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언니들 전성시대
  • 정덕현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10.19 11:00
  • 호수 1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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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때녀》에서 《스우파》까지…예능 변방에서 중심에 우뚝 선 여성 예능의 진화

최근 가장 뜨거운 예능 프로그램을 꼽으면 등장하는 것이 바로 ‘멋진 언니’다. 그간 남성 중심의 예능 프로그램들이 방송가를 장악하다시피 했던 걸 떠올려보면 최근 1~2년간 생긴 이 변화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만들었을까. 

애초 Mnet 《스트릿 우먼 파이터》가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이 프로그램은 기대보다 우려가 컸다. 아직도 《프로듀스 101》 조작 사건이 뇌리에 남아있는데 서바이벌 방식의 오디션을 가져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첫 회에서 1라운드 미션으로 등장한 ‘노리스펙 약자 지목 배틀’은 이 서바이벌이 치열한 경쟁으로 정면승부하겠다는 걸 드러냈다. 8팀의 댄스 크루들은 저마다 이빨을 드러내며 상대방을 의식한 센 발언들을 내놓았고, 대결 무대에서는 마치 진짜 싸움을 하는 듯한 치열함을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언프리티 랩스타》의 댄스 버전 같은 느낌을 줬고, 너무 세서 춤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강렬함을 만들었다.  

우려는 곧 기대로 바뀌었다. 대놓고 붙여보자는 제작진의 미션들 속에서 댄서들의 놀라운 실력과 리더십, 절실함 같은 것들이 돋보이기 시작했다. 나아가 대결에서는 결코 물러나지 않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기려 하면서도, 승패가 결정 나고 나면 똑같은 댄스 크루의 입장에서 서로를 리스펙트하는 면모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Mnet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한 장면ⓒMnet 제공

여성의 눈물, 그 의미가 달라졌다 

시작은 흔하고도 시대착오적인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 콘셉트의 미션으로 열었지만, 이를 수행해낸 댄서들은 승부욕을 과감하게 드러내면서도 상대를 존중함으로써 그 콘셉트를 여지없이 깨버렸다. 시청자들은 반색하기 시작했다. ‘메인 댄서 선발전’ ‘메가 크루 미션’ 등 미션 자체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경쟁적인 면이 강조됐지만, 그 과정은 멋있다고밖에 할 수 없는 리더십과 이를 따르는 동료애 같은 것들로 채워지며 큰 감동을 선사했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가 거둔 성취는 이른바 ‘백댄서’로 불리는 댄서들에 대한 편견과 여성, 나이 등에 대해 갖는 선입견들을 멋진 언니들이 여지없이 깨버린 데서 나왔다. 메가 크루 미션에서 연예인이 동원됐을 때 시청자들조차 다시 이 댄서들이 들러리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 섞인 비판들이 쏟아졌지만, 프라우드먼 크루의 리더 모니카는 “자존심도 없냐? 연예인이랑 싸우고 있는 게 웃겨”라는 말 한마디로 단박에 이 우려를 깨버렸다. 모니카나 홀리뱅의 허니제이 같은 다른 댄서들에 비해 ‘선생님급(?)’ 나이를 가진 이들을 후배 댄서들이 예우해 주기보다는 경쟁은 경쟁이라고 대하는 모습도 나이에 대한 편견을 깨줬고, 남성 댄서들이 함께 한 ‘맨 오브 우먼’ 미션에서는 남녀 역할 자체를 뒤집어 댄스로 풀어내는 것으로 성차를 깨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이러니 이 ‘멋진 언니들’에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는 그 치열하고 살벌한 경쟁만큼 눈물도 적지 않다. 탈락팀이 결정됐을 때 함께 싸운 다른 팀들도 눈물을 쏟아낸다. 또 어떤 미션에서 우승을 차지했을 때나, 힘들어도 애써 노력했던 걸 누군가 알아줬을 때 이들은 결코 눈물 따위는 흘리지 않을 것만 같은 얼굴에서 눈물을 보인다. 그런데 이 눈물은 과거 방송에서 여성들이 보여주곤 하던 그 눈물과는 의미가 다르다. 거기에는 연민이나 동정 같은 것이 들어있지 않다. 약자의 눈물이 아니고 무언가를 해냈거나 해내고 싶어 그만큼 절실해진 자들의 눈물이다. 

이런 눈물이 자주 등장하는 프로그램이 SBS 《골 때리는 그녀들》이다. 축구를 하기 위해 모인 팀들이 처음에는 어쩌다 시작한 축구에 점점 빠져든다. 그러더니 승리에 목말라 하고 골을 넣었을 때의 환희를 경험하며 패배했을 때의 쓰라림에 눈물을 쏟는다. 조기축구회에 가도 남성들이 대부분인 현실에서 팀 스포츠라는 것 자체가 낯설게 느껴졌던 그녀들이 한 팀이 되어 뛰는 그 시간들은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자신도 몰랐던 재능들이 발견된다. 

SBS 《불타는 청춘》의 출연자들로 구성된 FC불나방의 박선영은 놀라운 축구 재능을 선보이며 ‘절대 강자’로 등극한다. 그러자 그를 깨기 위한 절실함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모델로 구성된 FC구척장신의 악바리 한혜진, 이현이, 국가대표 가족으로 구성된 FC국대패밀리의 박승희, 전미라, 한채아 같은 인물들이 몇 달 사이에 급성장한 기량으로 시청자들을 놀라게 만든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경쟁과 그 승패를 통해 쏟아내는 눈물. 이 언니들의 눈물은 그래서 측은하다거나 불쌍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눈물이 멋있게 느껴지는 것. 이 눈물의 새로운 의미처럼 《스트릿 우먼 파이터》나 《골 때리는 그녀들》이 그려 나가는 건 그저 여성들이 대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다는 사실 그 이상이다. 이들은 그간 방송이 왜곡해서 그렸던 여성 서사들을 다시 써내려가고 있다. 

이른바 리얼 버라이어티가 예능의 트렌드로 자리하고 있을 때 여성들을 위한 방송은 없었다. 지난 2020년 방영됐던 KBS 《다큐 인사이트-다큐멘터리 개그우먼》편에 출연했던 송은이는 한때 진행 능력을 인정받아 MC로 승승장구했지만, 점점 남성 출연자 중심으로 채워진 리얼 버라이어티 시절에(이 시절을 주도했던 상징적인 프로그램들이 《무한도전》과 《1박2일》이다) 설 무대가 없어져 팟캐스트라는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들은 무대가 사라지자 아예 다른 무대를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여성들의 노력은 젠더 감수성이 달라진 대중의 호응을 얻으며 조금씩 가시적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SBS 《골때리는 그녀들》, MBC 《놀면 뭐하니?》의 한 장면ⓒSBS·MBC 제공

여성 서사, 이제 경쟁력이 되다 

MBC 《놀면 뭐하니?》의 ‘환불원정대’는 유재석이 센 언니들 속에서 어떤 새로운 서사가 가능한가를 잘 보여준 사례였다. 사실 SBS 《런닝맨》 같은 프로그램에서 여성들은 적은 수 때문에 남성들의 일방적인 서사의 대상이 되곤 했다. 뜬금없이 만들어지는 ‘멜로 라인’은 단적인 사례다. 하지만 ‘환불원정대’에서 유재석이 센 언니들 사이에 들어가자, 서사는 바뀌었다. 저들이 각자 드러내는 개성들을 온전히 유재석이 끄집어내 주거나 받쳐주는 역할을 하게 된 것. 

E채널 《노는 언니》는 박세리를 주축으로 그간 남성 스포츠 스타들에 비해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스포츠 스타들을 무대 위에 올렸다. 특별히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제목에 걸맞게 ‘노는 모습’을 주로 보여줬다. 여성 스포츠인으로서 겪는 차별적 요소들도 가감 없이 토크의 소재로 끌어냈고, 무엇보다 그간 어딘가 부정적 시각으로 담겨지곤 했던 ‘여성과 놀이’를 긍정화하는 여성 서사를 보여줬다. 이 흐름 위에서 《골 때리는 그녀들》은 마치 JTBC가 일찍이 남성 스포츠 스타들을 모아 시도했던 《뭉쳐야 찬다》에 대한 여성 서사 버전처럼 등장했다. 

한때 여성 서사에 대해서는 프로그램의 주 시청층인 여성이 잘 보지 않는다는 편견이 존재했다. 멋진 남성들이 출연해야 남녀 모두 보편적으로 즐길 수 있다는 이 편견은 이제 ‘멋진 언니들’의 등장으로 시대착오적인 생각이 됐다. 그간 많이 다뤄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블루오션이자 경쟁력이 된 여성 서사는 그래서 더 많은 여성 출연자가 주축이 되는 예능 프로그램들을 기대하게 만든다. 편견과 선입견이 예능 프로그램의 성비 속에 만들어낸 ‘기울어진 운동장’은 이제 조금씩 균형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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