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황소’ 황희찬의 돌진에 빅리그의 벽 무너졌다
  • 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10.09 15:00
  • 호수 1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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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버햄튼 임대 이적한 황희찬, EPL에서 빠르게 진가 발휘
토트넘 손흥민과 함께 7라운드 베스트11에도 선정돼

울버햄튼 원더러스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의 전신인 풋볼리그의 원년 멤버로 144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축구 클럽이다. 지역명에서 딴 ‘울브스’(늑대들)라는 별명과 함께 1950년대 세 차례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열었다. 이후에는 강등과 승격을 반복하는 전형적인 엘리베이터 팀이 됐다. 국내에는 2부 리그인 챔피언십 소속이던 2004년부터 2006년까지 국가대표 공격수 설기현이 몸담았던 팀으로 친숙하다. 2016년 여름 중국 푸싱그룹이 인수한 뒤 적극적인 투자를 시작했고, 2018년 6년 만의 1부 리그 복귀에 성공했다. 이후에는 꾸준히 경쟁력을 발휘하며 중위권 이상에 위치하며 1부 리그에서 버티고 있다.

지난 8월말 울버햄튼에 15년 만에 새로운 한국인이 당도했다. 독일 분데스리가의 신흥 강호 라이프치히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고전하던 황희찬이다. 황희찬은 여름 이적시장 종료 직전 1년간의 임대 형태로 늑대군단에 합류했다. 임대기간 동안의 활약이 만족스러우면 울버햄튼이 약 200억원의 이적료를 라이프치히에 지급하고 완전 영입하는 옵션도 포함됐다.

황희찬에겐 절대 놓칠 수 없는 중요한 기회다. 2014년 오스트리아의 레드불 잘츠부르크에 입단하며 만 18세에 유럽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차근차근 성장했다. 세계적인 음료회사인 레드불 산하 구단인 잘츠부르크는 유럽·남미·아프리카·아시아의 10대 유망주를 영입해 형제 구단인 독일의 라이프치히나 다른 빅리그 클럽으로 이적시켜 수익을 남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디오 마네(리버풀), 엘링 홀란(도르트문트), 다요 우파메카노(바이에른 뮌헨), 미나미노 다쿠미(리버풀)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황희찬도 2020년 여름 이적료 188억원을 기록하며 라이프치히로 넘어갔다. 

하지만 빅리그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데뷔전이었던 DFB포칼(독일의 FA컵) 1라운드에서 1골 1도움을 기록했지만, 이후 팀 전술에 적응하지 못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11월 A대표팀 소집 중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아 한동안 팀 훈련에서 제외됐고, 그 후유증으로 고생했다. 겨울에 임대를 통한 활로를 모색했지만 그 역시 무산됐다. 결국 황희찬은 DFB포칼에서만 3골을 기록했을 뿐 리그에서는 1골도 넣지 못하고 시즌을 마무리했다.

울버햄튼의 황희찬이 10월2일 뉴캐슬과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경기에서 선제골을 넣은 후 환호하고 있다.ⓒ뉴시스
울버햄튼의 황희찬이 10월2일 뉴캐슬과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경기에서 선제골을 넣은 후 환호하고 있다.ⓒ뉴시스

EPL 이적 후 한 달 만에 새 영웅으로 우뚝

라이프치히에서 주전 경쟁에서 밀린 데다 새 공격수가 영입되자 황희찬의 입지는 애매해졌다. 다행히 잘츠부르크 시절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리버풀 등을 상대로 맹활약하며 남긴 강한 임팩트를 여전히 빅리그의 많은 팀들이 주목했다. 라이프치히 이적 당시 경쟁했던 울버햄튼도 그중 하나였다. 새로운 기회를 원했던 황희찬도 긴급하게 영국행 비행기를 타며 임대 이적이 성사됐다.

이적 직후 월드컵 최종예선을 위해 한국을 오간 황희찬은 짧은 팀 훈련에도 데뷔전에서부터 득점을 성공시켰다. 9월11일 왓포드와의 4라운드에 교체 투입, 후반 38분 문전 혼전 상황에서 온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황희찬의 쐐기골로 울버햄튼은 시즌 첫 승을 거뒀다. 레바논과의 A매치에서 도움을 기록한 데 이어 울버햄튼 데뷔전에서 골을 터트리며 자신감을 되찾은 황희찬은 그야말로 성난 황소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특유의 저돌적인 돌파가 EPL에서 먹히기 시작했다. 

팀은 패했지만, 5라운드 브렌트포드전에서도 교체 투입돼 활발한 모습을 보인 황희찬은 9월23일 토트넘과의 카라바오컵(리그컵) 32강전에 처음 선발 출전했다. 경기 내내 공격적인 압박과 돌파를 보여주며 0대2로 뒤지던 경기를 2대2 동점으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벤치에서 출발했던 손흥민이 결국 교체 출전해야 할 정도로 토트넘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승부차기 끝에 패했지만 경기 후 손흥민과 유니폼을 교환하는 훈훈한 모습을 보였다. 

서서히 출전 시간을 늘린 황희찬은 홈인 몰리뉴 스타디움에서 10월2일 열린 7라운드 뉴캐슬전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6라운드 사우샘프턴 원정까지 3경기 연속 선발 출전한 황희찬은 라울 히메네스와 절묘한 호흡을 보였다. 전반 20분 히메네스가 공간으로 열어준 침투 패스를 받아 오른발 슛으로 선제골을 만들었고, 1대1 동점이던 후반 13분 히메네스가 다시 한번 상대 수비와 경합하며 찔러준 패스를 받아 골문 구석을 가르는 왼발 슛으로 결승골을 만들었다. 자신의 EPL 첫 멀티 득점으로 울버햄튼의 시즌 첫 연승을 이끈 황희찬은 데뷔전에 이어 다시 한번 팬 투표로 선정하는 ‘킹 오브 더 매치’(King Of The Match·최우수선수)에 선정됐다. 데뷔골이 행운이 따랐다면 이번 멀티골은 완벽한 개인 능력에 의한 마무리였다.

황희찬을 향한 현지 찬사도 이어졌다. 영국 공영방송 BBC의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인 《매치오브더데이》에 출연한 아스널 레전드 공격수 이안 라이트는 “황희찬은 모든 것을 갖춘 공격수”라고 칭찬했다. 뉴캐슬에서 활약한 잉글랜드 최고의 공격수 앨런 시어러가 선정하는 7라운드 EPL 사무국 공식 베스트11에 손흥민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손흥민도 7라운드 아스톤빌라전에서 팀의 2골을 모두 도왔다. 황희찬·손흥민과 함께 공격진에 이름을 올린 선수는 리버풀의 모하메드 살라였다. 

 

“황희찬-히메네스 조합, 손흥민-케인 연상케 해”

BBC는 황희찬의 빠른 적응과 활약을 두고 호평을 남겼다. “라이프치히가 분데스리가 강팀이지만, 거기서 후보였던 황희찬이 프리미어리그를 흔들고 있다. 스마트한 선수다. 지금 상태라면 조기에 완전 이적시키는 것도 좋은 투자”라고 평가했다. 당초 울버햄튼은 황희찬을 측면과 중앙에 다양하게 쓸 수 있는 공격 옵션으로 판단하고 임대 영입했다. 히메네스를 중심으로 아다마 트라오레, 트링캉 등 기존 자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황희찬은 트라오레와 트링캉을 밀어내고 히메네스의 1번 파트너로 자리 잡았다.

황희찬이 라이프치히 시절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팀 전술과의 궁합 덕분이다. 3-4-3 포메이션에서 왼쪽 윙포워드로 투입되지만 넓은 활동 반경을 이용, 팀의 간판 스트라이커인 멕시코 국가대표 히메네스와 투톱처럼 움직인다. 황희찬이 순간적으로 침투하면 190cm의 장신 공격수 히메네스가 상대 수비와 경합한 후 패스를 찔러주는 패턴이다. 뉴캐슬전에서의 멀티골이 모두 그런 장면에서 나왔다. 영국 언론들은 일제히 “황희찬과 히메네스의 조합은 토트넘에서 손흥민과 해리 케인이 보여주는 연계 플레이와 흡사하다”고 호평했다.

측면과 중앙을 가리지 않고 문전으로 달려드는 황희찬의 공격성을 브루누 라즈 감독이 적극 활용한 것이다. 포르투갈 출신인 라즈 감독은 “벤피카 감독 시절부터 황희찬에 대한 보고를 받고 주목했었다”고 말했다. 황희찬 영입을 구단에 강력히 요청한 것도 라즈 감독이었다. 황희찬에게 프리롤을 맡기면서 분데스리가의 벤치 멤버는 EPL에서 결정력 강한 해결사로 자리매김 중이다. 

꿈의 무대인 EPL에서 강렬한 활약을 펼치며 대표팀에 합류한 황희찬은 “훈련부터 식사, 수면까지 모든 것이 최고 수준이다. 축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분위기가 좋았다. 팀의 관리 덕분에 몸과 마음이 편해지며 경기력도 나오고 있다”고 빠른 적응의 비결을 밝혔다. 그는 “연속으로 선발 출전하다 보니 자신감 있는 경기력이 나왔던 것 같다. 나도 어려서부터 EPL 경기를 보며 성장했다. 동경하던 무대에서 흥민이 형과 맞대결을 펼칠 수 있어 꿈만 같았다”고 새로운 동기부여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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