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北 세뇌’ 한 방에 무너뜨린 한국 드라마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1.07.03 13:00
  • 호수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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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면과 철조망 ⑦] 前 인민군 스키여단 참모장 딸 정유나씨 “《가을동화》 보고 탈북 결심했다”

분단 후 76년이 흘렀다. 북한 권력구조가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 사이 북한 주민들은 참 많이 변했다. 이와 관련해 증언해 주고 있는 탈북민들은 “변하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게 남한이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고 입을 모은다. 결코 통일불가론을 주장할 만큼 늦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사저널은 대한민국에 정착한 뒤 남북 간 가교 역할에 앞장서온 탈북민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편집자주> 

“어떻게 그딴 이야기를 하니?” 

2006년 북한 김정숙교원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정유나씨(34)는 남한 드라마를 함께 보자는 동기의 제안에 버럭 고함을 쳤다. 조선인민군 고위 간부 출신의 딸로서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정씨 아버지는 인민군 특수부대인 스키부대의 여단참모장(대좌)을 지냈다. 

당시 정씨 나이는 18세로 어렸다. 무안해하는 동기를 보니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또래들이 남한 드라마를 즐겨 시청하는 현실을 몰랐던 것도 아니다. 평소 정씨의 아버지까지 “남조선 드라마를 보게 된다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라”고 말할 정도였다. 

6월29일 시사저널과 인터뷰 중인 정유나씨 ⓒ 시사저널 이종현
6월29일 시사저널과 인터뷰 중인 정유나씨 ⓒ 시사저널 이종현

■ 한국 드라마 보고 ‘인지 혁명’ 

정씨는 갈등하다가 ‘까짓것 공부한다 치고 한 번만 보자’는 생각에 동기와 TV 앞에 앉았다. 동기가 아무 말 없이 CD플레이어와 TV를 연결했다. 남한 드라마 CD를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곧 영상이 재생됐다. 이 순간이 정씨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떤 드라마를 봤나. 

“《가을동화》를 시작으로 《천국의 계단》 《이브의 모든 것》 《황태자의 첫사랑》 등을 연달아 봤다.” 

애초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접했는데, 곧바로 생각이 달라지던가. 

“그랬다. 중독 수준으로 빠져들었다.” 

두 달 넘게 남한 드라마를 섭렵해 나간 정씨는 급기야 탈북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마침 대학에서 만난 화교 친구가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먼저 월남한 고모와도 연락이 닿았다. 정씨는 집에서 아버지 돈 1200달러를 ‘탈출 자금’으로 챙겨 2006년 3월2일 국경을 넘었다. 부모 몰래 계획하고 진행한 일이다. 

탈북민 중에는 이렇게 가족과 상의하지 않고 북한에서 나온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체제에 환멸을 느끼는 등 심경 변화를 겪어 탈북하는 이가 워낙 많다 보니 가족이라도 개개인의 선택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극심한 통제 사회인 북한에선 탈북 계획이 주변에 새어나가거나 논의 정황이 발각되는 데 대한 우려도 크다. 특히 정씨는 아버지가 자신의 탈북을 제지할까봐 노심초사했다고 전했다. 정씨의 아버지는 군 제대 후에도 체제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사실 정씨 역시 북한에서의 삶만 놓고 보면 좋은 토대(집안 배경)에 대학 졸업 후 교사로 일할 수 있는 등 탄탄대로였다. 이런 점 때문에 정씨가 남한에 정착한 뒤 “탈북 이유가 단순히 드라마 때문이라니, 이해하기 어렵다” “가족을 두고 왜 혼자 탈북했나” “그 정도 집안이었으면 북한에서 사는 게 더 편하지 않냐”는 반응이 뒤따르기도 했다. 남한 사람들이 북한 사회를 잘 이해하지 못한 채 쏟아내는 질문은 간혹 정씨에게 상처로 다가왔다. 

어떻게 남한 드라마가 북한에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올 만큼 영향을 미치게 됐을까. 

“말하자면 인지 혁명이 일어난 거다. 드라마를 보기 전에 나는 ‘장군님(김정일)을 위해 총과 폭탄이 되는 게 꿈’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20년간 머릿속에 각인됐던 주체사상이 드라마를 통해 불과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사라져 버리더라. 북한 당국은 ‘남조선이 우리 공화국을 모략하려고 자동차가 많이 나타나는 드라마 장면을 연출하는 등 경제 발전상을 꾸며낸다’고 주민들을 호도한다. 그렇게 믿는 사람도 있었다. 반면 나는 드라마가 구현한 남한의 생활상은 절대로 조작될 수 없는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진실은 작아 보여도 무겁고, 가슴에 와닿는 느낌이 다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드라마 촬영만을 위해 그 많은 차량을 고속도로에 동원한다는 게 말이 될까’ ‘공항에 있는 수많은 비행기는 어떻게 설명할 건가’라는 등 상식적인 질문만 던져봐도 쉽게 판단할 수 있다. 드라마를 통해 비친 건물, 음식, 전자제품 등은 저절로 눈을 휘둥그레지게 했다. 무엇보다 남한 드라마 안에는 북한에서 금기 사항인 것들이 다 들어 있었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은 (북한 주민들과 달리) 거침없이 연애하고 자동차를 몰고 해외여행을 다닌다. 패션과 머리 스타일도 자유분방하다. 북한의 체제 선전물 대사처럼 ‘자신을 희생해서 장군님을 받들겠다’는 식의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죄다 사랑, 돈 같은 일상 소재였다. 한창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꾸미고 싶은 나이라 남한 드라마를 접하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드라마에 출연한 남한 배우들을 실제로 만나고 싶다는 열망도 커졌다(웃음).” 

정씨는 북한 탈출 4개월여 만인 2006년 7월13일 꿈에 그리던 남한에 다다랐다. 중국과 태국 등을 거치는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다른 탈북민과 비교하면 초단기간에 큰 위기 없이 남한에 들어왔다. 한 편의 흥미진진한 드라마처럼 숱한 행운과 조력자가 함께했다. 정씨는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여기저기를 살피다가 인솔하던 국가정보원 직원에게 물었다. “어디 가면 송승헌(《가을동화》 주인공) 배우를 볼 수 있나요?” 

 

■ 부모·오빠도 뒤이어 남한 정착 

더 드라마틱한 사실은 정씨에 이어 식구들도 줄줄이 남한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가장 먼저 뒤따른 사람은 다름 아닌 정씨의 아버지였다. 정씨가 탈북한 직후 국가보위성에 붙잡혔다가 한 달여 만에 풀려난 정씨 아버지는 곧바로 ‘중국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딸을 찾아 북한으로 돌아오겠다’며 두만강을 건넜다. 딸과는 동선이 엇갈려 만나지 못했고, 우왕좌왕하며 시간을 보낸 사이 북한 당국이 정씨 아버지를 수배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북한으로 돌아가긴 힘들어졌다. 북한 당국은 정씨의 어머니를 강제노동수용소에 가두고, 좋은 부대에서 군 복무 중이던 정씨 오빠도 격오지로 쫓아냈다. 

정씨의 아버지는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가 탈출하는 등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2006년 7월21일 남한으로 들어왔다. 부녀는 서울에서 국정원 조사를 받으면서 드디어 상봉했다. 이후 2009년 어머니가, 2010년엔 오빠도 남한에 오면서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게 됐다. 

탈북 계획이 전혀 없었던 다른 식구들까지 남한에 오게 됐다. 

“모두 한 차례도 북송당하지 않고 남한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기적이다.” 

남한 정착 후에는 어떻게 지냈나. 

“초반에 대학에서 뷰티를 전공하면서 미용실에서 근무했다. 관련 일을 그만둔 뒤부터는 통일교육, 각종 방송 출연, 개인 유튜브 채널 운영 등에 매진해 왔다. 의료용품 회사에서 해외영업 업무도 담당한다.” 

남한 정착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은.

“고향 자강도의 사투리 억양이 강해 주변에서 곧바로 탈북민임을 알아보는 통에 애를 먹었다. 정착 초반엔 신변의 위협을 의식해 최대한 신분을 숨기려 했기 때문이다.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갖고 툭툭 던지는 말에도 상처를 받았다. 나중에는 적응해 가면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일했던 미용실의 원장님 등 좋은 사람들이 도와줘 큰 힘을 얻었다.” 

통일교육 등 강연 활동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좀 위축됐겠다. 

“그렇지 않다. 화상회의 앱 줌을 통해 활발히 강연하고 있다. 외국에서도 강연을 요청한다. 기회의 폭이 더욱 넓어진 셈이다.” 

영어 실력이 뛰어나다. 어떻게 공부했나. 

“과거 북한 1고중(영재학교)에서 영어반에 속해 열심히 배웠다. 남한에 와보니 ‘아르바이트’ ‘셀프’ 등 생전 처음 듣는 영어 표현이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어 전면 다시 공부해야 했다. 북한에서 배워온 영어 발음도 좋지 않아, 4년여간 영어로 된 콘텐츠만 보고 읽으며 발음을 교정했다. 얼마나 독하게 몰입했으면 그 좋아하는 남한 드라마도 전혀 보지 않았다(웃음).” 

정씨는 특유의 쾌활함과 메시지 전달력으로 어디서나 환영받는 명강사가 됐다. 북한에서 끊긴 교사의 길이 다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는 “모두를 아우르는 통일 교사란 게 뿌듯하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비전이 있다면.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 중 북한 주민과 문화에 대해 잘 모르고 편견을 가진 이가 많다. 유튜브 채널 운영, 통일교육 등을 통해 남북한의 차이를 줄이는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 먼 훗날을 내다보거나 허황된 꿈을 품기보다는 내가 걸어온 과정과 신이 부여한 사명을 곱씹으며 한 걸음씩 나아갈 계획이다.” 

통일에 관한 생각은. 

“경제·문화 등 민간교류부터 활발히 해야 한다. 마치 주사를 놓듯 북한 주민들에게 외부 자극이란 주사액을 쏴주는 게 절실하다. 북한 당국이 정보를 차단해 놓은 탓에 북한 주민들은 비교 대상이나 목표 의식 등이 없는 채로 살아간다. 민간교류를 통해 제대로 된 자본주의·민주주의 등에 대해 깨우치는 순간, 인지 혁명이 일어날 거라고 확신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KBS 드라마 《가을동화》의 한 장면 ⓒ KBS 제공
KBS 드라마 《가을동화》의 한 장면 ⓒ KBS 제공

■ “북한 MZ세대, 노래도 ‘자본주의풍’으로 불러” 

남한 문화 급속도로 퍼지자 부랴부랴 통제 나선 北 

북한에 스며든 남한 문화는 이미 억누르기 힘들 정도로 확산됐다. 특히 북한의 MZ세대(밀레니얼+Z세대·1980~2000년대생)는 당국의 탄압에도 남한 문화를 그 누구보다 빨리 흡수하고 있다. 정유나씨는 “다니던 대학(김정숙교원대학)이 있던 함경북도 회령의 경우 북·중 접경지라 남한 문화 유입이 더욱 쉽고 활발했다”며 “고향인 자강도 전천에서 회령에 처음 갔더니 대부분 남한 드라마를 즐겼고 패션도 남한 스타일이었다. 심지어 북한 노래까지 남한 스타일, 일명 ‘자본주의풍’으로 부르더라”고 회상했다. 

정씨는 “이제 남한 문화에 너무나 익숙한 북한 주민들은 남한이 어떤 곳인지, 얼마나 잘사는지 알고 있다. 장마당에서 수시로 물건을 사고파는 등 경제구조도 사실상 남한처럼 자본주의나 다름없다”며 “내 유익과 이익을 위해 사는 게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에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하면 듣지도 않는다”고 덧붙였다. 

남한 문화를 통해 세뇌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많아지는 상황은 북한 체제에 그 어떤 것보다 위협적으로 작용한다. 이에 북한 당국은 지난해 12월 남한 영상물을 유포한 사람에 대한 형량을 사형으로 높이고, 영상물 시청자는 최대 징역 15년에 처하도록 한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을 제정했고, 올해도 연일 문화 통제의 고삐를 당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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