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 논의에 정작 우크라이나는 빠져 있다
  • 오은경 동덕여대 교수 (유라시아투르크연구소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2.12 14:00
  • 호수 168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대국들의 기 싸움에 전쟁 공포 떠는 우크라…서방·러시아 어느 쪽에도 안전 보장 담보 못 받아

[오은경 동덕여대 교수 기고]

미국과 러시아의 기 싸움 속에 일촉즉발 우크라이나 전쟁 가능성이 증폭되고 있다. 올림픽이 열리는 지금 지구촌은 전쟁 공포에 떨고 있다. 제3차 세계대전의 위협을 느끼는 세계인들을 향해 핵보유국인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전쟁이 났을 때 승자는 없다”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동진(東進) 중단과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전면 금지에 대한 약속을 요구하는 푸틴은 좀처럼 물러설 기미가 없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걸까.

ⓒAP 연합
우크라이나 국가방위군이 2월4일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인근에서 전쟁 대비 훈련을 하고 있다.ⓒAP 연합

“세계 최강 미국은 없다” 푸틴의 자신감

우선 푸틴은 과거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합병이나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의 홍콩 민주주의 탄압, 이어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군 철수 등을 통해 미국이 사실상 국제사회 부동의 원톱 리더십을 상실한 것으로 판단했다.

이번 사태를 착실히 준비해 왔다는 것도 푸틴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2014년 크림반도 병합 이후 가해진 서방의 경제제재를 경험하면서 ‘준비 학습’을 마쳤고, 원유와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하면서 외환보유액이 늘어난 것도 호재였다. 전체 부채 규모도 외환보유고의 3분의 2 이하로 유지 중이다. 곳간이 두둑한 러시아로선 미국이 경제제재를 가한다 해도 경제가 작동할 수 있는 최소 방어 시스템은 구축한 셈이다. 특히 미국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달러 중심에서 벗어나 유로화·위안화·금 등으로 다변화했다. 현재 러시아 전체 외환보유고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16%에 불과하다. 겨울철에 러시아의 천연가스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유럽을 향해 천연가스를 무기화해 협박할 수 있고, 만일 유럽에 팔지 못한다면 시진핑 주석과 손잡고 천연가스 유럽 수출 손실액을 중국에서 메운다는 계산도 하고 있다.

여기에 헌법까지 뜯어고치며 재집권을 노리고 있는 푸틴에게 국민이 느끼고 있는 피로감, 오랜 경제제재와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악화를 극복해야 하는 모멘텀도 필요하다.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 후 한때 80%까지 치솟았던 푸틴의 인기를 회복하려면 지금이야말로 원하는 것을 얻어내야 할 적기임에 틀림없다. 푸틴은 인문학적 대의명분 마련도 잊지 않았다. 9세기부터 13세기 몽고 침입 이전까지 존재했던 ‘키예프공국’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공유하는 역사다. 하나의 뿌리를 강조하면서 우크라이나 합병의 필요성을 천명하는 자신의 역사관을 공표했다. 푸틴은 이렇게 단계적으로 이 사태를 준비해 왔다.

푸틴의 도발에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인접국에 병력을 배치하면서 러시아를 자극했다. 가장 강력한 경제제재 수단인 스위프트 시스템에서 러시아를 완전 배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은행의 거래가 전면 차단될 것이므로 자칫 국가 존립 자체를 위협받을 수도 있다.

100% 신뢰할 수 없다는 회의적인 눈초리로 미국을 지켜보던 유럽 각국 리더들도 사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각자 노선에 맞는 행보를 시작했다. 영국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고,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 병력을 파병하며 처음부터 미국 편에 줄을 섰다. 반면 절대적으로 러시아 가스에 의존하는 독일과 프랑스는 엉거주춤하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양쪽 눈치만 살피다가 최근 외교전에 돌입했다. 독일 숄츠 총리는 미국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다면 ‘노르트스트림2’는 없다”고 일침을 가하자 그제야 노르트스트림2도 중단할 수 있다면서 강경 태세로 입장을 전환했다. 노르트스트림2는 우크라이나를 거치지 않고 러시아에서 천연가스를 수입하기 위해 독일이 막대한 예산을 들여 양국을 관통하도록 직접 설치한 파이프라인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AF 연합

‘핀란드화 해법’ 제시, 묘수 될 수 있을까

올해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는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2월7일 푸틴을 만나 ‘핀란드화(Finlandization) 해법’을 제안했다.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지 않는 대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서방과 교류할 수 있는 독립적 지위를 보장해 준다는 내용인데, 최악의 군사충돌은 일단 막고 보자는 취지다. 즉 친러 성향은 유지하면서 서방과는 경제적 교류를 하고, 양측으로부터 주권을 안정적으로 보장받는 방식인 셈이다. 쉽게 말하면 약소국이 인접한 강대국의 눈치를 살피고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알아서 기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실제로 과거 냉전 시절 러시아는 겉으로는 핀란드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국경을 접하고 있는 핀란드 내정에 사사건건 개입했고, 핀란드 또한 자국 대통령 후보까지 알아서 교체할 정도로 러시아 눈치를 살폈던 바 있다.

지정학적으로 핀란드와 비슷한 처지라 해도 역사적 경험이 다르고 러시아라면 치를 떠는 우크라이나에 이 제안은 너무 가혹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전쟁을 지혜롭게 피해 갈 수 있는 뾰족한 묘안이 달리 있는 것도 아니다. 답답하고 암울한 현실이지만 우크라이나가 다른 선택지를 찾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냉정하게, 우크라이나가 목숨을 걸고 전쟁을 불사한다고 해서 나토 가입국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러시아와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려는 유럽 국가들은 우크라이나를 완충지대로 두고 싶어 한다. 특히 러시아와 천연가스로 깊게 얽혀 있는 프랑스와 독일은 속으로는 러시아의 눈치를 보고 있어 선뜻 우크라이나 손을 들어주기도 어렵다. 우크라이나가 지금 당장 나토 가입을 미룬다 해도 이번 사태가 쉽게 해결되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드네프르강을 중심으로 친서방·친러로 갈라진 우크라이나 동·서부의 동상이몽도 장애요소다.

역사를 돌이킬 수는 없지만 우크라이나의 잘못된 운명은 어쩌면 핵무기를 전면 폐기했던 부다페스트 각서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구소련이 해체되면서 우크라이나가 핵보유 3위국 지위를 포기하고 순순히 러시아에 핵을 반납했던 결과는 참혹했다. 결국 30년 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으로 이어졌고, 호시탐탐 우크라이나를 노리는 러시아의 공포 속에 떨게 됐다. 당시 우크라이나에는 핵무기 폐기에 극렬히 반대하는 내부 세력들의 투쟁이 있었고, 가까스로 1994년에야 미국과 영국, 러시아를 대상으로 주권과 국경선 보장을 골자로 하는 부다페스트 안전보장조약을 체결했다. 핵무기 권한을 완전히 포기했지만 당시 조약의 내용은 엄밀하게 국경선 보장에 대한 “확인(assurance)”이었을 뿐 “보증(guarantee)”의 의미는 아니었다.

때문에 러시아의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확답을 원했던 우크라이나인의 항의와 절규는 결국 약소국의 허망한 외침으로 끝나고 말았다. 약소국의 운명이란 자국이 무엇을 원하느냐가 아닌 강대국이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냉혹한 현실을 우크라이나에서 보게 된다. 지지율 25%에 불과한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어떻게 이 사태를 돌파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