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철수하자 아프간 바로 함락된 이유
  • 임명묵 작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8.22 18:00
  • 호수 1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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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기술 압도해도 전투태세 상실하면 군사적으로 무너져

미군이 철군하고 끝내 카불이 함락되는 모든 과정은 그야말로 번개와도 같이 일어났다.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취약성과 탈레반이 축적한 자산을 감안해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운명을 대체로 비관적으로 전망하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빨리 무너질 것이라고는 다들 예상하지 못했던 눈치다. 특히 스마트폰을 통해 전 세계로 전달된 아프간 수도 카불 함락의 순간들은 과거 냉전 시대 남베트남 사이공의 함락에 비견할 수 있는 섬뜩함을 선사했다.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은 앞으로 많은 질문과 숙제를 던질 것이다. 중국을 비롯해 인도·이란·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의 대응 방향과 아프가니스탄의 상실이 미국 조야에 끼치는 영향, 나아가 한국이 속한 동아시아까지 미칠 파급효과가 하나의 숙제일 것이다. 또한 과거 야만적이고 극단적인 통치로 악명 높았던 탈레반의 통치가 20년이 지난 지금도 거리가 반복될지가 또 다른 질문거리가 될 것이다.

ⓒAFP연합
8월16일 카불 공항에 수천 명의 사람이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하기 위해 몰려들었다.ⓒAFP연합

카불, 사이공과 난징의 교훈

그러나 이런 미래의 질문과 별개로 이제는 ‘과거’가 된 다른 질문도 던져봐야 할 듯하다. 미군의 지원을 받아 더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아프간 정부군은 어째서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는가? 나아가 세계 최강이라는 미군은 어째서 20년 동안 아프간이라는 늪지대에서 허우적댔는가?

전쟁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강한 군대의 필수적 조건으로 어김없이 기술적 우위와 풍부한 물적 자원을 꼽을 것이다. 실제 역사 속에서 기술과 물자(병참)가 그 위력을 여실히 증명했기 때문이다.

19세기 서구의 제국주의 열강이 세계 전역을 정복했던 것은 산업혁명으로 그들이 확보한 압도적인 기술적 우위 덕분이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과 소련군을 승리로 이끈 것은 우월한 생산 능력을 바탕으로 한 병참의 힘이었다. 따라서 1945년을 전후한 시점에서 기술과 자원을 모두 갖춘 미군, 혹은 미군의 지원과 훈련을 한껏 받은 현지 병력의 절대 우세는 당연하게 인식됐다.

그러나 이후의 역사는 그런 기대감과는 반대로 흘러갔다. 기술·병력·병참 모든 면에서 우세한 군대가 그렇지 못한 비정규군에게 패배하는 일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국 국공내전과 베트남 전쟁에서 현지 세력인 국민당 정부와 남베트남에 막대한 지원을 보냈으나, 그들은 모두 중국과 베트남의 공산당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최강이라는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 산악 지대에서 무자헤딘들이 전개한 비정규전에서 도저히 승기를 잡을 수 없었고, 사회 불안과 경제적 출혈, 인력 소모라는 상처만 껴안은 채 철군했다.

소련군이 지원하고 훈련시켰던 아프간 정규군이 소련군의 철군 이후 녹아내리듯이 무너진 것은 30년 뒤에 벌어지고 있는 이번 일과 놀랍도록 흡사하다. 이처럼 강대국이 지원하는, 더 잘 무장된 군대가 그렇지 못한 군대에 패배하는 ‘이변’의 잦은 발생은, 이런 현상이 이례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패턴일 수 있음을 알려준다. 요컨대 전쟁에서는 단순히 기술, 무장 수준이나 물적 자원의 우세보다 훨씬 많은 것이 개입된다는 얘기다.

이스라엘 군사 사학자 아자 가트의 저서 《문명과 전쟁》에서는 이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이 나온다. 먼저 가트는 물질적 풍요가 군사적 힘으로 자연스럽게 전환되기 시작한 것은, 초기 근대 이후 하드웨어가 군사적 힘을 구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뒤의 일이라고 보았다. 소수의 가난한 야만족에 무릎을 꿇은 로마와 중화제국의 사례에서 보이듯, 생산력과 군사력은 별개의 문제일 수도 있었다.

제국의 중심부가 국경 및 이민족과 멀어지고, 엘리트층과 도시민들이 전투에 임할 태세를 상실했을 때, 변경 지대에서 단련된 군사력이나 야만족(혹은 둘 다)은 얼마든지 중심으로 쏟아져 들어올 수 있다. 그럴 때 제국 중심부의 물질적 부(富)는 방위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기술과 자원의 우위가 압도적으로 명확하지 않을 때, 임전 태세를 갖춘 가난한 군대는 그렇지 못한 부자 군대를 농락해 왔다.

바이든 미 대통령이 8월16일 “미군 철수는 정당했다”는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다.ⓒUPI 연합

탈레반은 싸울 각오와 현지의 지지 다 갖춰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런 패턴은 기술과 물자의 우위가 군사적 힘으로 즉각 전환되는 근대 이후의 전쟁에서는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서구 열강은 그 힘을 바탕으로 세계를 정복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새로운 패턴이 들어섰는데, 제국 내부에 자유주의와 계몽주의 규범이 정착하면서 민간인에 대한 가혹한 진압 작전이 더는 정치적 지지를 받기 어려워진 것이다. 민족주의와 자동소총이 보급되며 민간인 마을이 저항의 거점이 되는 가운데 이런 새로운 반발은 제국이 점령지의 질서를 수립하는 데 근본적 걸림돌이 됐다. 따라서 베트남이나 아프가니스탄 역시 군사적 문제 이전에 정치적·문화적 문제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만 하더라도, 영국과 프랑스는 점령지의 마을을 불태우고 민간인을 모두 학살하면서 저항을 분쇄했다. 아마 지금의 미군도 모든 베트남이나 아프가니스탄 저항자를 학살할 각오로 전쟁에 임했다면 마찬가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폭격에 불타는 현지 민간인의 사진이 언론을 강타하는 지금의 시대에 그런 작전은 용납될 수 없었다. 세계 최강이라는 미군과 소련군은 그렇게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쟁에 들어선 것이다.

2021년의 카불은 1992년의 카불, 혹은 1975년의 사이공이나 1949년의 난징이 그러하듯 근대 전쟁을 특징짓던 기술과 부의 우위가 모든 상황에 영구히 통하지 않음을 다시 깨우쳐준 듯하다. 위 사례들에서, 강대국의 지원을 받은 중심부의 부유한 군대는 사기와 전투에 임하는 각오 면에서 더 가난한 적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들의 첨단 장비는 오히려 노획돼 적군을 더 강하게 만들 뿐이었다.

강대국의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자유주의 교육을 받은 새로운 병사와 국민은 아무리 적이라 할지라도 민간인 아이들의 눈물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됐다. 설령 그 아이로 인해 장기적 점령 계획 전체가 무너진다 하더라도 말이다. 손발이 묶인 제국은 20년간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탈레반은 싸울 각오와 현지의 지지를 모두 갖추었기 때문에 부유한 적군과 세계 최강의 공군을 상대로도 최종적 승리를 거머쥐었다. 어쩌면 카불의 교훈은 상대를 야만적이라고 경멸하고 가난하다고 깔본다면, 그때가 바로 조심할 때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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