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 ‘신드롬’의 숨은 주역들
  • 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ls@sisajournal.com)
  • 승인 2021.10.23 12:00
  • 호수 1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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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전 세계 시청률 1위 차지하며 출연 배우들 조명…연극ㆍ뮤지컬 무대에서 친숙한 얼굴 대거 포진해 눈길

지난 9월17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돼 전 세계 시청률 1위를 차지한 《오징어 게임》이 연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제작진, 창작진과 함께 글로벌한 성공을 함께 이뤄낸 출연 배우들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 이 중에서도 연극이나 뮤지컬 무대에서 더 친숙한 얼굴이 많이 보여 눈길을 끌었다.

먼저 성기훈 역의 이정재와 함께 ‘최후의 2인’으로 마지막 회까지 456억원을 받기 위해 사투를 벌인 조상우 역의 박해수 배우가 돋보인다. 그가 지금처럼 TV와 영화 등 매체에서 주목받기 전에 연극과 뮤지컬 무대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성기훈의 전처 역의 강말금, 장기매매 의사이자 111번 참가자 유성주, 118번 역 홍우진, 322번 임기홍을 비롯해 많은 무대 출신 배우가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제공

무대 배우들의 내공이 작품 완성도 높여

하지만 《오징어 게임》의 배우를 통틀어 가장 크게 화제를 모은 무대 출신 배우가 있다. 바로 게임의 1번 참가자이자 게임의 설계자 오일남 역을 맡은 오영수 배우다. 출연자 중 최연장자이자 극 중 게임 참가자 중에서도 유일한 노인으로 등장해 그가 어떤 역할을 할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가 6화에서 남긴 ‘깐부’(딱지나 구슬을 공유하는 친구)는 이제 한국을 넘어 전 세계인이 다 아는 단어가 됐다. 그가 친구에게 자신의 목숨을 양보하고 퇴장하는 비극적인 모습과 마지막 화에서 예상을 뒤엎고 재등장하는 모습에서 보여진 순박한 노인과 냉정한 지도자 역할을 능수능란하게 넘나드는 연기는 실로 압권이었다.

그는 드라마 속에서 게임 참가자 공식 복장인 초록색 운동복을 입고 젊은이들 사이에 끼어 느릿느릿한 움직임으로 눈총을 받았다. 하지만 특유의 어눌한 말투와 개구장이 같은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어린 시절의 놀이에 임하는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할아버지 자체였다. 도시 빈민 태생으로 인생의 모든 에너지를 거의 소진한 노인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게임 설계자라는 것이 밝혀지는 장면에서 그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마지막 모습을 극적으로 표출하며 시청자들을 더 큰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했다.

1944년생 오영수는 이미 고희를 훌쩍 넘긴 나이로 50년 이상 연극배우로 활동하며 200편 이상의 작품에 출연해온, 현재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현역 원로 연극배우다. 특히 1980년 동아연극상 남자연기상을 받은 《백양섬의 욕망》, 1994년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남자연기상 수상작 《피고지고 피고지고》를 비롯해 1987년부터 23년 동안 국립극단 배우로 2010년까지 활동하면서 셰익스피어극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에 출연해 왔다.

오영수 배우는 여러 인터뷰에서 우리 연극계의 거장이자 선배인 고(故) 장민호 배우(1924~2012)를 가장 존경한다고 밝혔다. 장민호는 생전에 자신이 속한 국립극단 배우 단원을 가리켜 ‘국가가 공인한 최상의 배우’라며 국립극단의 자긍심을 설파한 적이 있다. 현재는 시즌제로 바뀌어 2년간의 계약 단원으로만 활동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오영수를 비롯한 많은 배우가 안정적인 국립극단에 입단해 공연예술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 이렇듯 이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인 ‘깐부’를 통해 사람이 사람을 믿는다는 1번 참가자의 원초적인 메시지는, 어쩌면 평생 국립극단의 베테랑 단원이었던 원로 배우가 평생 흔들림 없이 그가 좋아하는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해올 수 있었던 상황에 대한 감사함과 직업에 대한 자긍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 연극·뮤지컬 무대에서 활동하다가 매체로 넘어와 드라마와 영화의 스타가 되는 젊은 배우들의 사례가 적지 않다. 조승우, 엄기준, 신성록, 조정석, 오만석, 주원, 오나라, 전미도, 이규형 등이 대표적이다. 각 매체의 캐스팅 담당자나 감독들은 대학로 공연장을 정기적으로 찾아 연기 잘하는 신선한 배우들을 섭외하고, 그들이 여는 공식ㆍ비공식 오디션에도 무대 배우가 많이 지원하고 있다.

무대 연기와 매체 연기는 본질적으로 연기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다. 무대는 구간별로 편집되는 매체와는 달리 같은 공간에 모인 관객들 앞에서 긴 호흡의 드라마를 전달하기 위해 배우가 많은 대사를 암기하고 재현해야 한다. 현장의 관객이 거기에 빠져들어 그 커다란 흐름에 올라타고 함께 울고 웃으면 무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교감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은 영상으로만 감상해야 하는 매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체험이다. 또한 매체의 일상 언어보다 함축된 무대 언어는 대체로 사회 비판과 풍자에 열려 있어 그 시대와 상황에 필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전달자로도 기능한다. 위정자들이 돈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숨기고자 하는 내용을 연극의 힘을 빌려 세상에 진실을 외쳐온 역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오영수 배우의 ‘파우스트’를 기다리며

물론 배우들은 무대와 매체라는 경계를 굳이 의식하지 않고 병행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각기 다른 장점이 있기에 상황에 맞게 좋은 작품과 운신의 폭을 선택하면서 연기활동을 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다. 간혹 연극 무대에서 이런 기회를 얻어 매체로 옮기고 인지도를 얻은 다음에는 다시 무대로 돌아가는 것을 불편해하는 배우들도 있다. 상대적으로 무대에서는 적은 출연료를 받을 수밖에 없고 집단적인 연습 환경이 주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불편함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대로 출발했지만 이후 매체에 진출해 보니 자신의 성향이 무대보다는 매체에 더 어울리고 큰 보상과 편안함을 모두 느낀다면 그것 역시 선택의 문제다.

그런 점에서 연극의 순수함에 빠져 평생 한길을 걸었고, 전 세계를 상대하는 넷플릭스 1위 드라마로 단숨에 월드스타가 됐지만 여전히 소박한 무대 연기론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출연하고 싶은 작품으로 34세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는 《파우스트》를 꼽는 오영수 배우는 앞으로 후배들이 다시 만나기 어려운 존경스러운 원조 무대 배우로 기억될 것이다.

아마 파우스트 박사 역할로 오영수 배우가 출연하는 작품이 언젠가 무대에 오른다면 그를 좋아하는 수많은 팬이 객석을 가득 메워줄 것이다. 그가 존경한 선배 두 사람의 이름을 딴 국립극단의 ‘백성희장민호 극장’에서 공연한다면 그 기쁨이 배가될 것이다. 한길을 걸어온 한 무대 배우의 성공 스토리가 실제 연극보다도 더 드라마틱한 엔딩으로 꽃피우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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