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변화 못 따라가는 가정폭력처벌법
  •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9.03 11:00
  • 호수 1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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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처벌법, 상상 속의 가정을 여전히 한국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로 여기고 보호하겠다는 발상에 머물러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가정폭력처벌법) 제1조는 ‘가정폭력범죄의 형사처벌 절차에 관한 특례를 정하고 가정폭력범죄를 범한 사람에 대해 환경의 조정과 성행(性行)의 교정을 위한 보호처분을 함으로써 가정폭력범죄로 파괴된 가정의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가꾸며 피해자와 가족구성원의 인권을 보호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장황하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우리의 미풍양속의 근간인 가정의 화목을 뒤늦게라도 회복·유지시키기 위해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해 보자는 것을 목적조항으로 하고 있다. 이런 목적조항은 가정폭력 사건의 처벌에 상담조건부 기소유예나 반의사불벌죄의 필수적 적용을 고려하더라도 가정폭력처벌법이 지향하는 바를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제는 산업화·도시화돼 아이들이 있는 가정이 사회의 기본단위가 아님에도 가정폭력처벌법은 부모와 자녀들이 있는 상상 속의 가정을 여전히 한국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로 여기고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생후 20개월 된 딸을 학대하다 숨지게 한 혐의(아동학대살해)를 받는 A씨(29)가 대전지법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 질심사)을 받기 위해 7월14일 대전 서구 둔산경찰서를 나오고 있다.ⓒ연합뉴스

반의사불벌죄 폐지해야 피해자 생명 지켜

우리나라는 그러나 작년 말 기준으로 1인 가구 수가 906만3362가구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900만 가구를 넘어섰다. 전체 가구 가운데 1인 가구 비중이 40%에 이른 것이다. 여기에 2인 가구까지 합친다면 1·2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62.6%를 차지하게 됐다. 이 이야기인즉슨 아이들의 양육을 위해 엄마·아빠의 이혼은 어떻게든 막아보겠다는 가부장적 가치, 즉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 가정 내 폭력 피해자의 생명권이 아니라 결국은 ‘가정’이라는 사실이 지금도 여전히 고수돼야 하는 것인지 의문을 던진다.

혹자는 가정폭력처벌법의 목적은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임시조치의 필요성 때문에 현 체제가 유지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상습폭력과 상해를 입히는 대상자가 비면식이라면 당장에라도 체포하고 구속시키는 현행 사법 시스템이 왜 가정이라고 즉시 적용되면 안 되는지 질문한다면 그 역시 합리적 답변을 내놓기 어려울 것이다.

혼인제도의 급속한 변화를 살펴보더라도 여전히 가정을 혼인신고로서 정의한 후 ‘가정’이라는 테두리 내에서만 법 적용을 하려는 가정폭력처벌법은 난센스다. 올 상반기 혼인 건수는 9만6000여 건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는 1년 전보다 1만3000여 건 줄어든 수치다. 이미 10년 전부터 이런 추세는 가속화돼 ‘혼인 절벽’이란 용어가 우리 사회에 등장했다. 더욱이 불과 5년 전만 해도 40만 명대였던 출생아 수는 지난해 처음으로 20만 명대로 추락했다. 결국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84명까지 떨어져 인구 절벽도 가속화하고 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생활의 영향이 없지 않았겠지만, 이 모든 지표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4인 가구를 모델로 하는 ‘가정’이라는 개념이 더 이상 정책의 기본 단위가 돼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렇다 보니 ‘가정보호사건’이라는 명칭 자체도 시대착오적이란 생각마저 든다.

혼인신고가 된 상대방에게 폭행을 당하는 것과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대에게 폭행을 당하는 것이 왜 피해자의 법적 지위에 차이를 유발하는가? 이 문제를 마주하면 가정폭력처벌법의 구시대적 전제가 요즘에는 잘 맞지 않는다고 또다시 생각하게 된다. 기존 가정폭력처벌법에 따르자면 후자의 경우, 즉 연인 간 폭력엔 임시조치를 자유롭게 적용할 수 없다. 잠시 잠깐의 연인관계 혹은 동거관계 속 폭력 피해자에 대해서는 가정 내 부녀자들만큼 보호해 주지 않아도 된다는 명제, 매우 이해하기 힘들다. 아무리 찾아봐도 연인 간 폭력처벌법은 국내의 경우 제정된 적이 없다.

 

‘파트너폭력 처벌법’으로 광범위한 보호 필요

최근 25세 젊은 여성이 첫 월급날 남자친구에게 폭행을 당해 뇌사상태에 빠졌다 죽음에 이른 사건이 있었다. 피해자보다 체격이 두 배나 큰 남자친구가 이미 폭행당해 정신을 잃은 이 여성을 더 때리다가 이리저리 질질 끌고 다니는 모습이 CCTV에 잡혀 그대로 공개됐다. 복날 동물을 상대로 이렇게 처참히 폭행하는 일도 용인되지 않는 세상에, 하물며 무방비 상태인 작은 여성을 상대로 이렇게 무참한 폭행을 가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이 아직도 대한민국에서 발생한다니 놀랍기만 하다. 이렇게 혼인신고가 되지 않은 연인 간 폭력으로 매년 목숨을 잃는 여성은 20~30여 명이라고 알려진다. 물론 이 통계치 역시 살인죄가 적용된 경우만 해당하기에 과소평가의 여지는 엄연히 존재한다.

가족의 해체나 혼인 절벽 현상을 고려해 보자면 현행 가정폭력처벌법에서 가정만을 보호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은 구시대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보다는 가정이란 용어를 포기하고 파트너폭력처벌법으로 이름을 바꾸는 것은 어떨지? 유엔은 각국에 혼인신고가 된 여성의 범죄피해 통계만을 보고하라고 요구하는 대신 파트너 폭력 피해 건수를 보고하라고 요구한다. 이런 국제 기준을 고려하더라도 가정폭력처벌법에서 보호하고자 하는 법익은 너무나 협소하다. 더욱이 배우자 혹은 연인 간 폭력 사건에 반의사불벌죄를 적용해 체포조차 하지 않는 선진국은 드물다. 피해자의 명시적인 의사에 반해 공소를 제기할 수 없도록 만든 가정폭력처벌법은 가해자의 영향력하에 공포에 질린 피해자의 생명권을 보호해줄 수 없다. 나아가 상담을 조건부로 재판도 받지 않도록 용인해 준다는 조항은 가정폭력 행위자들에게 자신들이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행사하는 폭력은 범죄가 아니라는 인식을 더욱 공고히 만들어준다.

코로나19 초기 경찰청은 가정폭력 신고가 늘어나는 외국에 비해 한국은 자가격리 비대면임에도 오히려 가정폭력 신고가 줄어들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동학대 치사 사건이 여기저기서 터져 몸살을 앓았고 최근 연인 간 폭력 사건으로 목숨을 잃는 건수도 늘어나고 있다. 10월부터는 다행히 스토킹처벌법이라도 발표돼 제주도 중학생 아들 사망 사건과 같은 이별 후 스토킹 행위에 대해서는 임시조치 등을 좀 더 촘촘하게 집행할 수 있게 되겠지만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엔 사법기관의 개입은 여전히 쉽지 않을 것이 예상된다. 여전히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강제적으로 개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법기관의 개입이 어렵다면 차라리 영국처럼 관계 초기에 파트너의 전과를 여성들에게 알게 해주는 제도가 피해자 자신의 생명권 보호에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비대면 사회는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부디 전 국민이 집 안에서 발생하는 폭력으로도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 있음을 명심해 열심히 감시해 주실 것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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