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영이 한국 여자골프 체면 살렸다
  • 안성찬 골프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11.28 17:00
  • 호수 167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다승국 타이틀 미국에 넘겨주고, 메이저 ‘無冠’에 ‘신인상’도 놓쳐…내년 시즌 전망은 더 불투명

고진영(26)이 간신히 대한민국 여자골프의 위상을 지켜냈다. 그동안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를 지배해 왔던 한국이 자칫 올 시즌 무관으로 전락할 뻔한 위기를 고진영이 에이스답게 11월22일 LPGA 투어 최종전 CME그룹 투어 챔피언십 우승으로 극복해 냈다.

고진영은 앞서 LPGA투어를 개척한 선배 박세리(44)와 박인비(33)에 이어 한국 여자골프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올 시즌 올해의 선수, 상금왕, 다승왕 등 3관왕에 오르면서 이제 국내 골프계에서는 ‘세리 키즈’와 ‘인비 키즈’에 이어 ‘진영 키즈’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고진영은 한 해 성적을 포인트로 환산한 CME 글로브 레이스와 리더스 톱10도 수상하며 올 시즌 넬리 코다(23·미국)와 양강 체제를 구축했다.

고진영이 11월21일(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나폴리의 티뷰론 골프클럽에서 열린 CME그룹 투어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후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고 있다.ⓒ
고진영이 11월21일(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나폴리의 티뷰론 골프클럽에서 열린 CME그룹 투어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후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고 있다.ⓒAFP연합

도쿄올림픽 부진 충격 후 재충전이 ‘약’

마지막 대회를 앞두고 ‘라이벌’ 코다에게 모든 타이틀에서 뒤지고 있다가, CME그룹 투어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짜릿한 역전을 이뤄냈기에 더 극적이었다. 고진영은 지난해에도 코로나19로 인해 국내에 머무르다가 시즌 막판 LPGA투어에 합류하는 등 단 4개 대회에만 출전하고도 CME그룹 챔피언십 우승과 US여자오픈 준우승 등으로 총상금 166만7925달러를 벌어들여 상금랭킹 1위에 오르는 초절정의 경제적인 골프를 했다. 다만 지난해에는 코로나19로 인해 대회가 제대로 열리지 못하면서 2020시즌의 모든 타이틀은 2021시즌으로 넘어왔다. 고진영은 올해 상금 350만2161달러를 보태 두 해 동안 상금 517만91달러(약 61억4000여만원)를 획득하며 상금왕에 올랐다.

고진영은 귀국 후 가진 인터뷰에서 “상금왕이나 올해의 선수상은 사실 제가 잘하면 받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지만, 정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며 “사실 그 어느 해보다 정말 더 힘들었고 감정 기복도 심했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역전 우승을 했기 때문에 마무리가 조금 더 짜릿했다. 기억에 남는 한 해가 될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런 그도 아쉬움이 남는 게 하나 있다. 지난 8월 도쿄올림픽에서 공동 9위에 머무르며 라이벌 코다의 금메달 획득을 바라봐야만 했던 것. 내심 금메달을 기대했던 그로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충격이었다. 때문에 그린을 잠시 떠났다. 그런데 이것이 약이 될 줄이야. 두 달간 한국에서 코치를 찾아 스윙 점검을 하며 훈련을 했고, 독서 등으로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진 뒤 9월 LPGA투어에 복귀해 컴비아 포틀랜드 클래식에서 우승했다. 이어 NW 아칸소 챔피언십 공동 6위, 숍라이트 LPGA 클래식 공동 2위, 코그니전트 파운더스컵 우승,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 우승, 펠리컨 챔피언십 공동 6위 등에 이어 마지막 대회에서 정상에 올랐다. 최근 출전한 7개 대회에서 우승 4회를 포함해 전 대회 톱10에 오르는 남다른 저력을 보여줬다.

고진영의 강점은 무엇일까. 강한 정신력이다. 경기에 집중하는 능력도 탁월하다. 골프를 할 때는 골프만, 대회 중엔 오직 플레이에만 집중한다는 그의 골프 철학과 잘 맞아떨어진다. 기술적인 면에서는 아이언이 돋보인다. 자로 잰 듯한 ‘송곳 같은’ 아이언샷을 구사한다. 고진영의 선전으로 한국은 겨우 체면치레를 했지만, 사실 한국의 올해 LPGA투어 성적은 기대에 크게 못 미친다. 골프 강국 위상이 크게 흔들린 한 해였다.

 

미국·일본·동남아의 20대 초반 루키들 성장세 위협적

최다승국 자리는 미국에 내줬다. 한국은 7승으로 미국에 1승 뒤졌다. 7승이라곤 하지만 고진영이 5승을 한 것을 제외하면, 박인비(1승)·김효주(1승)만 우승 맛을 봤을 뿐이다. 5년간 이어온 ‘신인상’도 놓쳤다. 2010년부터 매년 1승 이상 올렸던 메이저대회도 올해는 ‘무관(無冠)’이다. ‘안니카 메이저 어워드’(5개 메이저대회 성적이 가장 우수한 선수에게 주는 상)와 ‘베어트로피’(최저평균타수상)도 넘겨줬다.

그러는 사이 이런 타이틀을 미국과 유럽, 동남아시아 선수들이 가져갔다. 특히 20대 초반 ‘영건’ 선수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미국의 ‘자존심’ 코다를 비롯해 아시아의 ‘루키’ 패티 타바타나킷(22·태국), 유카 사소(20), 하타오카 나사(22·이상 일본), 옐리미 노(20·미국) 등이 다크호스로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계 외국선수인 리디아 고(24·뉴질랜드)와 이민지(25·호주)를 비롯해 브룩 헨더슨(24·캐나다), 렉시 톰슨(26·미국) 등 기존 세계 정상급 랭커들도 한국의 걸림돌이 됐다.

비록 막판 부진으로 고진영에게 타이틀을 넘겨준 코다지만 그는 여전히 세계랭킹 1위를 지키며 내년 시즌 역시 가장 강력한 올해의 선수상 후보다. 드라이브 거리 300야드 이상을 때릴 때가 많은 코다는 고진영과 달리 장타력이 무기다. 마지막 대회에서 고진영에게 추월당해 올해의 선수와 상금랭킹 2위에 그쳤다.

타바타나킷이 메이저대회 ANA 인스피레이션에서 우승하며 ‘신인상’과 안니카 메이저 어워드를 수상했다. 이제 22세인 그는 장타력에다 그린적중률과 평균 퍼트수도 상위권에 랭크될 정도로 향후 한국을 위협할 가장 강력한 선수로 꼽히고 있다. 역시 메이저대회인 US여자오픈을 가져간 사소도 장타자다. 그는 필리핀 국적이었으나, 좀 더 안정적으로 골프에 집중하기 위해 최근 일본 국적으로 바꿨다.

한국이 올 시즌 다소 부진했던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늘 우승 다툼을 벌이던 박성현(28)의 추락과 ‘루키’ 김아림(26)의 부진, 베테랑인 김세영(28)·유소연(30)·전인지(27)·양희영(32)·지은희(35)·이정은6(25) 등이 제 성적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2017년 올해의 선수상 수상자인 박성현이 컷 탈락을 밥 먹듯 하면서 세계랭킹 83위로 하락했던 게 컸다.

내년 전망은 올해보다 더 불투명하다. 2022년에는 LPGA투어 대회가 총 34개에 역대 최다인 총상금 8570만 달러(약 1019억원)가 걸렸다. 올해 국내 KLPGA에서 신바람을 일으킨 ‘대세’ 박민지(23) 등 20대 초반의 ‘대어(大魚)’들이 국내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LPGA투어에 도전하는 루키가 거의 없다. KLPGA를 평정했던 최혜진(22)·안나린(25) 등이 LPGA투어 퀄리파잉 시즌에 도전하긴 하지만, 한국의 LPGA투어 장기집권을 위한 ‘터닝 포인트’가 필요한 시점이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