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터클이 아니라 완성도에 투자한 《파친코》
  • 정덕현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4.23 11:00
  • 호수 1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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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억원 대작이지만 단역조차 허투루 그리지 않아
‘스타 캐스팅’에 함몰돼 있는 한국 드라마 업계가 귀감 삼아야

재일 한인의 삶을 다룬 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는 무려 1000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이다. 애플이 투자하고 한국계 미국인이 만든 작품에 1000억원이 투자된 것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건 이 제작비가 온전히 완성도에 투입됐다는 점이다. 

《파친코》는 동명의 원작을 쓴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민진의 소설을 바탕으로 했다. 이민진 작가는 애초 일본 내 조선인의 삶을 쓰려 했다. 하지만 금융회사에서 일하던 남편이 도쿄로 발령이 났고, 그래서 4년간 일본에 체류하며 여러 한국인을 인터뷰한 끝에 초안을 버리고 다시 썼다고 한다. 즉 《파친코》에 등장하는 솔로몬(진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려던 초안 대신 선자(김민하, 윤여정)의 이야기로 다시 써낸 소설이 바로 《파친코》라는 것이다.

애플TV+ 드라마 《파친코》 포스터ⓒ애플TV+
애플TV+ 드라마 《파친코》 포스터ⓒApple TV+ 제공

《파친코》는 어떻게 탄생했나 

그렇게 2017년 빛을 본 소설 《파친코》는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고 BBC, 뉴욕타임스에서 ‘올해의 책 10’으로 선정됐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2019년 이 소설을 추천하며 “첫 문장부터 당신을 끌어당기는 매혹적인 책!”이라고 쓴 바 있다. 그 첫 문장은 실제로도 강렬하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애플이 《파친코》를 영상물로 제작하기 위해 판권 계약을 한 건 그래서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베스트셀러 소설의 판권 계약을 하는 일은 일상적인 것이니까. 

하지만 하필이면 현시점에 《파친코》를 영상으로 제작해 글로벌 OTT 애플+를 통해 서비스하게 된 건 우연이 아니다. 2020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며 한국 콘텐츠에 대한 글로벌 관심이 커졌고, 다음 해 《미나리》 역시 윤여정에게 여우조연상을 수여하며 한국이라는 나라가 콘텐츠적으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간 넷플릭스를 통해 《킹덤》과 《오징어 게임》 등 한국 드라마가 연달아 큰 성공을 거둔 것도 애플로 하여금 《파친코》로 승부수를 띄울 만하다는 판단을 하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이 작품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담지만, 자이니치(재일 한인)의 삶을 한국계 미국인의 시선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다양한 국가적 경계를 뛰어넘는 프로젝트가 된다. 한국의 대중은 당연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나아가 한국 콘텐츠에 관심이 커진 미국, 유럽, 아시아권 나라들에도 충분히 소구될 수 있는 작품이다. 이민진 작가의 원작소설을, 역시 한국계 미국인인 코고나다, 저스틴 전 감독이 연출했다. 작품의 탄생 과정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분명한 한국의 역사가 녹아든 작품이지만 글로벌 시선이 더해짐으로써 로컬과 글로벌의 균형이 맞는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1000억원이 들어간 대작이지만 한국의 드라마 제작 풍토를 떠올려 보면 가장 먼저 놀라운 게 바로 캐스팅이다. 물론 《미나리》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윤여정이 ‘나이 든 선자’ 역할에 캐스팅됐지만, 이민호 역시 오디션을 봤을 정도로 《파친코》는 캐스팅에서 톱스타 프리미엄이나 티켓 파워 같은 걸 별로 의식하지 않은 면이 있다. 이것은 사실상 《파친코》 시즌1의 주인공인 젊은 선자 역할에 김민하라는 배우가 캐스팅된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학교 2017》 《검법남녀》 같은 드라마와 《콜》 《귀가》 등의 영화에 출연한 경력이 있지만 김민하는 사실상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인 배우다. 물론 신인이지만 《파친코》에서 보여주는 연기는 그 어떤 중견보다 더 완벽하게 선자라는 캐릭터에 몰입된 면모를 보여준다. 이러한 파격적인 캐스팅은 한국 드라마 제작 풍토에서는 결코 벌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해외에서는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다. 철저히 작품 중심으로 돌아가고, 거기 등장하는 캐릭터에 걸맞은 연기자를 유·무명을 따지지 않고 오디션을 통해 뽑는 시스템이 해외에서는 일반적이라는 것. 

《파친코》에서 이러한 캐스팅은 김민하만의 일이 아니다. 선자의 엄마 양진 역할의 정인지나 선자의 아빠 역할 이대호도 마찬가지다. 둘 다 드라마나 영화보다는 연극이나 공연으로 더 활동했던 배우들이다. 그래서 더할 나위 없는 연기를 보여주지만 대중적 인지도는 높지 않다. 그런데 《파친코》에서 선자 역할만큼 비중이 높은 게 그 부모들의 역할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드라마 제작에서 우리의 캐스팅 방식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주·조연 대부분을 인지도에 따라 캐스팅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것. 《파친코》에서 김민하, 정인지, 이대호가 돋보였던 건 상대적으로 대중적 인지도가 없어 작품 캐릭터에 몰입하는 데 전혀 방해되는 선입견이 없었다는 점이다. 나중에 프로필을 찾아보고 나서 같은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작품 캐릭터로서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 캐스팅이었다는 것이다. 

또 그저 스쳐 지나가는 단역들조차 《파친코》에서는 허투루 그려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선자네 하숙집에 머무르던 어부들이나 양진 모녀가 떠나기 전 쌀밥을 지어주기 위해 찾았던 쌀집 할아버지, 일본 오사카에서 이삭(노상현)이 한 아주머니의 부탁으로 찾아갔을 때 “자기 몸도 없는 게 사람이냐”며 일갈하던 한 젊은이조차 《파친코》는 인상적으로 담아낸다. 좋은 작품은 결국 한두 명의 스타 캐스팅이 아니라 단역조차도 쫀쫀하게 살려내는 정성스러운 디테일에서 만들어진다는 걸 이 캐스팅이 보여주고 있다. 

ⓒApple TV+ 제공
애플TV+ 드라마 《파친코》의 한 장면ⓒApple TV+ 제공

번역과 고증을 위한 노력 파격적 

《파친코》는 1920년대 조선과 1989년 일본 그리고 미국 뉴욕을 오가는 이야기 구성이어서 한국어, 일본어, 영어를 넘나드는 자막과 대사를 갖고 있다. 당연히 번역 작업이 쉽지 않다. 그런데 《파친코》는 단순히 의미를 전달하는 수준의 번역이 아닌, 한국어 특유의 표현 방식이나 제주 사투리를 대사로 녹여내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 자이니치들이 쓰는 특유의 한국어투 같은 것들까지도 복원해 냈다. 그래서 처음에는 솔로몬이 하는 한국어가 마치 외국인이 흉내 내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것이 사실은 재일 한인들이 실제로 쓰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이 얼마나 고증에 신경을 썼는가를 말해 준다. 

물론 《파친코》도 1920년대 부산 영도의 어시장을 세트로 복원해 부감촬영을 한다거나, 당대 들판을 가득 채운 벼들로 일렁이는 황금물결을 아름다운 광경으로 포착하고, 부산에서 일본으로 건너가는 배나, 일본 오사카 한인들이 지내던 뒷골목, 철도 공사로 흔들리는 주점 같은 다양한 공간을 재현해 내는 일에도 남다른 정성을 들였다. 하지만 이런 공간들을 《파친코》는 단순한 스펙터클로 활용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실감 나게 재연된 시대와 공간을 통해 당대를 살았던 이들이 어떤 감정과 생각들을 가졌는가를 들여다보는 데 더 집중한다.  

물론 엄밀히 말해 《파친코》는 미국 드라마다. 그래서 제작방식 역시 미국식을 따랐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러한 캐스팅 방식이나 고증에 들인 정성이 파격적이고 놀랍게 느껴지는 건 당연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통해 한국의 드라마 제작방식 역시 이제는 좀 더 합리적인 변화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른바 대작 드라마, 블록버스터 드라마들이 과거에도 많이 만들어졌지만 많은 작품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막대한 제작비에도 완성도보다는 스타 캐스팅, 스펙터클 연출이나 현지 로케이션 등 엉뚱한 곳으로  돈이 흘러나가곤 해서다. 1000억원이 있으면 뭐든 못 하겠냐 싶겠지만, 제작 마인드가 바뀌지 않으면 위상이 높아진 K드라마의 더 높은 도약도 쉽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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