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 등진 이준석 ‘잠행’의 손익계산서
  • 박성의 기자 (sos@sisajournal.com)
  • 승인 2021.12.02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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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식 정치’에 선 긋고 ‘자기정치’ 선택
당심 잃었지만 ‘소신있다’는 정치적 유산 얻어

대선 레이스 중 당 대표가 대선 후보를 등지는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와의 연락을 끊은 채 돌연 ‘전국일주’에 나서면서다. 이 대표는 선거대책위원회 일정을 거부한 채 전국을 돌며 각 지역별 현안을 직접 챙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 후보 역시 이 대표와의 관계 개선 대신 관망을 택하면서 국민의힘 내홍은 장기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 대표의 돌발 행동에 당심은 차게 식었다. 향후 윤 후보의 지지율이 하락 국면에 접어들 시 이 대표를 향한 당내 여론은 더 악화될 수 있다. 일각에선 이 대표가 이 같은 위험을 감수하고도 본인의 정치 인생을 건 ‘도박’을 택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과연 이 대표는 전국일주를 통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될까.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오른쪽)와 이준석 대표가 11월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대화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오른쪽)와 이준석 대표가 11월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대화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잠적 후 꺾인 尹 지지율…대표에 분노한 당심

이 대표의 휴대전화가 꺼진 건 지난 11월30일부터다. 이 대표는 11월29일 늦은 오후 페이스북에 돌연 “그렇다면 여기까지입니다”라고 적은 뒤 잠적했다. 이 대표는 초선의원 몇과 술자리를 한 뒤 다음 날 짐을 챙겨 서울을 떠났다. 이 대표의 돌발 행보에 정가에서는 ‘대표 사퇴설’까지 제기됐다. 대선 국면에서 당 대표가 잠적을 택한다는 건 사실상 후보 지지 철회와도 같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평소 페이스북을 통해 대중과 활발히 소통해왔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소통 대신 불통을 택했다. 각종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당심이 차게 식었다. 이 대표가 ‘내부총질’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실제 이 대표 페이스북 댓글란에는 ‘이럴 거면 사퇴하라’, ‘여당 좋은 일을 야당 대표가 하고 있다’는 등의 악플이 줄을 이었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이 대표 잠적 다음날인 지난 1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지지율이 윤 후보를 오차범위 내에서 앞섰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된 것이다. 리서치앤리서치가 채널A 의뢰로 지난달 27~29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8명을 대상으로 내년 대선에서 어느 후보에게 투표할 것인지 물은 결과, 이 후보 35.5%, 윤 후보 34.6%으로 0.9%p 차로 박빙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론조사 기간은 이 대표가 잠적을 택하기 전이다. 그럼에도 여론조사 발표 당일 이 대표의 잠적 기사가 뉴스를 도배하면서 당내 분노가 폭발했다. 정가에서는 윤 후보의 지지율이 하락 국면에 접어들 때마다 ‘이준석 책임론’이 부상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번 사태로 당내 이준석 ‘안티 여론’이 더 들끓게 됐다는 것이다. 전통 보수 유권자들이 들을 돌린다면 ‘0선’인 이 대표로서는 향후 공천 과정 등에서 큰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 한 관계자는 “이 대표의 어린 나이를 빌미로 그의 성과를 낮춰 보는 경향이 당내에 분명 있었다. 이번 사태 후 의원들 사이 ‘삐진 것 아니냐’는 비유가 나왔는데, 당 중진이 대표를 했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표현”이라고 했다. 이어 “이번 사태로 어린 대표를 향한 당원들의 불신이 더 깊어졌다. 향후 이 대표가 당내에서 목소리를 낼 때마다 이번 일이 계속 회자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자기 정치 위해 尹과 ‘공생’ 아닌 ‘분리’ 택해

일각에선 이 대표의 전국일주가 ‘돌발 행보’가 아닌 철저히 ‘계획된 행보’라는 분석도 나온다. 평소 여의도 대표 전략통인 이 대표가 아무런 계산도 없이 잠적을 택했을 리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대표는 칩거 중이 아니다. 당내 주요 인사들에게는 자신의 일정을 공유하고 있다. 김철근 정무실장, 김용태 청년최고위원 등과 부산에 동행했으며 이성권 부산시 정무특보와 정의화 전 국회의장을 만났다.

이 대표는 1일 전남 여수를 방문한 뒤 이날 새벽 여수엑스포여객선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2일 제주항연안여객선터미널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4‧3유족회와 간담회를 가졌다. 1일 이 대표를 만난 것으로 알려진 천하람 국민의힘 전남 순천갑 당협위원장은 2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 에 나와 “(이 대표가) 대선 승리를 위해 꼭 필요한 조건들이 어느 정도 관철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이 대표는 이대로 가선 대선에 이길 수 없다는 위기감을 크게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1일 오전 장제원 의원 지역구인 부산 사상구 당원협의회 사무실을 방문해 찍은 기념사진 ⓒ이준석 대표 측 제공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1일 오전 장제원 의원 지역구인 부산 사상구 당원협의회 사무실을 방문해 찍은 기념사진 ⓒ이준석 대표 측 제공

당내외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 대표가 ‘대선 패배’라는 시나리오를 가정한 후 움직이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평소 이 대표는 윤 후보 선거전략에 큰 불만을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2030세대와의 소통전략도 인사 철학도 부재하다고 평가했다는 것이다. 특히 이 대표는 윤 후보의 측근들을 경계해 왔다. 본인이 윤 후보를 도와 대선에서 승리하더라도 향후 윤 후보 측근들에게 밀려 자신의 당내 입지가 좁아질 상황을 이 대표가 염려했을 것이란 추측이다.

이에 이 대표가 윤 후보 측근들을 ‘수구 보수 정치세력’으로 선을 그은 뒤 내년 총선에서 새로운 보수 대안 주자로 자신이 나서거나 나아가 차기 ‘개혁 보수’ 대선 주자로서의 입지를 이번 기회를 통해 만들려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박상병 인하대 정책대학원 교수는 “당 대표가 당을 박차고 나간 상황으로 국민의힘 당원들은 상처를 입게 됐다. 슬기롭게 갈등을 조율하지 못했다는 당원들의 불만과 불신이 커진 상황”이라며 “다만 조금 더 길게 본다면 ‘강단있고 소신있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얻었다. 본인의 철학과 다르면 대선 후보라도 보이콧할 수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셈이다. 정치적으로 상당한 유산을 얻은 셈”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기사에서 인용한 조사는 채널A가 여론조사기관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지난 11월27일부터 29일까지 전국 유권자 1008명을 상대로 ‘누구에게 투표하겠는가’를 물은 결과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다. 조사는 유무선 전화면접으로 진행됐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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