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이 가상인간에 투자하는 이유
  • 조유빈 기자 (you@sisajournal.com)
  • 승인 2021.12.07 11:00
  • 호수 1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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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과 현실의 경계 허무는 가상인간들
광고부터 생방송까지 활동 영역 넓어져
학폭·미투·갑질 등 스캔들도 없어

그들은 영원히 늙지 않는다. 지금 시대에 통하는 외모와 매력을 지녔다. 자유분방하고, 사교적이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활발하게 소통한다. 가상인간. 우리는 그들을 이렇게 부른다. 그들은 가상에 존재하지만 현실과 가상을 오간다. 수백만에 이르는 팔로워를 기록하고, ‘현실’ 광고계를 휩쓸고, 음원을 발표하기도 한다. 이제 실시간으로 움직이고 말하는 AI기술을 탑재한 가상인간까지 등장했다. ‘아바타’로만 인식되던 가상인간이 산업의 전반을 움직이는 인플루언서로 기능하면서, 기업들도 가상인간에 대한 투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추세다. 가상인간은 얼마나 종횡무진하고 있을까.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무는 인플루언서답게, 그들의 활동 영역에는 제한이 없다.

ⓒ인스타그램
ⓒ인스타그램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 구축하는 역할

전 세계에서 가장 핫한 가상 인플루언서 릴 미켈라는 스타트업 브러드를 통해 탄생한 19세의 브라질계 미국 가수다. 여러 음악 앨범을 발매했고 샤넬과 프라다, 디올 등 명품 브랜드의 모델로도 활동하고 있다. 연간 수입은 130억원 수준. 그의 다음 무대는 영화와 TV 프로그램이다. 2018년 타임지는 그를 방탄소년단과 함께 ‘온라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25인’으로 선정했다. 가상 인플루언서 슈두는 2017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흑인 여성이다. 영국의 사진작가 캐머런 윌슨이 3D 입체 기술을 활용해 만든 디지털 기반의 모델로, 최근 삼성 휴대폰의 모델로 발탁되면서 이름을 알렸다.

최근에는 이렇게 MZ세대를 잡기 위해 가상 인플루언서를 통한 마케팅을 펼치는 것이 글로벌 추세가 됐다. 이케아는 작년 8월 일본 도쿄에 매장을 내면서 가상인간 이마를 모델로 기용했다. 이케아 매장에서 생활하는 이마의 모습을 영상으로 만들어 공개한 것. 이제 이마는 일본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광고모델 중 한 명이 됐다.

국내에서 활약하는 가상인간들도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 국내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가상 인플루언서는 로지. 작년 8월 싸이더스스튜디오엑스가 만들었다. 초반에 로지는 인플루언서로서 대중과 소통이 가능한지 테스트하는 차원에서 SNS를 통해서만 등장했는데, 아무도 그가 가상인간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얼굴 성형을 협찬해 주고 싶다는 강남 성형외과의 SNS 메시지가 줄을 이었을 정도다. 로지는 신한라이프의 TV광고로 대중에게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가상인간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뒤 오히려 더 신선한 인플루언서로 인식됐고, 최근 출연한 광고 뮤직비디오는 공개 3주 만에 유튜브 1000만 뷰를 돌파했다. 로지의 출연은 신한금융그룹이 가상 인플루언서를 통해 디지털 전환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는 평가까지 낳았다.

김래아 역시 기업의 얼굴이다. 올해 1월 CES2021에서 소개된 LG전자의 김래아는 23세 여성이다. LG전자는 김래아가 실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도록 관련 기술 개발에 공을 들였는데, 7만 건에 달하는 실제 배우의 움직임과 표정을 추출하고, 이를 토대로 인공지능의 한 분야인 딥러닝 기술을 이용해 3D 이미지를 학습시켰다. 목소리와 언어는 4개월간 자연어 정보를 수집한 뒤 학습시킨 결과로 만들어졌다. 유튜브에서 활동하는 루이 리는 AI 딥러닝 기술을 활용해 실제 촬영한 동영상에 가상의 얼굴을 합성하는 방식으로 제작된 가상인간이다. 22세의 여성 인플루언서인 그는 온라인 쇼핑몰 생활지음의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사이버 가수 아담 이후 20여 년, 가상인간의 부흥

사실 우리나라에서 가상인간은 완전히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1998년 이미 사이버 가수 아담이 존재했다. 3D 그래픽으로 구현된 가상인간은 그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존재였다. 첫 앨범은 2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실제 팬클럽도 존재했다. 그러나 그는 1999년 2집 앨범을 마지막으로 ‘바이러스로 인한 사망설’ ‘군 입대설’ 등의 논란을 뿌린 뒤 자취를 감췄다.

1998년 데뷔한 사이버 가수 아담
1998년 데뷔한 사이버 가수 아담

그가 사라진 이유는 뭘까. 가장 큰 이유는 수익성이었다. 아담을 만드는 데 사용한 모션 캡처 기술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이었다. 투입 비용과 인력이 상당했다. 아담이 몇 분 동안 출연하는 데 1억원이 든다는 얘기가 나왔을 정도다. 또 하나는 ‘불쾌한 골짜기 현상’. 일본의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제시한 이론으로, 로봇 등이 인간을 아예 닮지 않았을 때보다 어설프게 인간을 닮았을 때 대상을 향한 혐오도가 거꾸로 상승한다는 것이다. 과거 기술력의 한계로 인해 3D 만화 주인공 같은 모습을 한 아담이 장기적으로 팬덤을 이끌어가기는 어려웠다. 결국 가상과 현실을 연결하지 못한 1세대 가상인간은 그렇게 사라졌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인공지능 기술과 메타버스 플랫폼은 가상인간이 진화하는 배경이 됐고, SNS는 그들이 뛰어놀고 소통하는 터전이 됐다.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가상 인플루언서의 등장은 이미 이런 플랫폼에 익숙한 MZ세대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SNS 속에서 보이는 다양한 모습과 소통 방식은 가상인간을 한 명의 인플루언서로 인식하게 했다. 실제로 가상인간의 SNS 활동은 활발하게 이뤄진다. 온라인 패션 플랫폼 W컨셉은 최근 로지를 홍보대사로 발탁하면서, 평소 로지가 다양한 패션을 SNS를 통해 공유하며 적극적으로 소통해온 것을 강점으로 뽑았다. 김래아 역시 SNS를 통해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며 공감대를 형성해 왔고, 루이 리는 유튜브를 통해 커버곡으로 팬들과 소통하고 있다.

여기에 리스크가 없다는 점은 가상 인플루언서들이 성장하는 배경이 된다. 물리적인 시간에서 자유롭고, 체력이 떨어지거나 병에 걸릴 우려도 없다. 실존하는 광고모델의 경우 스캔들이나 부정적인 이슈로 인한 이미지 손상이 브랜드 이미지 타격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지만, 가상인간에게는 과거가 없다. 학폭, 미투, 갑질 등 스캔들로 브랜드에 손해를 입힐 일이 없다는 얘기다. 불미스러운 일로 광고나 활동이 중단될 염려가 없다는 점은 광고모델로서 큰 장점이다. 특정 세대가 선호하는 얼굴이나 매력을 모아 만들어지기 때문에 특정 연령대를 타깃으로 한 맞춤형 광고에도 유리하다.

2016년 릴 미켈라가 등장할 때까지만 해도 가상의 인물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로지를 비롯해 최근 등장하는 가상인간들은 피부결과 솜털까지 표현되면서 더욱 정교한 외형을 지니게 됐다. 스마일게이트의 가상인간 한유아가 대표적이다. 가상현실(VR)게임 포커스온유의 주인공이자 SNS 인플루언서로도 활동 중인 한유아는 스튜디오 자이언트 스텝의 인공지능 기반 솔루션 등을 통해 이전의 이질적인 외모에서 인간에 가까운 정교한 외모로 재탄생했다. 올해 말 음원 발표를 시작으로 아이돌로 데뷔할 예정이다. 이렇게 가상인간에 음성표현, 목소리까지 더해지면서 인간과 가상인간의 경계는 더욱 흐려지는 중이다. 과거에는 인스타그램에서 사진을 올리고 댓글을 다는 것이 전부였다면, 지금은 노래를 부르고 브이로그를 올리면서 팬들과 소통한다.

 

관련 기술 확대되면서 투자 본격화

가상인간이지만 그 실체는 실제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점. 그것은 가상인간의 약점으로 꼽힌다. SNS에 사진을 올리고 글을 작성하는 것은 대부분 인간이다. 가상인간이 예전부터 인터넷에 존재하던 ‘아바타’와 다를 것이 없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런 비판 속에서 IT업계는 AI 기술을 본격적으로 가상인간에게 적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가상인간에게 적용되면 가상인간은 통제 없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 화웨이는 지난달 AI 기술 기반의 자율적 가상인간 윤셍을 공개했다. 모델링, 렌더링 등 기술을 통해 가이드 모델 없이도 움직이고, 실시간으로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가상인간이다. 생방송 진행 등을 통해 팬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것도 가능하다. 내년부터는 이러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가상인간들이 더욱 본격적인 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이렇게 관련 기술이 발전하는 상황에서, 기업도 가상인간을 외면할 수 없다. 롯데홈쇼핑은 가상인간 루시를 자체 개발해 지난 9월부터 선보였다. 본캐가 디자인 연구원인 루시는 롯데홈쇼핑이 구축하는 메타버스 플랫폼에서 가상 쇼호스트로 나서 상품을 소개하고, 소비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농협은 딥러닝 기술을 기반으로 구현한 AI 은행원을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겠다고 밝혔다. 농협은행에 근무 중인 MZ세대 직원들의 얼굴을 합성한 가상의 은행원으로, SNS를 통해 고객과 소통할 예정이다.

온마인드가 제작한 가상인간 수아. 수아의 틱톡 팔로워 수는 1만8000명 이상이다.ⓒ수아 인스타그램

가상인간을 개발하는 회사들에 대한 투자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투자전문회사로 출범한 SK스퀘어는 첫 투자처로 가상인간 수아를 개발한 온마인드를 택했다. 온마인드가 제작한 수아는 실시간 인터랙티브가 가능한 가상인간이다. 수아는 인스타그램과 틱톡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지난해 유니티 코리아와 광고모델 계약을 맺기도 했다. 가상인간 루이 리의 제작사 디오비는 최근 50억원의 투자유치를 완료했고, 스마일게이트와 손잡고 한유아를 만든 자이언트 스텝은 방탄소년단 소속사인 하이브로부터 4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

# 왜 가상인간은 다 여성일까

가상인간 시장 커지면서 ‘AI 윤리’에 대한 요구도 확대

세계적인 인플루언서인 미국의 릴 미켈라부터 우리나라의 로지, 루시, 김래아, 한유아까지 유명한 가상인간들은 모두 여성이다. 그것도 10·20대 젊은 여성. 남성 가상인간도 드물게 등장하긴 하지만, 활발하게 활동하거나 인지도가 높은 가상인간들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여성 가상인간이 대세가 된 배경은 무엇일까.

산업계의 논리를 보자. 패션, 뷰티, 리빙 등 기업이 판매하는 상품의 대부분은 여성에게 소구력이 높다. 이를 홍보하기 위해 여성 인플루언서, 여성 모델을 광고에 기용하는 경우가 많다. 가상인간도 인플루언서다. 가상인간은 대중이 현재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매력과 지금 사람들에게 통하는 트렌드를 조합해 만들어진다. 여성 가상인간들은 다양한 옷차림, 머리 스타일, 메이크업 등을 통해 개성과 최신 유행을 보여주기에 적합하다.

사람들이 여성에게 더 편안함을 느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기계처럼 인식되는 로봇이나 인공지능과 대화하는 것을 싫어하는 속성을 가진다. 그렇기에 로봇이나 인공지능에 성을 설정하는데, 인간이 여성의 목소리나 외모에 더 친밀감을 느끼기 때문에 여성이라는 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여성의 목소리가 더 친밀하게 느껴진다는 연구 결과도 존재한다. 과거 미국 인디애나대학 정보과학 교수인 칼 맥도먼은 동료 연구원들을 남녀 그룹으로 나눠 컴퓨터가 합성한 남성과 여성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실험을 진행했는데, 양쪽 그룹 모두 여성의 목소리가 더 따뜻하다고 느꼈다는 결과를 논문을 통해 발표했다.

클리포드 나스 스탠퍼드대학 교수 역시 인간이 남성보다 여성의 목소리에 더 기쁨을 느낀다고 분석한 바 있다. 엄마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아빠보다 엄마 목소리를 더 반기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술적으로도 여성의 목소리가 주파수가 더 높아 전달력이 강하다는 시각도 있다. 대부분의 인공지능 음성인식장치, 공공기관의 가상 음성 서비스가 기본적으로 여성의 목소리를 탑재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현재 김래아, 루이 리 등 가상인간들은 외형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목소리를 통해서도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인공지능이나 가상인간에 성을 설정하는 것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 국내 스타트업 스캐터랩이 개발한 챗봇, 이루다를 둘러싼 사태는 이 같은 비판에 불을 붙였다. 이루다는 이용자들이 친근함을 느낄 수 있도록 20대 여대생으로 설정됐다. 출시된 지 2주 만에 이용자 75만 명을 돌파하며 인기를 끌었지만, 일부 이용자의 성희롱과 성차별적 발언이 문제가 되면서 논란에 휩싸였다. 여기에 차별·혐오적 발언을 학습하는 문제까지 발생하면서 결국 서비스는 종료됐다. 당시 이재웅 전 쏘카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챗봇이 20세 여성으로 설정되는 순간, 우리 사회에서 성 착취에 가장 취약한 20세 여성의 위상이 그대로 투영되지 않을 수 없다. 굳이 AI에 젠더나 나이를 설정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고 지적했다.

2016년에도 마이크로소프트가 10대 여성으로 설정해 선보인 챗봇 테이에게 여성 혐오적 메시지가 쏟아져 논란이 된 바 있었다. 이 외에도 AI의 여성화에 대한 비판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애플의 시리, 아마존의 알렉사, 마이크로소프트의 코타나, KT의 기가지니 등 기본적으로 AI를 친절한 여성으로 설정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2019년 유네스코는 “음성인식장치들이 젠더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AI나 가상인간의 성별을 중성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해 글로벌 인공지능 차별 방지 캠페인 단체 ‘이퀄 AI’는 성 정체성이 없는 AI 목소리 큐를 공개했다. 구글의 챗봇 메나, 페이스북의 블렌더 등 성별을 짐작하기 어려운 무성의 가상인간도 이미 등장했다.

최근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상인간들도 외모와 몸매를 품평하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포털에서 로지를 다룬 기사 아래에는 마치 과거의 연예뉴스 댓글과 같은 외모 비하 댓글이 달렸다. 중국에서는 가상인간 앤지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네티즌들이 비난을 쏟아내는 일도 있었다. 이들이 소비되는 방식을 보면 오히려 더 쉽게 성적 대상화가 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가상인간 시장이 커지면서 일명 ‘AI 윤리’에 대한 요구 또한 확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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