리면서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에서 정주영은 단순히 기업가로 평가받지 않는다. 기업가라기보다 한국 산업의 근대화를 선두에서 지휘한 불굴의 인간으로 평가받는다.” 2010년 자유경제원이 전국 20여 개 대학 학생들에게 ‘한국에서 다시 부활하기 바라는 기업인을 꼽으라면 누구를 선택하겠는가’를 물었는데 65%가 정 전 회장을 꼽아 25%였던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를 크게 앞섰다.

타임지는 지난 2000년 정 전 회장 사망 이후 쓴 추모기사에서 “정주영은 많은 사람이 틀렸음을 증명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한때 유명했던 “이봐, 해보기나 했어? 문제는 해결하라고 있는 거야”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말은 그의 불굴의 도전정신을 정확히 보여준다. 위기를 바라보는 시각도 남달랐다. 다음은 정 전 회장의 말이다. “어떤 일이 아주 힘들고 어렵다는 것은 그 일이 그만큼 해야 할 가치가 있고, 그 열매 또한 크다는 거야.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나 겨우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앞설 수 없으며 결국 도태되게 마련이지. 힘든 일을 앞에 놓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덤벼들면 안 보이던 방법이 보이지만 반대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있는 길도 안 보이게 되는 거야.”

정 전 회장은 특히 자동차 사업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그는 종종 “자동차는 그 나라 산업기술의 척도며, 달리는 국기다. 자동차를 완벽하게 생산하는 나라는 항공기를 포함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생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67년 현대자동차는 그렇게 탄생했다. 사업 초기 미국 완성차 메이커와 기술제휴를 모색하던 정 전 회장은 1966년 포드 관계자가 내한했을 때를 기회로 삼았다. 엔진 구조부터 변속장치, 제동장치, 1만여 개 부품과 명칭을 모조리 외워 포드 측 인사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그 결과 포드와 현대는 국산 부품 21%, 미국산 부품 79%를 사용하는 1차 기술계약을 체결했다. 1976년 순수 국산 자동차 1호 포니는 이런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작품이다.

당시 기업인들이 그렇듯, 기업 경영을 통한 경제 번영은 정 전 회장에게도 숙명 같은 일이었다. “우리가 잘되는 것이 나라가 잘되는 것이며, 나라가 잘되는 것이 우리가 잘되는 것이다.” 인재를 바라보는 안목도 남달랐다. 그는 사람을 어떻게 쓰느냐가 경영의 열쇠라고 봤다. 주변에서 정 전 회장을 가리켜 “사람을 부리는 명수”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가 “모든 것의 주체는 사람이다. 가정과 사회, 국가의 주체도 사람이다. 사업을 하는 것은 사람을 얻는 길이고, 사람을 얻는 일은 바로 그 사람의 신뢰를 얻는 일”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주변에서 기적을 이야기할 때 그는 단호하게 “종교에는 기적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정치와 경제에는 기적이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전해진다.

“기적이란 거저 오는 게 아니다. 모두의 희생과 헌신의 결과”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1927~2011)

육사(6기) 임관(1948), 포스코 회장(1968~1992)

11·13·14대 의원, 국무총리(2000)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은 제철보국(製鐵保國)이라는 신념 하나로 평생을 산 기업인이다. 포스코가 그의 첫 직장은 아니다. 포항제철(포스코 전신) 대표이사로 가기 전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대한중석 사장으로 일했다. 적자에 허덕이던 대한중석을 반듯한 기업으로 탈바꿈시킨 그에게 기다리고 있던 것은 종합제철소 설립이라는 박 대통령의 원대한 비전이었다. 1968년 4월1일 포항제철은 그렇게 탄생했다. 당시 포항제철은 1965년 체결된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설립됐다. 1970년 4월1일 착공에 들어간 생산시설은 3년 뒤인 1973년 7월3일 마무리됐다. 완공 후 고로에서 펄펄 끓는 쇳물이 나오자 박 전 회장은 “기적이란 거저 오는 게 아니다. 종업원과 관리자 그리고 임원들 모두의 희생과 헌신의 결과이며, 기회가 왔을 때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신일본제철 공장 견학 당시 직원들과 천천히 걸으며 곁눈질로 생산시설 곳곳을 살펴본 것은 잘 알려진 일화다.

오늘날 중국 경제의 기초를 다진 덩샤오핑(鄧小平)은 박 전 회장을 남다르게 봤다. 1992년 여름 어느 날 자정 덩샤오핑은 상하이(上海) 영빈관으로 박 전 회장을 초청했다. 40분간 진행된 독대에서 그는 한국의 비약적인 경제 발전, 포항제철의 선도적 역할을 얘기하더니 “중국에 당신네 같은 제철소를 짓고 싶은데 도와달라”고 투자를 요청했다. 덩샤오핑이 박 전 회장에게 간곡하게 요청한 데는 그를 만나기 몇 해 전 일본에서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신일본제철 회장으로부터 “제철업을 하려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이 꼭 필요한데 그가 포항제철 박태준”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였다.

이 일화는 1978년 11월 박 전 회장이 일본을 찾아 이나야마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들은 것이다. 한 달 전인 10월 일본을 찾은 덩샤오핑이 “중국도 한국의 포항제철과 같이 현대화된 일관제철소를 만들고 싶다”고 하자 그 자리에 있던 이나야마 회장은 “중국에 박태준 같은 사람이 없어서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덩샤오핑의 대답이 걸작이다. “그럼 박태준을 수입하면 될 것 아닌가.” 박 전 회장과 덩샤오핑의 인연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중국에서 돌아온 박 전 회장은 이후 덩샤오핑이 보낸 바오산(寶山)강철의 셰치화(謝企華) 부사장 일행을 데리고 다니며 포항·광양 공장을 보여줬다. 제철소의 설비 도면, 회사 규정집 등도 내줬다. 내부에서 기술 유출 우려를 표시하자 그는 “우리도 일본으로부터 그렇게 기술을 얻었다. 그렇게 기술을 줘야만 우리가 더 좋은 기술을 개발하고자 노력하는 법”이라고 말했다.

1990년대 초반 바오산강철은 연산 200만 톤 생산에 불과했다. 바오산강철 제1고로 화입식이 있었던 1985년부터 중국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제철보국을 국가의 핵심 정책으로 삼았다.

당초 박 회장은 포항, 광양에 이어 중국에 1000만 톤짜리 제3제철소를 지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박 회장이 회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이 계획은 흐지부지됐다. 그 후 바오산강철은 일본 신일본제철의 도움을 받아 공장 신·증축을 이어갔다. 훗날 우한(武漢)강철과 합쳐진 바오우(寶武)는 현재 연산 기준 세계 최대 철강회사가 됐다.

그는 “사람이란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살거나 자기 명예를 위해 사는 등 여러 가지 목표가 있을 것이다. 만약 돈을 목적으로 들어온 사람이 있다면 당장 나가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랑스러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곳에 왔다.” 어쩌면 요즘 시대에는 맞지 않는 문법이지만 그때는 그게 통하던 시절이었다. 1971년 7대 대선을 앞두고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이 설비 입찰에 일본종합상사 마루베니를 요청했지만 번번이 탈락시킨 것은 그가 얼마나 확실하게 정경 분리 원칙을 고수했는지를 보여준다. “1972년 제강공장 기초공사장에서 강철 파일 박기가 한창이었다. 파일 박기는 지하 20~30m 암반까지 파일을 하나씩 두드려 박는 작업이었다. 박태준은 높은 구조물 위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내려와 불도저를 불러왔다. ‘밀어봐.’ 불도저가 비스듬히 기운 파일을 건드리자 맥없이 쓰러졌다. ‘그 옆에 있는 것도 밀어봐.’ 역시 맥없이 쓰러졌다. 순간 공사 책임자를 불러 ‘당신은 민족 반역자요. 이 공장은 조상의 혈세로 짓는 공장이란 말이요. 부실공사가 곧 적대행위라는 걸 모르나.’ 설비를 책임진 일본 회사가 파견한 현장감독을 향해서는 ‘여보시오, 당신 나라의 공사도 이런 식으로 원칙을 무시하고 대충 짓는 것인가’라며 분노를 표출했다.”(《박태준 평전》중)

일본에서 나고 자란 박 전 회장은 정·재계 인사들과 친분이 두텁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자민련 총재였던 박 전 회장은 특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해 30억 달러 상당의 구제금융 지원을 이끌어냈다. 단 한 주의 포스코 주식도 자식들에게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난 박 전 회장의 살아생전 마지막 꿈은 북한에 제철소를 세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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