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난민 사태에 숨은 ‘하이브리드 전쟁’이란 키워드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 승인 2021.12.09 11:00
  • 호수 1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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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 무기화해 서방 공격하는 러시아·벨라루스 
인권·민주주의·인도주의 앞세우다 반격받는 유럽

1999년 유럽연합(EU)과 비슷한 연맹국을 창설한 권위주의 국가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서방을 상대로 대대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하이브리드 전쟁’이다. 총 한 방 쏘지 않는 독특한 전쟁이다.  

하이브리드 전쟁은 기존의 재래식 전쟁·비정규전·사이버전에다 가짜뉴스, 외교, 소송전, 외국 선거 개입 등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온갖 도구를 동원해 상대에게 타격을 입히고 난처하게 만들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고 의지를 실현하는 ‘정치 전쟁’을 가리킨다. 미국 국방대학의 프랭크 호프먼 교수가 제시했다.  

공격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대리인을 내세우든지, 관련 없는 제3세력을 이용한다. 이를 통해 공격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숨긴다. 심지어 남에게 뒤집어씌움으로써 비난과 보복을 피한다. 상대는 누가 공격하는지도 모르고 당하게 된다. 의도된 거짓말로 이뤄진 선전전, 교활한 비밀공작, 뻔뻔한 변명과 선전술,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을 이용하고 버리는 비인간적인 면모와 잔혹성까지 갖춘 비열한 공격이 이어진다. 여론 조작도 포함된다.  

이렇게 공격을 당한 측은 내부 분열, 도덕성 실추, 여론 악화, 이미지 손상, 경제·사회적 혼란을 겪게 된다. 그 결과 공격을 가한 측의 요구를 자연스럽게 들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하이브리드 전쟁은 군사력·경제력에서 밀려도 상대를 압박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평가된다.  

ⓒAP 연합
4000여 명에 이르는 중동 출신 난민이 11월16일(현지시간) 벨라루스-폴란드 사이의 브루즈기-쿠즈니차 국경 검문소 주변에 진을 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혹한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인도주의적 원조를 촉구하고 있다.ⓒAP 연합

약자에게 효과적인 하이브리드 전쟁

최근 추위가 다가오는 동유럽의 국경에서 이런 전쟁이 벌어졌다. 중동의 이주 희망자들이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곳으로 대거 몰렸다. 그들은 왜 여기에 왔을까. 

사실 중동 하면 떠오르는 것이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함께 삶의 터전을 잃고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나선 난민이다. 시리아 내전과 이라크 전쟁, 탈레반이 재집권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생긴 중동 지역 난민은 수십만~수백만 명에 이른다. 아프가니스탄 주변국가인 파키스탄과 이란, 이라크·시리아와 경계를 맞댄 터키는 사실상 국경을 폐쇄했다. 이들이 대대적으로 이주하면서 EU 지역은 홍역을 치렀다. 난민 수용을 둘러싸고 독일을 비롯해 경제적 여유가 있는 서유럽과 헝가리·폴란드 등 경제적으로 힘든 중·동유럽의 신규 회원국은 갈등을 빚었다.  

무슬림 이주민에 대한 반발로 헝가리와 폴란드에선 극우 성향의 정치인이 득세했다. 독일에서도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지지자를 늘렸다. 각국 정치인들은 난민 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그 결과 난민이나 이주 희망자가 서유럽으로 이동하는 길은 사실상 막혀 버렸다.   

그런데 지난여름부터 동유럽 국가 벨라루스에 중동의 이주 희망자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벨라루스가 비교적 비자를 잘 내준 것이 시작이었다. EU 비회원국인 벨라루스는 회원국인 폴란드와 약 400㎞, 리투아니아와 약 680㎞, 라트비아와 170㎞ 정도 국경을 맞대고 있다. 벨라루스는 EU 동쪽 경계의 바로 건너에 위치한 국가인 것이다.  

이 국경은 오랫동안 조용한 곳이었다. 사람의 왕래가 적은 숲이다. 그런데 이 경계, 특히 폴란드와의 국경에 느닷없이 중동 난민이 수천 명이나 모여들어 폴란드에 국경 개방을 요구하고 시위와 농성에 나서면서 문제가 생겼다.  

이들은 폴란드가 벨라루스와의 국경을 개방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이 국경을 지나 폴란드를 거쳐 난민에게 비교적 온정적인 독일로 가는 것이 합법적이라는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들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폴란드가 이들의 입국을 막으면서 벨라루스-폴란드 국경에서 이주민과 경비대가 충돌하고 긴장이 고조됐다. 최루탄과 섬광탄도 터졌다.  

도대체 이 지역과 역사적으로,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중동 이주 희망자들이 왜 모인 것일까. 이를 살펴보면 벨라루스와 이 나라 대통령인 알렉산데르 루카셴코가 서방을 상대로 벌인 하이브리드 전쟁의 혐의가 짙다.  

중동 사람들은 지난여름부터 중동 도시에서 벨라루스 국영여행사를 통해 벨라루스 비자를 받은 뒤 벨라루스 국영항공사 벨라비아의 여객기를 타고 이 나라 수도 민스크로 날아왔다. 벨라비아와 국영여행사가 이라크를 중심으로 ‘사냥 관광객’을 대대적으로 모집한 결과였다. 벨라비아는 중동과 민스크를 연결하는 항공편을 조직적으로 대폭 늘렸다. 그 결과 이라크에선 바그다드에만 있던 민스크 직항편이 북부 쿠르드족 자치 지역인 아르빌(한국의 자이툰 부대 주둔지)과 인근 슐레이마니아, 그리고 남부 바스라 등 모두 네 곳으로 취항 지역을 늘렸다. 

이라크가 벨라루스 직항편 허가를 8월7일 이후 축소하자 벨라비아는 터키 이스탄불과 시리아·레바논에서 민스크로 가는 항공편을 늘렸다.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의 저비용 항공사인 플라이 두바이도 민스크 항로를 증설했다. UAE의 작은 토후국인 라스알카이마도 이를 따랐다. 벨라비아는 터키 최대 도시 이스탄불과 남부 안탈리아에 민스크 직항편을 개설했다.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와 혼란이 계속 중인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도 직항편을 열었다. 중동과 아프리카의 이주 희망자들이 벨라루스에 모인 배경이다. 의도적이라는 의혹이 일 수밖에 없다.  

ⓒEPA 연합
독일 수도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문에서 11월14일(현지시간) 시위대가 ‘국경을 열어라’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 우고 외무부 청사까지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EPA 연합

중동·아프리카 난민이 벨라루스에 모인 이유

그렇다면 벨라루스와 루카셴코는 왜 이런 일을 벌였을까. 루카셴코가 EU 국가들의 제재를 받는 문제아였기 때문이다. 루카셴코의 장기집권 야욕이 배경에 깔렸다. 2020년 8월9일 여섯 번째 대선을 치른 루카셴코는 1994년 첫 대선을 제외한 모든 선거가 부정선거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는 대선 때마다 반대파 지도자들의 입후보를 원천봉쇄해 ‘유럽 최후의 독재자’로 불려왔다.   

그런 상황에서 루카셴코는 지난 5월23일 132명을 싣고 그리스 아테네에서 벨라루스 영공을 거쳐 이웃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로 행하던 아일랜드의 라이언에어 자회사 소속 4978편 여객기를 전투기를 동원해 강제로 착륙시켰다. 여객기에는 벨라루스의 반정부 언론인인 로만 프로타세비치와 그의 여자친구인 소피아 사페가가 타고 있었다. 국가 주도의 납치극을 벌인 셈이다. 이 때문에 벨라루스는 EU로부터 자국 항공사의 유럽 영공 통과 금지, EU 여행 금지, 자산 동결, 경제 제재 등 혹독한 제재를 받게 됐다.  

이에 대한 루카셴코의 대책은 반성이 아니라 적반하장이었다. 그는 “인신매매업자와 마약밀수업자, 무장이주자를 EU 국경에 데려오겠다”고 위협한 뒤 중동에서 이주 희망자를 데려와 국경으로 데려갔다. 하이브리드 전쟁을 벌인 것이다. 이주민을 이용해 EU 국가들을 괴롭혀 자신에게 가해진 제재를 풀어보려는 속셈이 빤히 드러났다.  

사실 이런 하이브리드 전쟁은 이미 존재했으며, 앞으로 더욱 잦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러시아와 중국, 이란 등이 짭짤한 재미를 봐왔기 때문이다. 2013~16년 나토 사령관을 지낸 미국의 필립 브리드러브 장군은 2016년 2월 미 상원 청문회에서 러시아가 난민을 활용해 유럽을 약화시키려 해왔으며, 난민 유입을 통해 지역 안정을 뒤흔들어 경제와 사회 불안정을 유발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이 맞는다면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이미 오래전부터 난민을 활용해 서유럽에 타격을 주려고 시도해 왔던 셈이다.  

그해 10월 나토 회원국이 아닌 핀란드의 국방부 장관이 나토 회의에 참석해 러시아가 유럽과 전쟁이 벌어지면 최대 100만 명의 난민을 핀란드-러시아 국경에 쏟아넣고 제2전선을 만들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실제 러시아는 다양한 하이브리드 전쟁을 수행해 왔다. 국경을 맞댄 우크라이나가 EU와 나토 가입을 추진하자 2014년 3월 우크라이나가 지배하던 크림반도를 합병했다. 이어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친러시아 분리주의자를 앞세워 내전을 일으켰다. 러시아는 서방과 전투 한 번 벌이지 않고 친서방 우크라이나의 발목을 잡았다. 골병이 든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EU에도, 나토에도 가입하지 못하고 있다.  

 

앞에선 “난민 받아라” 뒤로는 “제재 해제”

러시아는 2016년 가짜뉴스 등으로 미 대선에 개입한 혐의도 받는다. 이를 통해 자신들의 입맛에 맞거나 맘대로 다룰 수 있는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의혹이 있다.  

중국은 대만에 대해 공군기와 군함을 동원해 군사적으로 위협하면서 인터넷 여론 등을 유리하게 조작하며 하이브리드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중국 당국은 애국적 게시글 하나에 5전(중국어로 우마오(五毛))을 받는 인터넷 평론가를 동원해 여론을 공산당에 유리하도록 유도한다는 비판을 들어왔다. 형식적으로는 중국어 학원인 공자학원을 동원해 중국어를 배우는 외국 젊은 층을 친중 성향으로 유도하는 공작을 진행한다는 의심도 받아왔다.  

하이브리드 전쟁의 압박에 시달리는 나라는 적지 않다. 사실 유럽 국가들은 오래전부터 중동 이주민의 압박을 받아왔다. 발칸반도의 EU 국가 크로아티아도 비회원국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의 경계에서 중동 이주민의 압력에 시달려왔다. 비회원국인 터키와 바다를 맞댄 회원국 그리스의 섬들은 오래전부터 중동 이주민들의 이동 경로로 자리 잡았다. 북아프리카에 가까운 스페인과 이탈리아 해안은 아프리카·중동에서 건너와 이주를 노크하는 이들로 붐빈다.  

이주민을 무기화하는 하이브리드 전쟁의 시대가 바야흐로 열리고 있다. 특히 하이브리드 전쟁 능력을 앞세운 러시아가 유럽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유럽은 과거 식민지배에 이어 걸프전·이라크전·아프가니스탄전으로 발생한 이주민의 부메랑을 맞고 있다. 그 틈새를 파고들어 러시아와 벨라루스 등 권위주의 국가들은 서유럽의 이러한 업보를 이용해 겉으론 “난민을 받아라”라고 하면서 뒤로는 ‘제재 해제’를 압박한다. 그러면서 EU의 인권·도덕·인도주의를 앞세운 가치외교 철회를 요구한다. 새로운 국제 전쟁 양상이다.  

서유럽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이주민 문제가 EU의 내부 균열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벨라루스가 벌이는 하이브리드 전쟁은 중국·북한·이란 등 반서방 국가엔 참고 자료다. 유럽의 목줄을 쥘 수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도 사실상 하이브리드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이다. 21세기가 하이브리드 전쟁의 세기가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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