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니얼’에 빠진 젊은이들
  • 하재근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5.15 12:00
  • 호수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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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음식·인테리어 등의 영역에 복고 인기…따뜻함과 재미 결합하며 저성장 시대 파고들어

요즘 젊은 층이 선호하는 카페 음식 가운데 크로플과 흑임자가 있다. 크로플은 크루아상과 와플의 합성어로 크루아상 생지를 와플 기계로 구워 아이스크림, 과일 등을 올려 먹는 음식이다. 밀가루 탄수화물과 단맛이 조화된 전형적인 디저트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흑임자는 전통적인 먹거리로 트렌디한 디저트 재료로는 낯설다. 중장년층의 건강음식 같은 느낌인데 그런 흑임자가 인기 디저트 재료라는 점이 이채롭다. 심지어 쑥과 인절미까지 떴다. 젊은 층 사이에 나타나는 카페 트렌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하나가 음식이다. 그래서 음식이 그때그때의 트렌드를 대표하는 핫키워드로 주목받는 것인데 의외로 전통적인 식재료가 그 주인공이 된 것이다. 

ⓒ시사저널 임준선·지그재그 광고 캡쳐·빙그레·오리온·CJ제일제당 제공
ⓒ시사저널 임준선·지그재그 광고 캡쳐·빙그레·오리온·CJ제일제당 제공

흑임자가 밀레니얼의 ‘최애’ 음식? 

스타벅스는 2020년 핼러윈 시즌 메뉴로 흑임자 음료 2종을 선보였다. 투썸플레이스는 흑임자에 더해 인절미와 쑥을 활용한 메뉴들도 출시했다. 공차, 커피빈, 빽다방, 파스쿠찌 등도 신메뉴 주재료로 흑임자를 선택했다. 업체 기획자들의 생각에 의해 나타난 흐름이 아니다. 소셜미디어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젊은이들이 이런 음식을 선호한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시장조사를 통해 젊은 소비자에 맞춰 기획했는데 초코나 생크림이 아닌 흑임자, 쑥, 인절미가 주재료라는 것이다. 

이런 현상의 배경에 ‘할매니얼’ 트렌드가 있다. 할매니얼이란 할머니와 ‘밀레니얼’(1982~2000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을 합친 단어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좋아할 것 같은 입맛을 가진 밀레니얼 세대라는 뜻이다. 

몇 년 전부터 뉴트로 열풍이 거세게 일어났다. 뉴트로는 새로움(New)와 복고(Retro)를 합친 신조어로, 복고를 새롭게 즐기는 경향을 말한다. 원래 복고는 과거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것인데 밀레니얼 세대는 과거를 새로운 트렌드로 받아들인다. 젊은 세대에겐 과거의 기억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옛 풍경은 추억의 대상이 아닌 낯설고 새로운 그 무엇이다. 그래서 과거의 것들이 밀레니얼 세대에겐 새로운 트렌드의 대상이 됐다. 

그 결과 젊은 층을 대상으로 ‘○○당(堂), ○○옥(屋), ○○상회(商會)’와 같은 옛날식 이름을 쓰는 업소들이 생겨났다. 1970~80년대 분식집에서 썼던 초록색 점박이 플라스틱 접시 등을 배치한 카페도 나타났다. 과거 제품 로고가 찍힌 유리컵도 인기다. 특히 88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가 새겨진 컵은 ‘레어템’ 대접을 받는다. 

옛 정취가 남아 있는 골목들도 떴다. 서울 구도심의 익선동, 을지로 골목이 대표적이다. 특히 옛날 느낌의 다방 등이 남아 있는 을지로 골목은 ‘힙지로’(힙스터+을지로)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이러한 뉴트로 신드롬이 음식 취향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 할매니얼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GS리테일 관계자는 “2030 젊은 세대가 레트로 아이템에 열광하고 있다. 할매니얼 현상도 힙지로와 같은 뉴트로 트렌드 중 하나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빙과 업계의 빙그레는 팥 아이스바 ‘비비빅’을 변형한 인절미맛, 흑임자맛, 단호박맛 ‘비비빅’을 내놨다. 롯데푸드 ‘빵빠레 흑임자’, 배스킨라빈스 ‘아이스 모찌 흑임자’, 해태제과 ‘쌍쌍바 미숫가루’, 빙그레 ‘투게더 흑임자’, CU ‘강릉초당 인절미 순두부콘’ 등 다양한 할매니얼 아이스크림이 쏟아졌다. 

과자 업계에선 오리온이 ‘찰 초코파이 흑임자·인절미’를 출시해 3개월 만에 1500만 개를 팔았다. 해태제과는 ‘오예스 미숫가루 라테’를 내놨다. CU에선 ‘흑임자 인절미 스낵’이 나왔다. 우유 업계에선 서울우유협동조합이 흑임자·귀리 우유를 선보였고, 푸르밀은 미숫가루 우유를 내놨다. 

심지어 현대그린푸드가 고령층을 대상으로 출시한 유동식 ‘그리팅 죽’도 매출의 절반 이상이 밀레니얼 세대에게서 발생했다. 그러자 CJ제일제당도 비비고 흑임자죽을 내놨다. CJ 관계자는 “젊은 세대가 ‘할매 입맛’ 식품에 열광하고 있어 관련 제품을 출시하게 됐다”고 출시 배경을 설명했다. 세븐일레븐은 인절미 디저트 시리즈 3종을 출시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할매니얼 트렌드가 업계를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할매니얼에 담긴 ‘맛의 복고’ 

최근 몇 년간 강한 단맛, 달고 짠맛, 맵고 짠맛 등 자극적인 맛이 유행했는데 자연스럽게 다른 트렌드가 나올 시점이었다. 그것이 복고 트렌드와 맞물려 맛의 복고로 간 것이다. 식품 유통업계 입장에서도 달고 자극적인 식품들의 시장이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다른 맛의 소비시장을 개척할 시기였다. 

디지털 첨단 문명의 세례가 강력할수록 그에 대한 피로감도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날로그 복고의 유행을 부른다. 그래서 최신 휴대폰에 민감한 젊은 세대가 동묘 앞 풍물시장에서 구제 옷을 고르고 을지로 옛 골목에서 흑임자 디저트를 찾는다. 

세상이 극단적인 경쟁으로 각박하다는 점도 옛 정취를 찾는 이유다. 현실이 각박해질수록 사람들은 따뜻한 인간미를 찾게 된다. 복고가 바로 그런 따뜻한 정서를 전해 준다. 현재 젊은 세대는 생존경쟁과 양극화 등으로 만성적인 재난 상황에 처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따뜻함에 대한 갈구가 절실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복고 트렌드로 가는 것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옛날식 먹거리도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밀레니얼 세대는 나만의 개성을 표현하려는 욕구도 강하다. 디저트 시장에서 심심한 곡물은 튈 수밖에 없다. 웰빙 바람도 영향을 미쳤다. 밀레니얼 세대는 몸 가꾸기에도 관심이 많다. 그렇다 보니 건강한 먹거리에도 관심이 많아졌다. 인터넷 시대 이후 유희가 최고의 가치가 됐는데, 곡물 디저트처럼 생소한 것을 먹는 것도 유희의 한 방편이 됐다. 재미있는 B급 문화 같은 느낌도 있다. 이런 것들이 할매니얼 현상에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해외에선 몇 년 전부터 ‘그래니 시크(granny chic·세련된 할머니)’ 또는 ‘그랜드밀레니얼(grandmillennial)’이라는 용어가 쓰였다. 그랜드밀레니얼은 할머니(grandmother)와 밀레니얼을 결합한 말로, ‘할매니얼’과 유사한 느낌이다. 밀레니얼 세대가 패션·음식·인테리어 등의 영역에서 ‘옛날 할머니 스타일’을 세련되게 재해석해 추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성장 불황이 뉴노멀로 자리 잡으면서 젊은 세대의 불안이 만성화할 수밖에 없게 됐다. 한편, 새로운 재미를 원하는 추세도 이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따뜻한 품 같으면서 동시에 신선한 재미도 주는 복고, 뉴트로에 대한 젊은이들의 열광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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