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에 기거하는 ‘n번방’의 괴물들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6.12 15:00
  • 호수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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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바꾼 영화 《#위왓치유》가 던지는 메시지
“가해자는 우리 가까이에 있다”

‘n번방’ 이전에 수많은 ‘n번’들이 있었다.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웰컴 투 비디오’가 있었고, 그 이전에 ‘버닝썬’ 카톡방과 음란물 불법 유통을 주도한 ‘웹하드 카르텔’이 있었고, 1999년 개설돼 17년간 음란물의 성지로 통한 ‘소라넷’이 있었다. 이는 디지털 성범죄에 경종을 울릴 ‘n번’의 기회가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솜방망이 처벌로 대응하며 범죄자 묵인의 시그널을 보내는 사이, 법의 사각지대를 노린 디지털 성범죄 수법은 더 교묘해졌고, 수많은 n번이 무대를 바꾸며 증식했고, 피해자들의 비명은 늘어났고, 검은 독버섯은 미성년자로까지 빠르게 확산됐다.

전 국민의 공분을 산 ‘n번방’ 사건은 소라넷에서 자라난 디지털 성범죄가 얼마나 진화했는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가해자들은 ‘그루밍(길들이기)’이라는 가면을 쓰고 미성년자들 심리를 통제했다. 피해자 스스로 가학적인 영상을 촬영하도록 조종했고, 이를 빌미로 협박을 가하기도 했다. 이곳에서 피해자는 욕구 분출을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n번방’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고 주범들이 잇따라 중형을 받으면서, ‘n번방’ 사건은 디지털 성범죄가 중대 범죄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

ⓒ찬란 제공
ⓒ찬란 제공

2458명 남성이 12세 소녀 계정에 찾아온 까닭

그렇다면 ‘n번방’ 사건 이후 우리 사회는 디지털 성범죄 예방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가. 우리 사회는 더 살 만해졌는가. ‘n번방’ 일당들이 제작한 성착취물이 ‘n번방 자료’라는 이름으로 온라인 공간에서 버젓이 거래되고 있는 현실은 아직 갈 길이 멀었음을 시사한다. 마침, 체코에서 날아온 다큐멘터리 《#위왓치유》는 디지털 성범죄가 어떤 방식으로 사회를 좀먹는가를 리얼하게 증명해 보인다.

평범한 소녀의 방처럼 꾸며진 3개의 세트장. 앳된 외모의 20대 여배우 테레자, 사비나, 아네슈카는 12세 소녀로 설정한 가짜 온라인 계정을 만든다. 오디션을 통해 뽑힌 이들의 임무는 12세 소녀로 위장해 계정을 통해 연락해 오는 이들과 화상 통화를 진행하는 것. 세트장 밖에선 제작진이 이들 사이에 오가는 실시간 채팅을 관찰하려고 대기 중이다. 계정 개설과 동시에 전 세계 남성들로부터 연락이 날아든다.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질까. 미리 알려두자면, 《#위왓치유》를 보기 전에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자신의 성적 욕망 분출을 위해 아동·청소년들을 착취하는 랜선 너머의 행태를 보고 있자면, 속을 울렁거리게 하거나, 눈 질끈 감게 하는 순간이 쏟아지니 말이다.

연락해 온 남자들은 나이도 국적도 다양하다. 남자들에게 배우들은 12세라는 점을 강조하지만, 반응은 한결같다. “상관없어.” 이내 수위 높은 질문과 요구가 쏟아진다. “섹스는 해 봤니?” “옷 좀 벗어봐.” “사진 좀 보내줘.” 이 와중에 궤변자도 있다. “몸 안의 정액을 내보낼 수 있도록 도와줘.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내가 아프단다.” 다짜고짜 성기를 보여주거나, 바지를 내려 자위하는 남자들도 있다. 소녀에게 이런 식으로 나체 사진을 요구하거나, 가스라이팅과 그루밍을 시도한 남성은 촬영이 진행된 열흘간 2458명에 달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촬영장엔 심리상담사, 변호사 등이 상주했다.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이건 심각한 범죄예요. 협박하고, 아동의 강한 성장을 방해하고, 음란행위를 조장하는, 성교만 안 하는 성 학대죠.” 성에 대한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은 미성년자를 상대로 이들이 벌이는 행각은 단순 욕구 배설이 아니라, 범죄다.

나체 사진을 끈질기게 요구하는 남성들에게 제작진이 누드 모델 몸을 합성한 배우 사진을 보내자, 상황은 더욱 험악해진다. 협박의 시작이다. 디지털 성범죄를 바라보는 누군가는 피해자에게 이렇게 물었을 수 있다. 왜 나체 사진을 보내 빌미를 제공하느냐고. 이에 대해선 영화에 등장하는 위기아동센터 관장 조라 두슈코바의 말을 소개할 필요가 있겠다. “실제로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많이 보내요. 청소년은 행위의 결과와 위험성을 충분히 생각할 능력이 아직은 부족하니까요. 사진을 보낸 후 아이가 곧바로 후회해도 이내 협박이 시작되죠. 몇몇 아이는 (부모님에게) 사실대로 말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자살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해요. 부모님께 말하는 것보다 자살이 쉽다고 생각하죠.”

각본 없는 대본으로 이뤄진 촬영이지만, 현실은 영화보다 더 영화적이다. 촬영 중 스태프 중 한 명이 화면 속 남자를 보면서 외친다. “내가 아는 사람 같아요!” 가해자는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에 여기저기서 신음이 새어 나온다. 흔히 아동 성범죄는 특정 집단의 문제처럼 받아들여지곤 하는데, 《#위왓치유》는 이것이 광범위한 문제임을 보여준다.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소아성애자로 보여도 사실 그렇지 않아요. 온라인으로 어린아이를 찾는 사람 중 실제 소아성애자는 3~5%뿐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어요”라는 전문가의 말이 이를 보강한다. 이들에게 개인 서사를 부여해 주는 것은 사치다. 그들은 특별한 악마가 아니다. 비루한 성착취 범죄자 가운데 하나이며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힘없는 이를 상대로 충족하려는 찌질한 인간일 뿐이니까. 자신의 행동이 카메라에 몰래 찍히고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된 가해자가 남긴 말이 압권이다. “좋은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범죄자가 비단 이 사람뿐일까.

‘온라인 그루밍’ 처벌 가능할까

《#위왓치유》가 체코 사회에 던진 파장은 컸다. 개봉 7일 만에 체코 다큐멘터리 영화 중 최고 흥행 스코어를 달성했고, 6주간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스크린 밖에서의 영향력은 컸는데, 촬영에 기록된 모든 과정이 체코 경찰에 넘겨져 수사의 결정적인 증거 자료가 됐다. 어떤 영화는 이렇게 사회를 바꾼다.

몇 가지 궁금증이 일 것이다. 이와 같은 다큐멘터리가 국내에서 제작된다면 체코에서처럼 수사로까지 연결될 수 있을까. 한국에서도 함정 수사나 위장 수사가 가능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9월24일부터는 달라진다. 경찰이 신분을 밝히지 않거나 가짜 신분을 이용해 아동·청소년 디지털 성범죄를 수사할 수 있도록 하는 법적 근거가 지난 3월23일 마련됐기 때문이다. 아동이나 청소년을 성적으로 착취하고자 온라인 대화로 유인하거나 성적인 행위를 유도하는 등의 ‘온라인 그루밍’ 행위도 9월부터는 법적으로 처벌받게 된다.

《#위왓치유》는 처벌 못지않게 예방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이트 운영자는 이런 걸 발견하면 제대로 조치해야 해요.” 그런데 왜 그러지 못할까. 이용자 수 때문이고, 광고 때문이다. 돈벌이 때문에 플랫폼 사업자들이 디지털 성범죄 확산을 방조하고 있는 셈이다. 국내 역시 아동을 보호할 책무를 진 플랫폼 사업자들을 관리할 법 제도가 충분치 않은 게 현실. 수사권과 판결권을 쥔 이들의 성인지 감수성은 또 어떠한가. 법이 달라져도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n번’들은 증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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