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용병 조직 ‘바그네르’, 푸틴 대신 전쟁 나서나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12.28 07:30
  • 호수 1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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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분쟁 지역서 러시아의 비밀작전·공작 수행하며 폭력과 잔혹 행위 일삼아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 나설 것이란 관측 나와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서방의 갈등이 한창 고조 중인 12월13일, 브뤼셀의 유럽연합(EU) 본부발로 AP통신의 긴급뉴스가 타전됐다. 이날 EU가 러시아 민간군사기업(PMC)인 ‘바그네르 그룹’(영어권에선 ‘와그너 그룹’으로 명칭)에 대해 중동‧아프리카‧우크라이나에서 벌인 폭력 조장과 인권탄압을 이유로 경제 제재를 가했다는 내용이다. 

EU는 2014년 바그네르 그룹을 설립한 드미트리 우트킨을 포함한 8명과 이 조직과 연관된 시리아 에너지 업체 3개의 해외자금을 동결하고 구성원의 여행을 금지했다. 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인 주제프 보렐은 “바그네르는 러시아가 그간 벌여온 하이브리드 전쟁을 수행했다”며 “전 세계 수많은 나라에서 위협과 불안을 조장해 왔다”고 지적했다. 

EU는 별도 성명에서 “바그네르는 용병을 모집·훈련해 전 세계의 분쟁 지역에서 폭력을 부추기고 천연자원 약탈과 민간인 위협을 자행했으며 인권법을 포함한 국제법을 어겼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리비아‧시리아‧우크라이나(돈바스)·중앙아프리카공화국(CAR)을 포함한 활동 지역에서 안정을 깨뜨리고, 고문은 물론 재판 없는 약식‧임의 처형과 학살을 자행했다”고 적시했다. 프랑스와 독일은 같은 논리로 바그네르의 아프리카 말리 활동도 비난했다고 독일 국제방송 DW가 보도했다. 

러시아군이 12월14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국경 인근 로스토프 지역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AP 연합

푸틴과 절친인 재벌 프리고진이 물주 역할

주목할 점은 EU가 바그네르를 “러시아의 (비밀 작전‧공작) 대리인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지적한 점이다. 정부가 개입하기 힘든 지역이나 상황에서 바그네르를 보내 정규군이 벌이기 힘든 탈법‧불법‧잔혹 행위를 일삼았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러시아의 세르게이 라바로프 외교부 장관은 “이 민간기업은 말리 과도정부의 초청을 받아 합법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러시아 정부는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바그네르의 진면목은 설립자와 자금줄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설립자 우트킨은 러시아군 군사정보국(GRU) 스페츠나츠(특수임무부대) 중령 출신의 정보·공작 전문가다. 스페츠나츠는 러시아의 정보‧공작기관인 GRU와 연방보안국(FSB)‧해외정보국(SVR)‧내무부(MVD) 휘하로 각각 나뉘어 기관별 대외공작‧대테러‧보안경비 등 임무를 수행한다. 바그너는 우트킨의 GRU 스페츠나츠 시절 호출명(암호명)으로 알려졌다.

바그네르에 자금을 대는 물주인 러시아 올리가르히(과두재벌)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문제적 인물이다. 프리고진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같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으로 절친한 사이로 알려졌다. 네덜란드에 본부를 둔 탐사보도 언론인 조직인 벨링캣에 따르면 프리고진은 강도‧사기 전과가 있으며 소수민족 여성들에게 강제로 성매매를 시킨 의혹도 받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고급 식당과 함께 러시아 대통령궁인 크렘린에서 푸틴이 여는 귀빈 만찬을 제공하는 출장요리 업체도 운영한다. 이 때문에 ‘푸틴의 셰프’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권력자 입맛에 맞는 음식을 준비하고 미리 맛보면서 안전을 확인하는 ‘기미상궁’에 비교될 정도로 신임을 받는다는 의미다. 

벨링캣은 프리고진이 러시아가 필요한 온갖 비밀 업무에 개입하는, ‘권력의 비밀스러운 손’으로 분류된다고 지적했다. 정부 대신 다양한 ‘검은 작전’을 수행해 연방정부가 “우리는 관련없다”고 주장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지적했다. 바그네르는 거칠고 은밀한 특수부대가 민간기업으로 ‘신분’을 세탁하고, 러시아의 이익에 필요한 비밀 작전에 앞장서온 것이다.

러시아와 연계된 용병 조직으로 알려진 ‘바그네르 그룹’의 대원들ⓒ미국 싱크탱크 제임스타운재단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압박에 선발대 역할

주목할 점은 프리고진이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된 미국의 2016년 대선과 트럼프 임기 중 이뤄진 2018년 중간선거에 개입하려고 시도한 혐의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소셜미디어 등에 미국 사회를 분열시키고 반미주의를 고양하는 가짜뉴스를 대거 퍼뜨리면서다. 그는 인터넷 여론을 러시아에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201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설립했던 ‘인터넷 리서치 에이전시(IRA)’를 앞세워 미국 선거에 영향을 끼치려고 시도한 혐의를 받는다. 

미국 CNBC 보도에 따르면 미국 대배심은 2018년 2월16일 IRA를 포함한 세 군데의 러시아 법인‧기관과 13명의 러시아 국적자에 대해 미국의 선거와 정치 절차에 관여하려고 미국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를 결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의 해외 경제 제재를 담당하는 재무부의 해외자산통제국(OFAC)은 2019년 10월 프리고진을 특별지정 제재 대상(SDN)으로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미국의 팩트체크 매체인 ‘폴리그래프인포’에 따르면 OFAC은 프리고진 관련 인사 7명과 그의 개인재산인 3대의 항공기, 1척의 요트를 제재 대상으로 지정했다. 폴리그래프인포는 미국 행정부가 재정을 돕는 미국의 소리(VOA)와 의회가 지원하는 자유유럽방송/라디오리버티(RFE/RL)가 2016년 공동 설립해 러시아 정보기관과 IRA 등이 온라인에 올리는 역정보‧가짜뉴스에 대응하는 팩트체크를 수행한다. 

벨링캣과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2020년 8월 프리고진이 러시아 국방부 및 군 정보기관인 GRU와 통합작전을 벌여왔다고 보도했다. 그가 세운 바그네르 그룹이 러시아가 원하는 비밀공작과 하이브리드 전쟁을 수행한 대리인이라는 이야기다.

주목되는 점은 바그네르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압박 선발대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는 사실이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과정에서 분리 주민투표를 주도한 정체불명의 민병대는 바그네르 요원으로 의심받는다. 우크라이나 동부의 러시아계 밀집 지역의 행정기관을 점거하고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돈바스 전쟁’을 주도한 무장대원들도 같은 소속으로 지목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2022년 초 군사작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바그네르를 앞세워 우크라이나에서 다양한 사전 공작을 이미 벌이고 있다고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막겠다는 푸틴의 정치적 의지를 실현하는 은밀한 공작대로서 말이다.

바그네르는 언론인들에게 잔혹하게 대응해 ‘자유언론의 적’으로도 분류된다. 가디언에 따르면 2018년 7월 중앙아프리카공화국(CAR)에서 바그네르의 활동을 취재하던 러시아 독립언론의 기자 3명이 괴한에게 살해된 사건이 대표적이다. 영상물 ‘러시아인 용병’을 제작하다 숨진 3명의 러시아 기자가 반푸틴 망명객인 미하일 호도르콥스키가 지원하는 탐사보도 조직과 연관됐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호도르콥스키는 1996년 민영화된 거대 석유기업 유코스의 소유주였지만 정치적 야망을 드러낸 뒤인 2003년 조세포탈‧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돼 2005년 9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소치동계올림픽을 두 달 정도 앞둔 2013년 12월 사면을 받고 석방돼 스위스로 망명했다. 남은 재산을 바탕으로 자유언론 지원 등 반푸틴 활동을 벌여왔다. 기자 살해는 호도르콥스키에 대한 경고로 해석된다. 바그네르의 칼날은 우크라이나는 물론, 전 세계적 위협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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