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은 무엇으로 ‘기지촌’ 이미지를 대체할 수 있을까 [김지나의 문화로 도시읽기]
  • 김지나 도시문화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8.26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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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에 경제·문화 예속됐던 동두천, 지역 살릴 새 활로 찾기 고민
캠프보산 일대의 건물들에 그려져 있는 그래피티 아트 ⓒ김지나
캠프보산 일대의 건물들에 그려져 있는 그래피티 아트 ⓒ김지나

지난 8월 15일, 무장단체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완전히 점령했다. 전쟁의 양상은 이미 기울어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미국에서 군대를 완전히 철수하기로 결정한 이후 벌어진 일이라,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우리나라에도 때아닌 불똥이 튀었다. 보수성향의 어느 논객은 주한미군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도 아프간처럼 됐을 거라며 논쟁의 불씨를 던지기도 했다.

미군은 한반도의 안보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한국전쟁 휴전 이후에도 계속 우리나라에 머물고 있다. 군사적 요충지라는 명분을 내세워 도시의 주요 거점에 거대한 둥지를 틀었다. 엄청난 인구와 물자를 가진 미군기지 덕분에 전쟁 이후 피폐해진 지역에 활기가 돌기도 했다. 동두천도 그렇게 성장한 도시 중 하나였다.

한적한 캠프보산 거리의 풍경. 미군 재배치와 코로나19 등으로 보산동 일대의 상권은 활기를 잃은지 오래다.  ⓒ김지나
한적한 캠프보산 거리의 풍경. 미군 재배치와 코로나19 등으로 보산동 일대의 상권은 활기를 잃은지 오래다. ⓒ김지나

‘기지촌’ 위에 어설프게 덧입혀진 문화관광 이미지

동두천에는 캠프 케이시가 있다. 그 밖에 캠프 호비, 캠프 캐슬, 캠프 모빌, 캠프 님블, 짐볼스 훈련장이 있었지만 대부분 반환이 진행 중이다. 캠프 케이시가 위치한 보산동의 거리에서는 영어로 된 간판, 미군들을 위한 클럽 거리, 환전소, 맞춤 양복점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미군 부대 주변은 으레 이런 풍경이 펼쳐지나, 동두천의 그것은 좀 더 강렬했다. 도시 크기에 비해 미군기지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유독 큰 탓이다. 처음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했을 때는 도시의 42%가 부대부지로 사용됐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만큼 동두천은 지역 경제도, 문화도, 미군에 완전히 예속돼 있었다. 미군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업이 도시산업 대부분을 책임졌고, 미군들의 클럽 문화가 곧 동두천의 문화였다. 미군 부대가 있긴 해도 여러 가지 다른 지역 명물이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여타 도시들과 달리, 동두천은 ‘기지촌’이란 단어의 그림자가 너무나도 지배적이었다.

건강하지 못한 경제구조와 유흥문화 속에서 주민들의 안전이나 인권은 관심 밖에 있었다. 1992년에 일어난 윤금이씨 살인사건이 대표적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여중생 두 명을 치어 숨지게 했던 미군의 장갑차 또한 당시 캠프 케이시에 주둔 중이었던 제2보병사단 소속이었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조금만 검색하면 참혹했던 현장 사진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피해자 인권에 대해선 무심했다. ‘리틀 시카고’라는 보산동의 별명은 온갖 불법이 판치던 미국 금주법 시대의 시카고에 빗대 붙여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보산동 일대는 1997년부터 외국인관광특구로 지정됐다. 이 그럴싸한 이름은 기지촌의 실상을 가리고 ‘이색적인 문화체험거리’란 낭만적인 이미지로 그 위를 덧칠해버렸다. 최근에는 ‘동두천문화특구-캠프보산’이란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기도 했다. 세계음식거리, 공방, 청년창업, 그래피티 등 도시재생을 위해 도입되는 문화관광 전략을 총동원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현실을 외면한 채 왜곡된 시선으로 보산동을 바라보고 있다는 불편함은 여전했다.

동두천은 미군기지의 온전한 반환과 활용이 그 어느 지역보다 절실해 보였다. 그러나 풀어야 할 숙제가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그전까지 동두천이 해야 할 일은 ‘미군이 떠난 우리 지역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 수 있을까?’란 질문의 답을 찾는 것이다. 2006년 경원선이 개통되자 미군들은 서울로 빠져 나가버린 반면, 보산동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을 자산은 하나도 없었다. ‘월드 푸드 스트리트’는 이렇다 할 문화관광 자원이 없는 동두천에서 그나마 내세우고 있는 즐길 거리인데, 멕시코나 페루 음식을 먹기 위해 보산동까지 올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캠프보산 활성화를 위해 조성된 '월드 푸드 스트리트'. 미얀마, 페루, 멕시코 등 이색음식을 파는 음식거리다. ⓒ김지나
캠프보산 활성화를 위해 조성된 '월드 푸드 스트리트'. 미얀마, 페루, 멕시코 등 이색음식을 파는 음식거리다. ⓒ김지나

외부 세력에 문화를 의지하는 곳에 미래는 없다

마찬가지로 기지촌으로 시작된 서울의 이태원은 독립적인 상권으로 우뚝 섰을 뿐 아니라 고유한 문화까지 가지고 있다. 물론 동두천은 이태원에 비해 핸디캡이 많지만, 동두천만의 자산도 없지 않다. 동두천 록페스티벌이 좋은 예다. 우리나라 최초의 록밴드가 이곳에서 시작된다는 역사에서 출발해, 국내에서도 장수하고 있는 음악 축제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아프리카돼지열병과 코로나19까지 연이은 악재가 이어지고 있으나, 우리 사회는 그 와중에도 대안을 찾아가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아 동두천의 록 문화는 어떻게 계승될 수 있을지 고민해보는 것도, 앞서 이야기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이 기지촌의 아픔을 관광상품으로 포장하거나, 코로나19가 종식돼 미군들이 다시 보산동 클럽으로 놀러 오기만을 마냥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생산적인 일이다.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지 않고 자기 주머니 채우기만 바빴던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결국 테러 단체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말았다. 한 국가가 전복된 사례에 비교하기엔 조금 과장스럽긴 해도, 외부 세력에 정치와 경제, 문화를 의지하는 집단에는 미래가 없다는 진리는 똑같이 통한다. 기지촌을 대신할 동두천의 진짜 새 이름을 찾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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