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소련 부활 꿈꾸는 푸틴의 야망 ‘노골화’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1.20 11:00
  • 호수 1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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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예부대로 우크라이나 에워싸고, 카자흐스탄엔 공수부대 파병 
러시아의 취약한 경제력이 딜레마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1월초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이라는 두 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마주했다. 미·중 양강 구도 상황에서 국제정치의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한 푸틴 대통령에게 이런 상황은 기회이자 부담이라는 양면의 칼이다.

러시아는 지난해 말 10만 명이 넘는 정예부대를 동원해 우크라이나를 북·동·남 삼면에서 포위하고 침공을 위협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1월2일부터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진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에 2500명 규모의 공수부대를 파견했다. 러시아는 서남쪽의 우크라이나 국경엔 정예 기갑부대를, 동남부의 카자흐스탄에는 공수부대를 파견해 두 개의 전투에 나섰다.

1월10일 러시아의 세르게이 랴브코프 외교부 차관과 미국의 웬디 셔먼 국무부 부장관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나 우크라이나 사태를 ‘논의’했다. 랴브코프는 국경을 맞댄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금지를 보장하라고 줄기차게 요구했고, 셔먼은 “원래 가능하지 않은 것에 반대한다”는 ‘맹물’ 답변으로 일관했다. 러시아는 “우리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이유가 없다”며 미국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AP 연합
RU-RTR 러시아 텔레비전이 제공한 영상에서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1월6일 카자흐스탄 공항에 도착해 군용기에서 내리고 있는 장면이 포착됐다.ⓒAP 연합

옛 소련 이탈 국가에 대한 영향력 복원 나서

1월2일 가스 가격 상한선 폐지에 따른 폭등으로 카자흐스탄 전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는 6일 러시아군을 비롯한 평화유지군이 파견되면서 11일 진정 국면을 맞았다. 러시아가 주도하는 집단안보조약기구(CST) 회원국인 아르메니아·벨라루스·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 등이 2002년 창설 이후 처음으로 공동 행동에 나섰다. 적의 침공이 아닌 내부 소요 사태에 개입해 파병하는 선례를 남겼다. 카자흐스탄은 러시아 공수부대가 나선 뒤 진정세로 돌아섰지만, 사망자 숫자가 164명으로 껑충 뛰었다.

온라인 반정부 활동으로 시작한 시위는 거리 시위와 파업을 거쳐 폭동과 방화로까지 이어졌다. 그 바탕에는 양극화에 따른 경제 불평등, 나자르바예프 전임 대통령 일가 등 지도자들의 부패, 독재와 인권유린, 경찰의 잔혹 진압 등이 깔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여기에 더해 에너지 가격 인상이 전기요금 부담으로 연결돼 카자흐스탄 국민의 주요 돈벌이 수단인 비트코인 채굴이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결국 토카예프 대통령은 아스카르 마민 총리와 각료를 해임하고, 나자르바예프를 국가안보회의 의장직에서 밀어냈다. 사건의 발단이 됐던 가스 가격 인상은 앞으로 6개월간 일정 물량을 이전 가격으로 공급하는 선에서 무마했다.

이제 푸틴의 시간이 시작됐다. 푸틴 대통령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판알을 튕기며 옛 소련에서 이탈한 지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복원하는 전략 구상에 들어가는 듯하다. 눈여겨볼 점은 카자흐스탄의 전략적 가치다. 2019년 기준으로 하루 141만 배럴의 원유를 수출하는 세계 10위의 석유 수출국인 데다 그해 세계 최대의 우라늄 생산국에 올랐던 자원 대국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어 지정학적인 이점도 크다. 러시아와 중국 양국에 원유와 가스를 공급할 수 있으며, 실제 그런 파이프라인을 건설 중이다.

이 때문에 푸틴 대통령이 미국·중국을 포함한 유엔평화유지군이 현지에 파견되는 상황을 피하려고 파병을 서둘렀다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은 중앙아시아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 가까운 이 지역에 발판을 마련하려고 공을 들였다. 결국 2001~14년 카자흐스탄 동쪽의 키르기스스탄에 미군 공군기지를 운영했지만, 러시아의 압박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환경의 변화로 기지를 반환했다.

ⓒAP 연합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월10일 모스크바 외곽 노보-오가료보 관저에서 화상회의를 통해 카자흐스탄 등 집 단안보조약기구 국가 정상들과 집단안보회의 임시회의에 참석하고 있다.ⓒAP 연합

러시아군 주둔 가능성에 카자흐스탄 ‘긴장’

러시아는 자신의 오랜 터전이던 중앙아시아에 진출하려는 미국을 뒷마당으로 살금살금 들어오려는 늑대로 여겼다. 푸틴이 러시아가 언젠가 세력을 회복하면 다시 중앙아시아를 지배해 옛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넓은 영토에 이념과 군사력을 앞세워 서방과 맞서며 세계를 양분했던 과거 소련 시절에 대한 향수와 러시아 민족주의의 결합이 배경일 수 있다. 소비에트와 노스탤지어를 합친 ‘소스탤지어’다.

중앙아시아는 러시아와 미국뿐 아니라 중국도 노린다고 볼 수 있다. 중앙아시아는 지정학적으로 중국의 일대일로 추진에서 핵심 지역이다. 중국은 카자흐스탄과 1533km의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철도나 도로 등 육상 신실크로드가 서방으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정학적 급소이기 때문이다.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에게 카자흐스탄은 자신이 강력하게 추진하는 ‘일대일로’ 구상을 처음 공개한 인연이 있는 지역이다.

시 주석은 2013년 9월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의 나자르바예프대학에서 ‘육상·해상 신실크로드’ 구상을 처음으로 밝혔다. 이듬해인 2014년 11월10~11일 베이징에서 열린 제26차 APEC 정상회의에서 이를 제창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푸틴 대통령이 국제정치에서 러시아의 핵심이익을 잠식하는 실질적 경쟁국으로 미국이 아닌 중국을 설정했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게다가 중국은 1991년 12월 무너진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카자흐스탄에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독립 직후 카자흐스탄 수도였던 알마티는 중국 국경과 300km도 떨어져 있지 않다. 강력한 배후 세력이던 모스크바가 일시 사라진 카자흐스탄에 이는 지정학적 재앙이었다. 이에 나자르바예프 당시 대통령은 1997년 수도를 알마티에서 1000km나 북쪽으로 떨어진 아크몰린스크로 옮기고 이듬해 아스타나로 개명했다. 러시아 국경에서 불과 300km 정도 떨어진 이곳은 러시아계가 많이 거주한다. 러시아계는 카자흐스탄에서 전체 인구의 18.9%를 차지해 68.5%인 카자흐족 다음이다. 아스타나는 2021년, 지난 2019년에 물러난 나자르바예프의 이름을 따서 누르술탄으로 바뀌었다. 이번 사태로 이름이 다시 바뀔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런 카자흐스탄을 러시아가 장기적으로 합병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다. 이미 카자흐스탄 소요 사태로 출동한 러시아 공수부대가 아예 눌러앉아 세력 확대나 합병을 기도할 우려가 국제사회에서 제기되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토카예프 대통령이 1월11일 “테러집단의 쿠데타 시도는 실패했다”고 선언하고 “(러시아가 주도하는 CSTO 소속의) 평화유지군은 주요 임무가 마무리됐으며 이틀 안에 철수할 것”이라고 서둘러 밝힌 이유다. 이 과정에서 카자흐스탄 소요 사태가 사실은 토카예프와 나자르바예프 사이의 ‘배반의 장미 전쟁’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러시아군을 부른 것이 카자흐스탄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놓고 중국·미국과 삼각 경쟁을 하게 됐다. 19세기 러시아와 영국이 중앙아시아 패권을 둘러싸고 격돌했던 ‘그레이트 게임’의 21세기판 재현이다. 러시아와 가까운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내부적으로 불안정해지거나, 미국이나 중국과 가까워지는 것은 푸틴에겐 정권 안정과 직결될 수 있다. 푸틴은 러시아 국내 정치에서 옛 소련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진군하는 지도자상으로 비춰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장기 집권과 편법 정권 연장, 그리고 낮은 경제 성적표에도 계속 높은 지지율로 당선한 원동력으로 평가받는다.

ⓒEPS 연합
미국 국무차관 웬디 셔먼(왼쪽)과 러시아 외무부 차관 세르게이 랴브코프가 1월10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나 우크라이나 사태 문제에 대해 서로 팽팽한 입장차를 드러냈다.ⓒEPS 연합

美·서방이 경제제재 강화하면 재정 큰 타격

문제는 러시아의 국력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서방 정보전문가는 우선 이번에 러시아가 민간인을 상대로 시위 진압·사이버전을 전개하는 특수부대가 아닌, 적을 섬멸하는 것이 임무인 공수부대를 카자흐스탄에 파병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수부대는 소요·테러 상황에서 선전전 등 다양한 전술을 활용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조직되고 훈련받은 부대다. 하지만 러시아의 특수부대는 시리아와 리비아에 파견돼 있어 추가로 파병할 여력이 부족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러시아에 남아있는 특수부대 요원들은 조만간 훈련을 마치고 시리아·리비아의 일부 파병 인력과 교대해야 하므로 파병이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경제와 재정도 문제다.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대립 중인 미국을 비롯한 서방진영에서 경제제재를 강화할 경우 루블화 가치가 급락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 경제가 나빠지고 시스템이 혼란을 겪을 경우 국내에서 불만을 가진 반푸틴 세력이 소요를 일으킬 가능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푸틴이 이런 위험요인을 신속히 제거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이번 카자흐스탄 사태로 푸틴은 처음으로 두 개의 전선에 병력을 파병하는 상황에 직면했지만, 양쪽에 보낸 군사력의 종류는 사뭇 다르다. 우크라이나 국경을 에워싼 러시아군은 엘리트 정규군이다. 러시아는 1994년, 2002년, 2008년 세 차례 군 개혁을 통해 군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현대화했다. 그 결과 러시아군은 20만 명을 동원할 경우 병력의 90%를 48시간 안에 배치할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나토는 10만 병력을 동원하는 데 6개월이 걸린다는 비관적인 추정이 나온다. 푸틴이 믿는 러시아의 비수다.

이런 상황에서 속전속결로 이뤄진 푸틴의 카자흐스탄 공수부대 파견은 우크라이나에 힘을 집중하기 위한 전술로 볼 수 있다. 그동안 갈고닦아온 군사력 등을 바탕으로 러시아가 과거 소련의 영역으로 세력을 확대할 절호의 기회가 이렇듯 새벽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러시아의 총체적인 국력은 아직 역부족인 셈이다. 푸틴이 마주한 딜레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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