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감과 매혹과 푸른 밤 사이, 영화 《낙원의 밤》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you@sisajournal.com)
  • 승인 2021.04.18 13:00
  • 호수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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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낙원의 밤》 이 가진 단점, 그럼에도 강렬한 매력

한국영화계에서 박훈정 감독이 점하는 위치는 조금 독특하다. 처음 주목받은 건 스토리텔러로서다. 2010년 김지운의 《악마를 보았다》와 류승완의 《부당거래》에 각본을 제공하며 시나리오 작가로서는 드물게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혈투》로 연출에 입문한 후, 두 번째 작품 《신세계》를 통해선 한국형 누아르 장르의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는 평을 받았다.

이후 《대호》의 흥행 부진과 《브이아이피》의 여혐 논란,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부재한 한국영화 시장에 《마녀》를 내놓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지지자와 함께 과대평가된 감독이란 평이 동시에 따라붙었다. 이 모든 논란에도 이름 하나만으로 관객의 시선을 끄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이라는 사실엔 이견을 드러낼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낙원의 밤》에 쏠린 관심의 중심에도 박훈정이라는 이름이 있다.

영화 《낙원의 밤》 스틸컷ⓒ넷플릭스 제공
영화 《낙원의 밤》 스틸컷ⓒ넷플릭스 제공

어디서 본 듯한 ‘새로울 것 없는 스토리’

박태구(엄태구)는 조직의 에이스다. 라이벌 조직이 탐낼 정도로 실력이 좋다. 어느 날 누나와 조카가 의문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태구는 그 배후에 상대 조직 북성파가 있다고 확신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복수 완료. 알다시피, 복수는 더 큰 복수를 부르는 법이다. 해외로 도피하기 위해 태구는 제주도로 잠시 은신한다. 그리고 제주에서 불법무기상 삼촌과 단둘이 사는 재연(전여빈)을 만난다.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재연은 어떤 상황 앞에서도 초연하다. 태구는 그런 재연과 싸우며 정이 든다. 그러나 낙원의 밤도 잠시. 북성파 2인자 마이사(차승원)가 태구를 쫓아 제주도로 오면서 낙원은 나락으로 변모한다.

이야기는 새로울 게 없다. 누아르 영화의 원형적 틀을 익숙하게 따라간다. 그리고 수많은 기시감이 딸려온다. 태구가 몸을 숨기기 위해 제주도로 가는 그림은 도쿄의 야쿠자가 조직의 내분을 피해 오키나와로 가는 기타노 다케시의 《소나티네》 여정을 호출한다. 주인공이 자기 머리에 지그시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소나티네》 속 이미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이스턴 프라미스》 목욕탕 액션 장면 등도 즉각적으로 떠오른다. 심지어 박훈정 감독 전작에서 본 설정들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놀랍진 않다. 《낙원의 밤》이 품은 숱한 기시감은 박훈정 감독 전작들 행보에 대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킬 뿐. 알다시피 《신세계》는 《무간도》의 설정이 《도니 브래스코》 갈등을 통과한 후 《대부》로 달려가는 이야기였다. 《마녀》 역시 《한나》의 설정에 《킬빌》을 끼얹어 《루시》와 결합한 듯한 작품이었다. 그러니까 박훈정 감독은 이야기를 독창적으로 만드는 쪽보다, 기존 레퍼런스를 비틀어서 조합해 내는 데 조금 더 능한 감독이다. 그에 대한 평가가 자주 엇갈리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인용이 잦기에 누군가는 그의 작품은 ‘짜깁기’라 하고, 누군가는 ‘장르의 법칙을 저글링’ 할 줄 안다고 한다. 

결국 판단의 기준은 창작자가 장르적 문법을 얼마나 잘 활용해 영화적 비전을 제시하느냐일 텐데, 아쉽게도 《낙원의 밤》은 기존 아이디어들이 긴밀하게 조합됐다고 보기 어렵다. 예견된 결말로 착실하게 달리는 플롯에선 긴장감이 쉬이 느껴지지 않는다.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주인공들의 고민은 깊은 공감을 끄집어내기보다 불쑥 제시되는 쪽이다. 대사 작법도 김이 샌다. “거 죽기 딱 좋은 날씨네” “살려는 드릴게” “드루와 드루와” 등 명대사를 쏟아낸 《신세계》와 비교했을 때 대사의 맛이 신기할 정도로 결여돼 있고, 종종 촌스럽기도 하다. 장면과 잘 붙지 않은 채 던져지는 앙상한 대사도 많다.

영화는 후반부 10분에 장르의 쾌감을 때려박는데 그 자체로는 멋들어지지만, 영화 전체적으로 보면 분배의 문제인지 편집의 문제인지 균형의 추가 안 맞는다는 인상도 안긴다. ‘흥이 서서히 달궈지다가 마지막 10분에서 기어코 터진다’가 아니라, ‘마지막 10분을 위해 감내하며 달려온 영화’라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건 여러모로 적신호다.

영화 《낙원의 밤》 스틸컷ⓒ넷플릭스 제공
영화 《낙원의 밤》 스틸컷ⓒ넷플릭스 제공

제주도의 풍경과 잘 어우러진 ‘잔인한 서정’의 힘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장르물로 치부하기엔 《낙원의 밤》이 품은 몇 가지 강력한 매력을 외면하기 어렵다. 먼저 제주도에 대한 접근이다. 이 영화에서 제주도라는 무대가 이야기에 영향을 미치는 건 거의 없다. 그러나 분위기에 끼치는 정서적 영향은 절대적이다. 가령 석양이 지는 순간의 채도까지 신경 써서 담아낸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이 피와 살점이 터지는 감독 특유의 하드코어적인 연출력과 맞부딪치면서 ‘잔인한 서정’이란 묘한 매력을 안긴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힐링’으로서의 제주, ‘관광지’로서의 제주, ‘일탈’로서의 제주가 아닌, 제주도 그 자체의 얼굴에 진짜 주목했다는 점이다. 제주도 출신인 필자는 진짜 제주도의 매력은 여행객들이 자주 가는 ‘관광지’나 ‘게스트하우스’가 아닌, 바다에 비친 석양이나 우거진 숲의 그림자들이 자아내는 낭만적이고도 멜랑콜리한 대비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면모가 제대로 담겼다. 그러니까 《낙원의 밤》은 제주도라는 배경을 기존 이미지에 맞춰 소비하지 않는다. ‘힐링’ ‘일탈’ ‘관광’ ‘휴식’ 등의 콘셉트에 제주도를 남용하려는 영화들에 좋은 본보기가 생겼다는 점에서 반갑다.

또 하나는 여성 캐릭터 활용이다. 《낙원의 밤》은 수컷들의 으르렁대는 싸움에 재연이 총을 들고 유유히 들어옴으로써 빤해지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 박훈정 감독은 《브이아이피》에서 ‘여성을 도구화했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이것이 여성을 주체적으로 내세운 《마녀》와 《낙원의 밤》 탄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박훈정 감독 자신은 두 영화가 《브이아이피》 이전에 구상된 작품이기에 ‘자기검열’과는 무관하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럴까. 주위의 날 선 반응들이 감독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가슴 깊이 새겨지지 않았을까. 진실은 감독도 모르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결과적으로 시대 변화에 적극적으로 호흡하는 감독이란 인상을 안긴다. 그런 의미에서 《브이아이피》는 그에게 백신일지도.

 

엄태구와 전여빈, 기억할 얼굴

엄태구, 전여빈 두 배우가 품은 이미지는 《낙원의 밤》의 또 하나의 정서로 작용한다. 전여빈은 다양한 빛깔을 품은 배우다. 카메라 각도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 보이는 얼굴선이 특히나 매력적인데, 거친 장르물 안에서 흔들림 없이 중심을 잡는 걸 보면 담력도 상담함이 느껴진다. 최근 《빈센조》에서의 활약도 그렇고, 전여빈의 시대가 가까이 온 예감이 든다. 엄태구가 지닌 특유의 허스키한 음성은 고스란히 영화 분위기로 전이된다. 나는 이 배우의 그을린 듯한 목소리가 큰 매력이고 장점인 동시에 무기라고 생각하는데, 같은 이유로 한계라고 생각하는 이도 적지 않을 것 같다. 첫 상업 주연을 맡은 《낙원의 밤》을 통해 터닝포인트를 마련한 그가, 자신을 향한 의심을 하나둘 뒤집으며 달리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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