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예술인가, 정치 선전물인가
  • 반이정 미술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1.30 12:00
  • 호수 1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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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철만 되면 정치화되는 예술
‘후진 예술’ 오해 안 받으려면 한 겹짜리 해석 피해야

예술과 정치는 무관한 영역으로 구분되며 예술이 정치성을 일절 띠지 않는 경우가 다수를 차지한다. 그렇지만 둘이 결합할 때 발생하는 시너지 효과며 큰 수요 때문인지, 정치는 예술을 이용하고 예술은 정치를 이용한다. 예술을 체제 선전 도구로 쓰는 중국이나 북한 같은 공산국가의 전체주의 예술은 정치적이며, 시장경제 체제를 비판하는 자유주의 국가의 저항 예술 역시 정치적이다. 선전 혹은 저항의 도구로 쓰이는 예술은 미술, 문학, 만화, 영화, 음악 등 장르를 가리지 않지만, 신속한 파급력을 보장하는 형태로 진화했고, 전문 예술가 집단에서 정파성이 강한 비전문가로 제작 주체가 변모된 점도 있다. 이런 변화는 예술적 완성도나 윤리적 정당성보다, 프로파간다를 앞세운 정치 선전물로의 전락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바마 전 대통령의 2008년 대선 포스터
오바마 전 대통령의 2008년 대선 포스터

오바마 포스터, SNS 통해 확산되며 큰 효과

전쟁 같은 비상시국 또는 평시여도 선거철이나 정치 양극화가 극심한 때 예술은 정치화된다. 아니 정치가 예술을 도구로 삼는다는 해석이 맞겠다. 2008년 미국 대통령선거 때, 버락 오바마의 홍보 담당자는 거리미술가 셰퍼드 페어리(Shepard Fairey)에게 오바마의 선거 캠페인 포스터를 의뢰했다. 존 F 케네디 사진과 5달러 지폐에 인쇄된 에이브러햄 링컨의 얼굴 각도에서 영감을 받아, 오바마의 얼굴을 간명한 색채로 표현하고 가슴팍에 HOPE(희망)란 단어를 새긴 포스터는 인쇄물과 별개로 이미지 파일이 소셜미디어로 확산돼 깊은 각인 효과를 남겼다.

2022년 한국 대통령 선거운동은 상대 후보를 비방하는 흑색선전의 난립상이 계속되면서, 정파성 강한 비전문가들이 정치 예술을 선동의 도구로 생산하기에 최적의 조건이 마련됐다. YTN 웹사이트에 ‘아트만두의 인간대백과사전’이라는 캐리커처를 연재하는 시사만화가 아트만두는 1월말 자신의 책 출간에 맞춰 개인전을 열었다. 캐리커처는 인물을 과장되게 풍자하는 그림을 뜻한다. 2차대전 전후 베를린에서 활동한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가 포토몽타주 기법으로 히틀러의 정책 실패와 파시즘을 희화하거나, 유대인 일러스트레이터 아서 식(Arthur Szyk)이 히틀러를 야유의 대상으로 비튼 작업이 구시대 정치 캐리커처의 전범으로 꼽힌다. 한데 시사 풍자의 양해라 해도 아트만두가 줄곧 내놓은 캐리커처는 정치 풍자물보다 정파적인 편향성까지 초과한 캐리커처로 채워져 왔다. 그의 인물 풍자화를 좋아하는 이들이 소셜미디어에 공유한 이미지 파일을 정치 지향점과 무관한 누군가는 만나게 될 게다.

물론 창작자도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여권 인사를 선인으로, 야권 인사를 악인으로 표현한 단순 이분법적 캐리커처에선 상상력의 빈곤과 대상을 향한 일방적인 악감정만 오롯이 남게 된다. 풍자의 미덕도 미적 전복도 없이, 반(反)여권 인사를 골라 맥락 없이 눈매와 입가를 추악하게 일그러뜨리거나 비열하고 나약한 겁쟁이처럼 포샵질한 캐리커처가 어떠한 생산적인 효과를 남길지 알 수 없다.

아트만두 캐리커처ⓒ페이스북 캡쳐
아트만두 캐리커처ⓒ페이스북 캡쳐

이처럼 유력 대선후보에 반대하는 유권자의 공분을 등에 업고 후보와 관련 인물들을 인격적으로 비하하는 캐리커처는 그를 반대하는 진영엔 값싼 조롱감를 던져주는 효과는 줄 테지만, 그 같은 쾌감은 예술이 할 일도 아니며, 예술을 시답잖은 키치로 실추시키는 일이다. 대선후보들의 공약과 정책 경쟁이 실종된 비정상적인 대선 캠페인의 연장에서, 아트만두의 시사 캐리커처나 그의 전시회는 정치를 다루는 미술이 아니라 미술을 도구로 정치를 하는 거라 하겠다.

친민주당 성향 배우 김의성과 주진우 기자의 감독 데뷔작으로 소개된 영화 《나의 촛불》은 대선을 한 달도 안 남긴 2월10일 개봉한단다. 영화감독에 데뷔한 주진우와 같은 나꼼수 출신인 김어준은 줄곧 세월호의 고의 침몰설을 주장해온 인물이다. 자신의 음모론을 바탕으로 2018년 영화 《그날 바다》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날 바다》의 시나리오가 된 김어준의 세월호 고의 침몰설은 근거도 논리도 없는 사실 무근으로 판명 났지만 44억원 넘는 매출을 그에게 안겼다. 영화 비전문가인 어떤 언론인에게 영화는 파급 효과를 장담해 주는 정치 예술, 정확히는 선전 도구일 게다.

“박근혜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을 손석희를 필두로 여러 유력 정치인에게 던지며 시작하는 《나의 촛불》은 2014년 세월호 침몰과 2016년 최순실 국정 개입에 이어 2017년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탄핵 사건과 정권교체 과정을 몸통으로 다룬 친여권 다큐 영화다. 인터뷰 대상엔 이제는 세상에 없는 박원순과 정두언의 생전 대담까지 담은 만큼, 대선 한 달 전에 내놓을 이 영화는 2016년 시위대의 기억을 집결시키는, 오랜 계획하에 제작된 정파성이 앞서는 영화일 수 있다.

좋은 예술과 후진 예술을 가르는 기준이야 여럿이겠으나, 한 겹의 해석만 포갠 작품을 나는 후진 예술이라고 주변에 말해 왔다. 작품의 의미가 단번에 풀이되는 작품 말이다. 쉬운 예로 광화문광장에 세워진 이순신상이나 세종대왕상은 그것의 지시 대상이 각각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그 이상 이하도 아닌 점에선 한 겹의 해석만 허용된 작품일 수 있다. 그렇지만 거기에 조형적 완성도, 기존에 제작된 여느 인물 동상과의 차별성, 고증적 가치 등 새로운 겹이 더해지면서 작품을 쉬이 평가하지 못하게 된다.

ⓒ(유)주기자 제공
다큐 영화 《나의 촛불》의 한 장면ⓒ(유)주기자 제공

좋은 예술과 후진 예술의 기준은?

정치 풍자물로서 아트만두의 캐리커처가 한 겹의 해석물, 즉 선동 정치물의 혐의에서 벗어나려면 정파가 다른 두 인물군을 맥락 없이 선악 이분법으로 나눠, 특정 세력의 ‘좋아요’ 세례를 받는 것 이상이 필요하다. 도합 1600만 명이 참여했다는 2016년 광화문 촛불시위를 대변했다는 다큐 영화 《나의 촛불》이 한 겹의 해석물(선동 정치물)의 혐의에서 벗어나려면, 촛불시위에 참여한 1600만 명의 머릿수 이상이 필요하다. 대규모 집단행동 이후의 세상이 그 이전보다 제대로 작동했다는 논거를 대야 한다.

“예술은 정치적 변화의 수단으로 무용하다”는 견해도 많다. 미술평론가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는 예술을 통해 세상을 이롭게 바꾸려는 예술 행동주의가 실패하는 이유로, 예술 행위가 조형적 볼거리를 탑재한 탓에 실효가 적은 점을 들었다. 조형적 완성도는 차치하고 일방적인 정신 승리에 취한 정치적 예술작품들은 어떨까? 나는 평소 그 같은 작업을 통틀어 ‘정의감이 충만한 후진 예술’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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