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 소환해 푸틴을 저격하다
  • 클레어함 유럽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5.27 11:00
  • 호수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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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 헤븐》으로 돌아온 비탈리 만스키 감독이 말하는 러시아의 비극

러시아의 대표적 영화감독 비탈리 만스키(58)가 돌아왔다. 2018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권력 비화를 담은 《푸틴의 증인들》로 세계 영화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던 그가 이번에는 《고르바초프. 헤븐(Gorbachev. Heaven)》이라는 신작을 선보였다. 독일은 자국의 통일에 큰 기여를 한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에 관한 영화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난 4월 동유럽 및 러시아 시네마를 소개하는 비스바덴의 ‘고이스트(GoEast)영화제’를 거쳐 5월 뮌헨의 다큐영화제 ‘독페스트(DOK.FEST)’에 초청 상영 중이다.

러시아에서 반정부 성향인 만스키 감독은 수시로 생명의 위협을 받아왔고, 2014년 이후부터는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살고 있다. 그는 4월 집행위원장직을 맡고 있는 ‘아트독페스트(Art Doc Fest)’ 기간 극장에서 친정부 괴한들로부터 습격을 받기도 했다. 이 영화제는 그가 2007년 창립한 러시아 최대 다큐영화제로 러시아의 모스크바와 상페테르부르크,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열린다.

만스키 감독은 최근 러시아에서 푸틴 대통령의 가장 강력한 정적으로 떠오른 야권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에 대한 응원도 아끼지 않는다. 푸틴 정권이 나발니에게 행한 독약 테러에 항의하며 러시아연방보안국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여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최근 나발니는 수감 중 20여 일의 단식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만스키 감독은 총 17편을 연출하며 50여 개가 넘는 상을 수상했지만, 현재 그의 작품은 러시아 배급이 금지된 상태다. 영화인으로서 그가 직면한 현실은 러시아 사회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필자는 5월17일 화상으로 만스키 감독을 만나 현 러시아 상황에 대한 그의 시각에 대해 들어봤다.

영화 《고르바초프. 헤븐》 촬영 중 포즈를 취한 만스키 감독(왼쪽)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Vitaly Mansky 페북
영화 《고르바초프. 헤븐》 촬영 중 포즈를 취한 만스키 감독(왼쪽)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Vitaly Mansky 페북

《고르바초프. 헤븐》의 제작 동기가 궁금하다. 90세 고령인 고르바초프가 현재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고르바초프는 소련이 민주주의로 이행하던 시기 정부수반이었다. 그가 여전히 생존하는 가운데 지금 러시아는 그의 이상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고, 심지어 그가 배반자로 여겨지는 현실이 아이러니하다. 나는 언젠가 후세들이 고르바초프가 러시아를 위해 노력했던 일들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의 외로운 노년 이미지를 기록하고 싶었다.”

고르바초프는 영화 속 인터뷰에서 ‘왜 자신이 서구에서는 영웅으로 환영받는데, 러시아에서는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명확한 답을 피했다. 본인은 이런 평가의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나.

“지금의 푸틴 정권은 세계가 소련을 두려워하던 시절이 러시아인들이 가장 행복했던 황금기라고 선전하고 있다. 이런 논리로 고르바초프의 범죄는 그가 러시아를 냉전 구도에서 (미국에) 지게 만들고, 세계무대에서 러시아가 가졌던 큰 영향력을 잃게 만든 것이다.”

영화 《갈매기》로 2015년 Artdocfest에서 상을 받은 나발니(오른쪽)와 만스키 감독ⓒVitaly Mansky 페북
영화 《갈매기》로 2015년 Artdocfest에서 상을 받은 나발니(오른쪽)와 만스키 감독ⓒVitaly Mansky 페북

영화에서 ‘자유의 부재는 러시아의 자연스러운 존재 형식’이라고 언급했는데, 고르바초프 정부 시절에는 어떠했나.

“러시아엔 민주주의가 존재한 적이 없다. 고르바초프 시절은 민주적인 사회에 대한 희망이 존재했던 시기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한 사회를 민주주의라고 정의 내리려면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과 인권이 최우선 가치에 놓여야 한다.”

이 다큐를 공동 제작한 체코의 경우엔 지난 30년간 민주주의를 향유해 왔는데, 러시아의 민주화는지연되는 이유는.

“역사적 맥락과 관계가 깊다. 광대한 영토를 가진 러시아에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존재한다면 더 작게 분해될 것을 많은 국민이 우려한다. 권력자들은 민주주의가 내전이나 시스템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국민에게 들려준다. 반면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애초에 좋은 협력관계로 독립했고 현재도 평화롭게 공존해 오고 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1991년 사임 때 모스크바에 검소한 아파트 한 채가 재산의 전부였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의 시(詩)와 부인에 대한 애정표현도 뜻밖이었다. 세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유력한 정치인의 ‘사랑이 인생 최고의 가치’라는 태도가 다소 낯설다. 정치인의 이런 인간적인 태도는 가부장적인 러시아 사회에선 오히려 약점으로 여겨질 것 같다.

“좋은 질문이다. 전통적인 러시아 정치판에서는 약점이 맞지만, 나는 앞으로 이런 인간적인 정치인들을 보고 싶다. 고령의 고르바초프는 여전히 활동적이고 인생을 즐기고 있다. 반면 푸틴 대통령은 아주 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국민들은 그가 결혼을 했는지 자녀는 몇 명인지조차도 모른다. 자신의 감정과 사생활을 완전히 숨기는 그는 고르바초프와 정반대다.”

러시아의 권위 있는 ‘화이트 엘리펀트 어워드’에서 나발니의 다큐가 ‘올해의 이벤트’ 부문 특별상 후보에 오른 것을 두고 러시아 영화계의 내분이 있었다. 유명 감독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는 자신의 최신작 《Dear Comrades!》를 철회했고, 《위선의 태양》으로 오스카상을 수상했던 콘찰로프스키의 동생 니키타 미할코프 감독도 반대 의견을 개진했다. 아울러 영화계 단체들도 다른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사태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나발니의 다큐는 정식 ‘최고 다큐상’ 후보도 아니고, 특별한 이벤트의 성격을 지닌 부문에서는 후보 자격이 있다고 본다. 러시아영화평론가조합은 모두 우호적으로 의견을 도출한 것으로 안다. 다만 반대하는 이들은 친푸틴 성향인 미할코프 감독에 의존해야 하는 사람들, 푸틴 대통령과 가까운 재벌 알리셰르 우스마노프가 프로듀서인 콘찰로프스키 감독 등 경제적 동기에 의한 개별적인 결정이라고 추측한다.”

영화제 기간 중 친정부 세력이 벨라루스 영화 《집으로(Homeward)》에 대해 ‘크림반도 병합’이라는 표현을 문제 삼아 소동을 일으켰다고 들었는데, 그럼 이들이 옳다고 여기는 표현은 무엇일까 궁금하다.

“이들은 소련의 귀환, 즉 러시아 제국의 과거 모든 영토의 탈환을 꿈꾼다. 크림반도는 그중 하나로 ‘러시아의 역사적 영토 회복’이 그들에겐 정답인 셈이다. 이들은 동유럽도 러시아의 영향권 아래 둬야 한다고 믿는다.”

만스키 감독이 지난해 야권운동가 나발니의 독약 테러에 항의하며 러시아연방보안국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모습ⓒVitaly Mansky 페북
만스키 감독이 지난해 야권운동가 나발니의 독약 테러에 항의하며 러시아연방보안국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모습ⓒVitaly Mansky 페북

러시아의 영화감독으로서 어느 정도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나.

“우선 러시아에서는 영화상영 시 정부 허가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영화 속에 나발니라는 이름이 언급된다면, 라이선스 취득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불허 리스트도 무척 방대하다. 우리 영화제는 매년 21편의 러시아 관련 다큐를 소개하고 있는데, 전 세계 영화제와 극장 등에서 상영되고 있지만 창립 이래 이 프로그램 중 단 한 편도 국영TV에서 방영되지 않았다. 2014년 내가 크림반도 합병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힌 이래 내 작품들은 모두 러시아 배급이 불허되었다. 이는 다른 영화인들에게 배급 허가를 빌미로 비탈리 만스키의 길을 가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지난 4월 영화제 기간 물리적 폭력을 당했지만 경찰이 출동조차 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신변의 위협과 정치적 탄압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계속 저항하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나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 있다면 이런 문제들에 대응할 수 있지만, 혹시라도 약간의 의구심으로 흔들린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나는 권력자들의 생리를 이해하고 있고 그들이 두렵지 않다. 그들은 신도 초인도 아니며, 나와 당신 같은 평범한 인간일 뿐이고 정치적 지위는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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