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다시 만난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10.24 13:00
  • 호수 1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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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시대, ‘대학생 아닌 스무살들’의 이야기
한국사회의 과거와 오늘을 바라보다

지난 10월13일 재개봉한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는 정확히 20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오늘날의 관객들에게 다시 당도한 작품이다. 개봉 당시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이후 한국영화 역사에서 언제나 특별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사회적 주체로 온전하게 존중받지 못하는 청춘의 노동 문제를 이야기하면서도, 귀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는 서사로 여겨지지 않았던 젊은 여성들 사이의 친밀한 우정과 갈등의 관계를 세밀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때의 청춘과 지금의 청춘은 어떻게 같고 또 다를까. 2000년대를 20년이나 흘려보내는 동안 그들을 둘러싼 상황들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이제 와 다시 만난 《고양이를 부탁해》는 사회적 지형 변화를 가늠할 수 있는 귀한 지표 중 하나로 보인다.

시작점에는 제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있다. 지난 8월말 개막해 9월1일 막을 내린 영화제는 프로그램 중 하나로 《고양이를 부탁해》의 20주년 특별전을 열었다. 기존의 필름 상영이 아니라 4k 리마스터링 버전 작업을 진행해 상영한 결과다. 과거의 영화가 현재 극장의 상영 방식인 DCP(Digital Cinema Print)가 가능한 디지털 버전으로 탄생했기에 이후 재개봉까지 추진될 수 있었다. 이는 단순한 아카이빙 작업 이상의 의의를 가진다. 한국영화사 안에서 의미 있었던 작업들을 우리 스스로 자랑스럽게 발굴하고 기념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다.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시네마서비스·(주)엣나인필름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시네마서비스·(주)엣나인필름

이요원·배두나의 20대 출연작…재발견된 이유

실제로 《고양이를 부탁해》는 세상에 첫선을 보인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재발견’이 요구됐던 작품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1기인 정재은 감독의 꼼꼼한 연출이 돋보이는 영화였지만, 개봉 당시 2주밖에 관객들과 만나지 못했다. 이후 이 영화의 가치를 알아본 관객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작지만 강력한 팬덤이 만들어졌다. 영화팬들은 《고양이를 부탁해》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몇몇 작품을 중심으로 일명 ‘와라나고’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라이방》(2001), 《나비》(2003), 《고양이를 부탁해》가 그 주인공이다. 관객들 스스로가 거대 자본이 투입된 상업 대중영화에 밀려 설 자리를 잃은 작가주의 영화들을 지지하며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대학생 아닌 스무 살들’의 이야기다. 고등학생 때 만나 단짝이 된 다섯 친구들 혜주(이요원)와 지영(옥고운, 당시 활동명은 옥지영), 태희(배두나), 쌍둥이 자매 비류(이은주)와 온조(이은실)는 모두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인천의 상업고등학교 출신인 이들은 졸업과 동시에 사회로 나아간다. 이후 이들은 저마다 다른 경제적 상황과 계층의 벽을 온몸으로 마주해야 한다. 가장 야무지게 환경의 변화를 꿈꿨던 이는 혜주다. 서울에 있는 증권사에 취직한 것을 시작으로 ‘인 서울’을 갈망하며 꿈을 이뤄간다. 혜주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삶을 개조해 보겠다는 포부가 남다르다. 하지만 사회는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혜주의 현실은 사무실 내에서 홀로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이다. 담당 업무라고 해봐야 직원들이 부탁하는 자료를 출력해 주거나 전화 응대 같은 잔심부름이 대부분이다.

지영은 외국으로 디자인 유학을 떠나고 싶어 하지만 당장 눈앞이 가장 막막한 인물이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 없는 판잣집에서 조부모와 함께 사는 가난한 삶이 지영에게 주어진 오늘이다. 경제적 격차가 조금씩 벌어지면서 점점 더 은근한 무시로 도발하는 혜주의 언행도 지영을 자극한다. 지영은 버려진 고양이를 돌보고 싶어 하지만, 안정적인 환경을 만들어주기에는 어려운 상황이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찜질방 일을 돕는 동시에 틈틈이 뇌성마비 시인의 타이핑 작업도 돕고, 친구들과의 우정도 도모해야 하는 몽상가 기질의 태희도 앞날이 막연하긴 마찬가지다. 화교 출신인 쌍둥이는 가판에서 직접 만든 액세서리를 판매하는 것으로 불안한 하루하루를 견딘다.

 


20년 전 한국 청춘들의 미시사

《고양이를 부탁해》의 영화적 시선은 IMF 이후 점점 더 가파르게 계층 간 단절을 경험하게 된 한국 사회의 풍경을 정확히 가로지른다. 그중에서도 정재은 감독이 주목하는 것은 노동하는 존재로서, 사회적 발언이 가능한 존재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밀려나는 젊은 여성들의 입지다. 이 영화에는 거대 담론들에 가려 뭉개지고 누락된 그들의 일상성에 대한 고찰이 존재한다. 사적인 감상 대신, 또렷한 개별성으로 무장한 채 시대의 공기를 통과하는 이들의 미시사를 기록하는 노력이 영화 안에 있다.

첫 장면에서 다섯 친구들은 즐겁게 웃으며 바다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바로 다음 장면은 창문이 깨지는 소리를 뒤로하고 신경질적으로 걷는 혜주의 발걸음이다. 애초에 그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배경으로 삼았던 풍경 역시 모래사장이 펼쳐진 아름다운 해변이 아니라, 아찔한 크레인이 들어선 인천항이다. 그들에게 허락되는 것은 제한적이다.

이후 건축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한 정재은 감독은 이 영화에서부터 이미 공간을 통해 특별한 정서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보여준다. 인물들이 머무르는 공간의 구석구석을 포착해 내는 것은 그들을 둘러싼 세계를 예민하게 감지해 보려는 시도다. 인천은 지리적으로 서울의 외곽이며, 사람과 물자가 계속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하는 운동성을 지닌다. 실제로 인천항, 월미도, 판자촌, 차이나타운 등 이 영화가 선택하고 바라보는 공간들은 어딘가에 단단히 뿌리내릴 기회를 허락받지 못한 채 부유하는 인물들의 이야기와 긴밀하게 조응한다.

IMF와 밀레니엄을 통과하는 한국 사회의 무거운 공기는 당대의 특수한 것으로 인식됐으나, 코로나 팬데믹과 경제 불안이 팽배한 지금의 분위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도 《고양이를 부탁해》를 눈여겨보게 만든다. 하지만 뚜렷한 변화 역시 감지된다. 영화가 담아낸 2000년대 초반의 사회적 환경은 무심하고 당연한 듯 청춘의 불안과 고민을 배제한다. 마치 너희들은 엄중한 시대적 변화의 주체가 될 자격이 없다는 듯이. 태희가 어선을 타고 싶은 것은 진지한 꿈이지만, 돌아오는 것은 “이건 유람선이 아니다”는 핀잔뿐이다. 그럼에도 태희는 자신만의 가치를 분명히 지켜 나가면서도 가까운 곳에서 서로 주고받아야 할 온기의 힘을 믿고, 나아가야 할 세상을 향한 꿋꿋한 호기심을 놓지 않는다. 정치적·사회문화적 변화를 전면에서 이끌어낸 지금의 청춘 세대에게 그 선택은 당연한 태도일 것이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스타의 시작점

《고양이를 부탁해》는 주연배우들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다. 그들 대다수가 실제로 갓 20대에 접어들었던 시기였으며, 배우들 대부분이 모델 활동으로 경력을 시작했다가 배우로 전향하던 시기라는 공통점도 가진다. TV 드라마에서 먼저 활약하던 이요원은 《남자의 향기》(1998)와 《주유소 습격사건》(1999)을 거쳐 《고양이를 부탁해》로 스크린에서 어엿한 주연 데뷔를 치러냈다. 모델 시절 통통 튀는 매력을 선보이며 젊은 세대의 지지를 얻었던 배두나는 《플란다스의 개》(2000), 《청춘》(2000)을 거치며 확고하게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져 나가는 시기였다. 이후 그는 《복수는 나의 것》(2002), 《린다 린다 린다》(2006), 《괴물》(2007) 등의 작품을 통해 탄탄하게 커리어를 다져 나가며 200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행보를 보여준 배우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다. 지영을 연기한 옥고운 역시 패션 모델 출신으로, 《고양이를 부탁해》는 그의 연기 데뷔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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