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국민들의 분노…불륜보다 더 괘씸한 건 ‘내로남불’
  • 사혜원 영국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7.06 13:00
  • 호수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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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타 변이로 우울해진 영국 국민, 행콕 보건장관의 키스 영상에 분노
“거리 두기 지침, 우리에겐 강요하면서 장관은 왜 어기나”

최근 다시 확산되는 델타 변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영국의 분위기는 다시 가라앉고 있다. 국민들은 사회적 거리 두기 지침이 종료될 것을 손꼽아 기다리던 6월21일이 지났음에도 아직 사회적 거리 두기 3단계를 준수하고 있다. 현재 영국은 4단계에 비하면 6인 혹은 2가구 이내 외식도 가능하고, 유로 2020 축구경기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관람할 수 있는 등 훨씬 완화된 모습이지만, 지난 3월에 발표됐던 정부 가이드라인에 맞춰 여름휴가 계획을 세운 사람들은 크게 실망한 모습이다. 이런 실망감은 델타 변이 바이러스를 제때 제대로 막지 못한 보건부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고 있다.

6월25일 영국 언론 ‘더 선’은 행콕 장관이 자신의 보좌진인 보건부 비상임 이사 지나 콜러댄젤로와 키스하는 모습이 담긴 CCTV 영상을 공개했다. ⓒ 더선 유튜브 캡처
6월25일 영국 언론 ‘더 선’은 행콕 장관이 자신의 보좌진인 보건부 비상임 이사 지나 콜러댄젤로와 키스하는 모습이 담긴 CCTV 영상을 공개했다. ⓒ 더선 유튜브 캡처

계속되는 거리 두기로 화난 민심에 불 지펴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국민들의 불편한 심기에 불을 지핀 것은 행콕 전 보건부 장관의 불륜 사건이었다. 6월25일 영국 언론 ‘더 선’은 행콕 장관이 자신의 보좌진인 보건부 비상임 이사 지나 콜러댄젤로와 키스하는 모습이 담긴 CCTV 영상을 공개했다. 

흥미롭게도 행콕 장관의 주된 사임 이유와 영국 국민의 비판의 초점이 된 부분은 불륜이 아니라 장관 자신이 만든 거리 두기 지침을 자신이 어겼다는 점이다. 더 선에 의하면 이 영상은 지난 5월6일 촬영된 것인데, 이는 영국 정부가 거리 두기 규제를 완화한 5월17일 이전이다. 당시 국민들은 아무리 가족이라도 다른 집에 거주하고 있으면 포옹할 수 없다는 강력한 거리 두기 규제를 시행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행콕 장관이 사임 의사를 발표하기 전, 영국 노동당 당수 아넬리스 도즈는 “그는 ‘사회적 거리 두기’ 규칙을 직접 만들었고, 자신이 규칙을 어겼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가야 한다”며 사임을 촉구했다. 다른 노동당원들도 ‘내로남불의 진수’ ‘위선의 끝이다’는 표현으로 강하게 비판했다.

여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부터 지속된 사회적 거리 두기 4단계 지침을 열심히 지키려고 노력했던 영국 국민들의 분노가 터진 것이다. 행콕 장관의 불륜 행위를 공개한 유튜브 동영상에는 “행콕 장관이 봉쇄나 새로운 규제를 발표한다면 누가 그의 말을 듣겠는가? 규칙을 따르지 않는 사람의 말을 우리가 왜 들어야 하는가?”와 비슷한 댓글이 수없이 달렸다. 보건부 장관이 모범을 보이지는 못할망정, 자신이 만든 지침조차 지키지 않다니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행콕 장관을 지지한다는 댓글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코로나19 유가족 단체인 ‘코로나바이러스로 가족들을 잃은 사람들(Bereaved Families for Justice)’은 보리스 존슨 총리가 행콕 장관을 지지하는 메시지를 보낸 것에 대해 ‘뺨을 한 대 맞은 것 같았다’고 표현하며 “더 이상의 희생이 없도록 사회적 거리 두기 지침을 최선을 다해 지키고 있던 유족들에게 행콕 장관은 자기 자신은 규칙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고 비꼬았다. 

처음에는 불륜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넘어가려고 했던 행콕 장관도 자신이 그렇게도 주장하던 거리 두기 지침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영국 국민들이 더 강하게 반발하자 결국 사임한 걸로 보인다. 이는 행콕 장관의 사임 연설문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그는 “여러분들이 치른 엄청난 희생을 알고 있다”며 “그들의 희생을 생각하면 사임해야 한다. 규칙을 어긴 것에 대해 깊게 반성한다”고 밝혔다. 

행콕 장관이 사임한 이후에도 영국 내 여론은 여전히 좋지 않다. 한국과 다르게, 영미권에서는 정치인이나 공인의 사생활에 흠이 있다고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비록 유부남인 장관과 유부녀인 보좌진이 부적절한 스캔들을 일으켰지만, 정치인은 정치인으로서의 공적 페르소나가 있고 그 본업만 잘한다면 사생활이 어떻든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는 태도다. 하지만 영국의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다시 늘어나면서 방역지침이 강화되는 상황에, 보건부 장관이 자신이 만든 지침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국민들은 크게 분노했다. 심지어 행콕 장관의 사과를 받아들이며 “지나간 일로 하자”고 표현한 존슨 총리까지 함께 비난받고 있다. 

6월21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에서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봉쇄 조처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집회를 벌이던 중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 PPA 연합
6월21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에서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봉쇄 조처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집회를 벌이던 중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 PPA 연합

공인 사생활에 관대하지만, 코로나는 달라

만 39세 젊은 나이에 장관에 임명된 후, 행콕 장관이 논란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여름에 잠깐 거리 두기 지침을 완전히 없앴다가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니 거기에 맞춰 다시 무기한 거리 두기를 하라고 한다거나, 영국에서 가장 큰 명절인 크리스마스를 일주일도 채 남기지 않고 사회적 거리 두기 4단계로 격상시키는 등의 행위로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또한 의학적 지식이나 보건부 관련 경험이 전무한데도 보건부 장관에 임명됐고, 그래서 코로나19 확산 방지 및 방역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계속 받아왔다. 지난해 3월부터 계속된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 방지 역시 기회가 있었지만 계속 타이밍을 놓치고 문제가 심각해질 때까지 손을 놓고 방치하다가 문제를 더 키웠다는 비난을 받다가 결국 사임한 것이다. 코로나19 초기 확산 상황에도, 또 이번 델타 변이 바이러스 상황에도 대응이 너무 늦었다는 비판이 이어진다. 발 빠르게 대응했다면 이미 마스크를 벗고 자유를 얻었을 영국 국민들이 크게 실망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일각에서는 ‘터질 것이 터졌다’는 얘기도 나왔다. 지난 5월, 행콕 장관은 두 가지 이슈로 논란이 되었다. 첫 번째는 행콕 장관이 지난해 3월,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 초기에 요양원에 새로 입원하는 환자들을 제대로 검사하지 않고 존슨 총리에게 거짓 보고를 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행콕 장관은 “그 당시에는 충분한 테스트 키트가 없었다”고 반박했다. 

두 번째는 행콕 장관이 자신의 가족이 운영하는 회사(Topwood Limited)가 NHS(영국 국가보건서비스)와 코로나19와 관련한 계약을 맺었는데, 행콕 장관은 해당 회사 지분을 20%나 가지고 있다. 영국의 국가조달법에 따르면 일정 금액 이상의 NHS 관련 계약 내용은 국민들에게 투명하게 공개돼야 하는데, 행콕 장관은 이를 알리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가 됐다. 

행콕 장관이 사임한 이후, 영국의 가디언을 포함한 여러 언론에서는 ‘행콕 장관의 행적’이라는 제목으로 그동안 논란이 됐던 행콕 장관의 행적을 정리한, 특히 그가 방역지침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들을 모은 기사를 연일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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