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피해 여군, 그는 왜 유엔을 찾을 수밖에 없었나
  • 구민주 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21.06.12 10:00
  • 호수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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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2018년 군 성폭행 피해 고백 A소령이 바라본 '공군 부사관 사건'
"내 일상 무너지는 좌절 느껴…군은 바뀌지 않았다"

한 사람이 군대 내 성폭력 피해를 겪었다. 피해를 호소할 시스템은 존재했지만, 현실에선 작동하지 않았다. 조직의 방조와 은폐는 치밀했다. 그 사이 피해자는 삶을 잃었다. 그제야 책임자는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자주 그렇듯, 늦었다. 기다렸다는 듯 철저한 수사와 확실한 처벌, 피해자 보호와 재발 방지 등 익숙한 약속들이 허공을 떠돈다. 낯익은 전개다.

군대 내 성폭력 사건은 잊을 만하면 수면으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상관의 지속적인 성추행과 조직적인 2차 가해로 피해자를 끝내 극단적 선택으로 몰고 간 공군 부사관 이아무개 중사 사건은 뜨거운 공분을 사고 있다. 분노 속엔, 이번에도 군은 바뀌지 않을 것이며 피해는 계속될 것이라는 불신이 짙게 깔려 있다. 왜 사람이 떠난 후에야 변화의 약속은 나오는 걸까. 그 약속이 이번에는 지켜질까.

일련의 사태들을 누구보다 가슴 아프게 지켜본 이들이 있다. 바로 앞서 군에서 비슷한 피해를 당하고 ‘견뎌내며 살아가는’ 군 성폭력 피해자들이다.

2018년 3월 해군 성폭행 피해자 A소령이 시사저널과 인터뷰하고 있다. 당시 그는 2010년 직속 상관 2명으로부터 수차례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최초로 고백했다.ⓒ시사저널 최준필 

“부디 삶을 포기하지 말아 달라”

여기 한 사람이 있다. 2017년 직속 상관 2명에 의한 성폭행 사건을 폭로하고 지금까지 법적 다툼을 이어가고 있는 A소령이다. 그는 최근 일련의 폭로들을 보며 “내 부족한 언어로 다 형용하기 힘든 좌절·분노·공감을 느꼈고, 애써 다잡던 일상이 다시 흔들렸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용기를 내어 언론 인터뷰에 응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부디 삶을 포기하지 말아 달라.” 그가 용기를 내 꾹꾹 눌러 담은 내용을 전한다.

A소령은 국내 첫 군대 미투 폭로자다. 2018년 시사저널을 통해 자신의 성폭행 피해 사실을 밝혔다. 2010년 해군 1함대에서 복무하던 A소령(피해 당시 중위)은 직속 상관 B소령과 C대령(당시 중령)에게 연이어 여러 차례 성폭행을 당했다(시사저널 2018년 3월26일자 ‘[단독]軍 첫 미투 폭로…‘성폭행 피해’ 女장교 인터뷰’ 기사 참고). 그는 B소령의 상습적인 성폭행으로 인해 임신중절 수술까지 받았다. 이후 피해 사실을 C대령에게 알렸으나 역시 그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그 과정에서 A소령은 이들에게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밝혔지만, 이들은 오히려 “네가 남자를 몰라서 그런다. 가르쳐 주겠다”며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수사는 2017년 착수됐다. 사건 발생 7년 만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피해를 겪던 그가 오랜 고민 끝에 군대 내 여성 수사관에게 피해 사실을 고백하면서 수사가 시작됐다. B소령과 C대령은 같은 해 9월 해군 경찰에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다. 이듬해 3월 1심 재판부는 이들에게 각각 징역 10년형과 8년형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8일과 19일 군사법원에서 각각 열린 C대령과 B소령의 항소심은 정반대의 판결을 내놨다. 이들은 8개월여 만에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성폭행 과정에서의 폭행 및 협박을 인정하기 어렵고, 오랜 시간이 지나 피해자의 기억이 과장·왜곡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A소령은 지난 재판 과정을 이렇게 기억했다. “사실 재판 분위기를 읽을 마음의 여력이 없었다. 상대 변호인이 남성이었는지 여성이었는지, 이름은 무엇이었는지, 재판부는 어땠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난 그저 내게 주어진 모든 질문에 최선을 다해 답했다는 것이다. 이를 알아준 1심 판결은 반가웠고,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2심 판결은 이해할 수 없어 갑갑했다. 2심에서 나에게 반복적으로 던져졌던 질문은 (성폭력 과정에서)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는지’였다. 내가 생각한 폭행과 협박은 물리적으로 사람을 다치게 하는 난폭한 행동이었기에, 없었다고 진술했다. 이 대답의 의미는, 두 가해자가 내게 성폭행을 시도하고 성공하는 데 욕설이나 협박, 폭행은 필요하지 않을 만큼 뚜렷한 위계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다시 2심 공판 상황으로 돌아간다 해도 난 똑같이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폭행과 협박이 없었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군인권센터와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시민단체들은 “이런 식이면 어느 피해자가 신고할 수 있겠느냐” “재판부가 가해자”라며 판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부하 여군을 강간한 2명의 해군 간부를 처벌해 주십시오’라는 제목의 청와대 국민청원은 2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기도 했다.

“가해자 원아웃 제도 도입 후 은폐 더 늘어”

A소령만의 일이 아니다. 군 성폭력 이후 삶을 견뎌내며 살아내야 하는 피해자들이 겪어야 할 싸움은 길고 지난하다. 폐쇄적인 군 조직에서 다시 피해자가 일상을 회복하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다.

여기에 1심(군사법원)과 2심(고등군사법원)을 관할하는 군 사법체계는 여전히 성폭력 사건에 대해 차갑고 보수적이다. 지난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군사법원의 군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선고유예’ 비율은 일반법원보다 8배 높다. 선고유예는 범행이 경미한 범인에 대해 일정한 기간 형의 선고를 유예하고 그 유예 기간을 특정한 사고 없이 지나면 형의 선고를 면하게 하는 제도를 말한다.

군 성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뿐 아니라 군 조직 전체와 싸워야 한다. 이번에 사망한 공군 부사관의 피해 호소 결과는 가해자의 명예로운 퇴직과 조직의 안녕을 운운한 회유였다. A소령은 “군 조직은 피해자의 아픔이 어떨지 이해하려 하기보다, 가해자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가를 대변하려는 노력이 더 크다. (2015년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국방부의) ‘원스트라이크 아웃’ 제도 시행 이후, 이러한 성폭력 은폐 분위기가 더욱 심화되었다는 언론 지적에 공감한다”고 전했다.

지난해 인권위가 발표한 ‘2019 군 내 인권상황 실태조사’ 보고서에도 성폭력 사건에 대응하는 군 조직에 대한 구성원, 특히 여군들의 불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최근 1년간 부대 내 성희롱·성폭력 관련 고충이 제기됐을 때 공정한 절차에 따라 처리되고 있다’는 문항에 긍정적으로 답한 여군 비율은 48.9%로, 2012년 조사(75.8%) 때보다 되레 크게 줄어들었다. ‘피해자가 보고를 망설이는 이유’에 대해서는 ‘불이익’ ‘보복 우려’ ‘비밀 보장이 안 된다’ ‘어차피 문제 해결이 안 될 것’ 등의 답변이 터져 나왔다.

2019년 1월29일 해군 성폭행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상식적 판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모습. 대법 판결은 2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 지연되고 있다.ⓒ뉴시스

“대법 판결, 2년 넘게 기약 없다…유엔에 진정”

A소령은 항소심 이후 2년7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기약 없이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A소령은 “이 정도로 대법원 판결이 지연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왜 미뤄지고 있는지도 들은 바 없다. 그저 하루빨리 법리 검토가 끝나고 일상을 온전히 회복하고 싶다”고 토로했다.

국가가 개인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그 개인의 남은 선택지는 무엇이 있을까. 군인권센터 등 A소령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는 지난 3월 유엔 인권이사회에 이 사건에 대한 진정서를 전달했다. 진정서에는 “(2심을 선고한) 고등군사법원이 ‘범죄가 되기에는 ‘물리적 폭행’이 ‘부족’했다’는 식의 판결을 했다. 국제인권규범에서 성폭력을 ‘동의’ 여부에 따라 처벌하도록 한 권고를 위반했다. 대한민국 정부의 여군 인권 보호 및 군내 성폭력 근절 대책이 미흡해 인권 보호에 대한 국가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군인권센터는 왜 대한민국이 아닌 유엔을 찾았을까. 방혜린 군인권센터 상담지원팀장은 시사저널과의 통화에서 “국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대법원에 조속한 판결을 촉구할 최후의 방안으로 유엔을 찾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A소령이 이번 공군 피해자 사건을 좀 더 갑갑하게 바라보는 이유는 또 있다. 그는 국민적 공분과 군의 쇄신 약속에도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거라고 내다본다. A소령은 이렇게 말했다. “군에는 여전히 ‘이러다 말겠지’라는 시각이 있을 것이다. 고질적 병폐를 해결하기 위해선 아주 근본적인 인식부터 개선돼야 한다. 성관계를 애정이나 합의에 기반을 둔 관계로 보는 것, 성욕 자체를 어떻게든 해소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부터 바꿔야 한다. 그리고 계급이 인간의 귀천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역할과 책무, 권한을 구분하는 것임을 군이 되새김해야 한다.”

 

“원하는 방식으로 함께 생을 살아내자”

A소령은 2018년 인터뷰 당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전하며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당부의 메시지를 전한 바 있다. 그는 “어느 조직에나 성 문제는 있지만 군에서는 피해 사실이 알려졌을 때 피해자 대부분이 옷을 벗게 되는 것 같다. ‘조직 부적응자’가 돼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피해를 입은 여군이 있다면 그 사실을 밝히라고 말해 주고 싶다. 나처럼 7년이나 걸리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3년이 지난 지금 그는 다시 한번, 더욱 간절한 어조로 피해자들에게 당부를 건넸다. “부디 삶을 포기하지 말아 달라. 군 내 성폭력 문제가 종식되지 않는 이상 후배들에겐 더 많은 선례가 필요하다. 피해를 겪었지만, 그럼에도 원하는 방식으로 남은 생을 살아낼 수 있다는 걸 함께 보여주자.”

여기 사람들이 있다. 피해를 겪었고 일상을 잃었다. 이들은 죽거나 혹은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이들의 싸움은 이처럼 기약이 없다. 철저한 수사와 확실한 처벌, 피해자 보호와 재발 방지 약속은 여전히 허공을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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