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근무 北 공작원은 냉난방 기술자”
  • 이유준 북한전문저널리스트·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1.12.13 10:00
  • 호수 1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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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방송 등장했던 탈북 망명 공작 간부 김국성씨 국내 최초 인터뷰
“김영삼 정부 시절에 침투…공조 시스템 통해 유사시 독가스 살포가 임무”

김국성씨(62)는 북한군 정찰총국 대좌(대령) 출신이다. 김정은에 의해 장성택이 처형되자 2014년 한국으로 망명했다. 지난 10월 선글라스를 낀 채 영국 BBC와 한 인터뷰 방송이 세계적인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그는“1990년대 초 북한 간첩이 청와대에 근무했다”고 말했다. 그런 김국성씨가 국내 언론 최초의 시사저널 인터뷰에서 북한 공작원의 청와대 근무 상황을 추가로 소상히 밝혔다.

ⓒ시사저널 임준선
ⓒ시사저널 임준선

선글라스 벗고 서울 정착 8년 만에 북한 대남공작 실상 증언

김국성씨의 상황 설명은 BBC 인터뷰 내용에 대해 국정원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한 것에 대한 재반박 성격이다.

김국성씨는 시사저널에 “청와대와 국정원이 세계적 망신을 당할 수 있고, 국민의 규탄을 받을 만한 일이니 그렇게 발뺌하는 걸 십분 이해하지만 북한 공작원의 청와대 근무는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씨는“박명수로 알고 있는 이 사람은 1976년 한국으로 직파된 첫 부부 공작조 중 한 짝으로 김영삼 대통령의 청와대에서 근무하다 1994년 북으로 복귀했다. 이후 대남 자료의 총본산이라 할 정찰총국 소속 314연락소 10과(특수과)에서 일했다”고 밝혔다.

김국성씨는 “BBC 인터뷰 때 북한의 공작원이 청와대에 들어가 근무했다고 내가 말하니까 다들 넥타이 매고 일하는 비서관이나 행정관만을 생각하더라”면서 “박명수는 기술 업종, 그중에서도 공조 계통을 담당하는 일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냉난방을 담당하는 공조 기술자는 건물의 구조를 다 꿰고 있을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북한이 청와대를 밑창 나도록 다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유사시 공조 시스템을 통해 독가스 살포 같은 테러를 벌여 폭삭 내려앉힐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공로로 박명수는 평양 귀환 후 공화국 영웅칭호를 받았고, 문수동에 아파트도 배정받았다고 한다.

지난 10월 검은색 선글라스를 쓴 채로 BBC 인터뷰에 응한 탈북 자 김국성씨. 사진은 BBC 온라인판 뉴스 화면 캡처ⓒBBC 화면캡처

“황장엽 비서, 자연사하지 않았으면 대남총국이 암살했을 것”

1997년 한국으로 망명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를 암살하기 위한 북한 정찰총국의 구체적인 공작에 대해서도 김씨는 입을 열었다. 김국성씨는 “김정은이 후계자로 부상하던 시점인 2009년 2월 정찰총국이 처음 무어졌고(‘조직됐다’는 의미) 2009년 5월에 첫 번째 공작 임무로 황장엽을 살해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말했다. 김국성씨는 당시 베이징에 있다가 김영철 정찰총국장의 지시로 급히 평양에 들어갔는데 “김정은 대장 동지가 직접 황가(당시 북한은 황장엽 비서를 비하해 ‘황가’로 지칭했음)를 제끼라고 했으니 수행방안을 만들라”고 해 상무조(TF)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TF의 책임자는 김영철 정찰총국장이 직접 맡았다고 한다.

당시 ‘안개 작전’으로 이름 붙여진 암살 공작을 짜기 위해 정찰총국 5국장 김종빈(전 35호 실장), 부국장 조일우·김윤선·장복찬, 과장 리히령, 정치부장 김선희가 가담했다는 게 김씨의 증언이다. 2009년 11월 정찰총국 소속 공작원 2명이 탈북자로 위장해 한국에 잠입했다가 체포되는 일도 있었다. 북한의 시도는 이듬해 10월 황 전 비서가 심장질환으로 사망하면서 중단됐다. 김씨는 “황 비서가 그렇게 죽지 않았다면 결국 북한 공작조에 의해 암살당했을 것”이라며 “황 전 비서가 자연사하도록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는 게 김정은과 북한 공작부서의 확고한 입장이었다”고 말했다.

2013년 12월13일 북한 노동신문이 공개한 사진. 포승줄 묶인 장성택이 국가안전 보위부원들에게 잡힌 채 법정에 서있다.ⓒ연합뉴스

장성택 처형 뒤 신변 위험 느껴 서울로 망명

인터뷰에서 김씨는 ‘정찰총국 대좌’로 알려진 자신의 정확한 신분과 관련해 “정찰총국에서 대남 및 해외정보를 담당하는 5국의 부국장급으로 보면 맞다”고 설명했다. 김국성씨는 김책공업종합대 전자공학부를 졸업한 뒤 인민경제대학과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나왔고 곧바로 노동당 35호실과 작전부, 대외연락부, 정찰총국 등 4개 정보기관에서 종사한 정통 스파이다. 우리의 대령 계급에 해당하는 대좌 군사칭호는 김영철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2016년까지 총국장을 맡던 정찰총국으로 옮기면서 부여받았다고 한다. 김씨는 2014년 3월 부인과 딸을 데리고 체류지인 중국을 벗어나 서울로 망명했다.

김씨는 탈북하게 된 결정적 동기를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의 몰락 때문으로 설명했다. 김씨는 “장 부장과 30년 지기로 형, 동생 해온 사이인데 그의 처단을 접하며 내 운명도 같은 처지가 될 것이란 걸 절감했다”며 “장성택의 여독(餘毒)으로 간주된다면 평양으로 돌아가도 혈육과 친지들이 다칠 것이고,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는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다”고 당시 입장을 털어놓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고모부인 장성택은 김정은 집권 초기 후견인 역할을 하며 최고 실세로 떠올랐으나 2013년 12월 국가전복음모(북한 형법 60조) 등의 혐의로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즉시 처형됐다. 이용하 행정부 제1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 등 측근들도 죽거나 몰락했다.

김씨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에 걸쳐 특권과 특혜, 최상의 배려를 받았는데 조상 무덤이 있는 곳을 버리고 망명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정치적 파동을 겪으며 이런 선택을 하게 됐다”고 했다.

인터뷰는 12월4일 김씨가 일하던 서울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인근 한식당에서 3시간가량 이뤄졌고, 6일 시사저널 스튜디오에서 2시간30분 동안 추가로 진행됐다. 다음은 김씨와의 인터뷰 문답 주요 내용이다.

ⓒ시사저널 임준선

북한이 불법적인 마약 거래로 외화를 벌어들인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공작부서에 있으면서 개입하거나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오극렬 작전국장이 총괄한 마약 생산에 나는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마약 제조는 국제범죄지만 북한에서는 ‘공작’에 불과하다. 임무를 준다는 것 자체가 정치적 신임을 받는 것이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필로폰을 150kg 생산해 6개월 만에 450만 달러(우리 돈 53억원 상당)를 벌어들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친필 감사를 보낸 적도 있다. 중국에서 접촉한 4명의 한국인 마약 기술자를 북한에 들여보내 필로폰을 생산한 뒤 분배한 일도 있다. 내가 탈북한 뒤 조사 과정에서 이런 사실도 밝히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그들은 처벌을 받았다. 인간적으로는 그들과 가족분들에게 매우 미안하게 생각한다.”

천안함 폭침 도발은 북한 소행인가.

“그렇다. 2010년 3월26일 천안함 사건이 터진 지 두 달이 지난 2010년 5월 평양 만경대구역 특각에서 김영철 정찰총국장과 조일우 정찰총국 5국장 등과 만났다. 그때 김영철이 ‘대장 동지 지시로 천안함 작전이 대성공했다. 대장 동지 결단이 대단하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또 다른 1호 지시(김정은의 직접 명령)인 황장엽 암살을 꼭 성공시키자는 결의도 있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의 개입에 대해 아는 바 있나.

“공작원이나 전투원을 보내거나 할 상황이 아니라고 본다. 남한 내 고정간첩 등을 통해 보고를 받고 사태를 관망하는 수준 이상의 행동을 취할 필요가 없었다.”

탈북·망명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반응이나 평가는 어떠했나.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에 왔기 때문에 환대받았다. 한 국정원 간부가 ‘황장엽은 상징적 급수가 높고, 김국성 선생의 정보는 가치나 한국에 대한 공헌이 크다’고 말하더라.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고 자부한다.”

북한에서 여러 공작부서에서 일하며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배경은 뭔가.

“나는 평범한 집안의 자식이다. 다만 우리 부인이 박정순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의 조카다. 박정순은 김정은을 최고권력자로 만들기 위한 노동당 규약 개정 회의 때 직접 개정안을 읽은 사람이다. 김정은 후계구도 완성 세력의 핵심 중 하나이니 당연히 박정순에게 힘이 실렸다. 외동딸인 조카와 나를 쌍으로 맺어주었고 장성택에게 나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부인도 당 중앙위 간부부 부원으로 일해 북한 정권의 엘리트의 삶과 권력 생리에 밝은 편이다.”

왜 선글라스를 벗고 공개활동에 나서기로 결심했나.

“2019년 5월까지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 있다가 퇴직했다. 신분을 공개하기까지 고심이 많았다. 북에서 어떤 조직이, 어떻게 나를 해치려 들지 잘 알고 있으니 부인과 자식이 피해를 보면 어떻게 하나 하는 우려도 크다. 하지만 2500만 북한 인민이 김일성 세습체제에서 잿더미 무덤으로 되는 걸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해 결단했다.”

김국성씨는 시사저널 인터뷰에서 현재 한국에서 활약하고 있을 가능성이 큰 고정간첩에 대한 정보도 공개했다. 북한 정찰총국의 전신인 조선노동당 35호실 직파 여간첩이 10년 넘게 한국에서 암약해 왔다는 것이다. 그는 “노동당 35호실 직파 여성 간첩이 10년간 남조선에서 공작활동을 성과적(성공적)으로 벌이다 2013년 9월 평양으로 복귀해 20여 일 머무르다 재차 남파됐다. 이 사실은 재남파 당시의 정찰총국 5국 국장이던 조일우로부터 들었다”고 밝혔다.

2010년 10월10일 북한 평양에서 열린 조선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 퍼레이드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아들 김정은이 단상에서 지켜보고 있다.ⓒ
2010년 10월10일 북한 평양에서 열린 조선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 퍼레이드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아들 김정은이 단상에서 지켜보고 있다.ⓒ연합뉴스

“직파 여간첩 김남희, 10년 넘게 한국서 암약”

‘김남희’라는 이름을 쓰는 이 여간첩은 김일성대 물리학부를 졸업한 재원으로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수료했고 당시 나이가 50세였다고 김씨는 말했다. 김국성씨는 당시 베이징에서 공작활동을 수행 중이었으나 업무차 평양에 들어갔고, 친분이 있던 조일우 국장과 만났을 때 여간첩 직파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고 기억했다. 당시 이 여간첩은 평양의 동북리초대소에 사흘간 묵으며 혁명사상과 사격술 등 공작교육을 받았고, 담당 지도원은 5국 부과장 주철문이었다고 말했다. 여간첩은 또 김일성대학을 다니는 아들과 상봉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김남희의 평양 소환은 김정은 체제 출범에 따른 새로운 대남공작 지침 하달 및 사상 교양이 목적이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또 “여간첩이 재남파됐다는 사실을 한국에 망명한 직후 조사받는 과정에서 국가정보원에 알렸다”며 “국정원이 그녀를 체포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검거되지 않았다면 지금도 남한 내에서 활동 중일 가능성이 100%”라면서 “북한도 20년 가까이 박아둔 공작원의 존재가 이렇게 드러나는 걸 보면서 질겁할 것”이라고 했다.

 

“살림살이 한심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니 후회 없다”

대외연락부 6년, 작전부 10년, 35호실 5년, 정찰총국 5년. 북한에서 이례적으로 공작부서를 두루 섭렵한 김국성씨의 한국 생활은 팍팍하다. 보수정부 시절 그의 망명을 두고 박근혜 대통령이 반색을 했다고 하지만 이후 관심 밖으로 밀렸다.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서 일하다 2년 전 퇴직한 이후로는 수입이 끊겼다. 김씨는 “사는 게 한심하지요. 어떻게 앞으로 나갈지 아뜩합니다”라고 말했다.

가끔 북한에서의 생활을 떠올리기도 한다. 평양의 고급 아파트에는 가족들이 살았고, 공작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김씨는 150평 규모의 특각(별장형 주택)에서 지냈다. 덴마크산 사우나 시설과 당구장이 갖춰진 곳이다. 동남아뿐 아니라 독일·체코·폴란드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북한에서는 꿈꾸기 어려운 일이다. 중국에서 일할 때는 부인과 딸을 동반하는 특권도 누렸고, 탈북 때도 가족이 함께 한국행을 택하는 행운을 얻었다.

김국성씨는 김일성에서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에 걸쳐 개별선물을 받을 정도로 자신에 대한 북한 정권의 신임이 두터웠다고 말한다. 그는“잘살았다. 북에서 특권에 특수를 누려놓고 뭔 타발(불평)이냐고 비판할 수도 있다”며 “그렇지만 대한민국의 안보에 말할 수 없는 큰 기여를 했다는 점은 자부한다”고 했다. 모종의 내밀한 대북 정보 제공을 통해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암시다. 김씨는 “내가 선택한 길이니 후회는 없다”면서 “앞으로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는 일에 여생을 바칠 것”이라고 각오를 드러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는 그는 “70년 넘게 ‘인민을 위해 복무함’이란 구호를 내세웠지만 위선에 그쳤다. 인민이 잘 먹고 잘살게 하는 데 헌신해 달라. 지금의 방식은 독재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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