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안에 가둬진 현대미술의 벽을 허물다
  • 반이정 미술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4.24 12:00
  • 호수 1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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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고 론디노네 개인전, 국내에서 개최
현대미술이 쌓아온 관람 피로도 및 불만 해소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스위스 미술가 우고 론디노네(1964)의 작업을 내가 실물로 처음 접한 건 2013년 노르웨이 오슬로의 한 미술관 야외에 설치된 작품에서다. 그때 내가 만난 건 점토색이 감도는 얼굴 조각이었다. 건물 계단 중간의 낡은 헛간 나무 받침대 위에 세워졌는데, 작품 제목이 《월출.동쪽.11월(Moonrise.east.November)》이라고 붙어있었다. 거대한 스케일로 압도하는 야외 현대미술 조각들과는 결이 다르다는 걸 단번에 느낄 수 있는 귀엽고 직감적인 작품이었다.

비대칭의 유선형 머리통에 양쪽으로 쫙 찢긴 입가, 구멍 두 개만 뚫어서 눈을 표시하는 처신, 간결하고 천진난만한 미감이 물씬 배어있는 단조로운 조각품이었다. 아이들의 찰흙 장난처럼 점토의 젖은 느낌을 살리려고 알루미늄 조각 표면에 투명 폴리우레탄을 발라 촉촉한 흙의 질감을 느끼도록 배려한 것까지 동심에 찬 상상력에 완숙미를 더했다. 야외에서 흔히 만나는 모호하거나 엄숙한 조각품과는 달리 익살맞은 얼굴 형태를 커다랗게 만들어 대놓고 제시한 데서 과감함도 느껴졌고 그곳의 문화적 관대함도 남달라 보였다. 미술 현장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미술가로서, 난해함에 빠져 허우적대는 현대미술의 관행에서 벗어나 단순함에서 자기 색채를 확보한 점이 독보적이고 대견하게 보였다.

ⓒ국제갤러리 제공
우고 론디노네 국내 전시장 전경ⓒ국제갤러리 제공

작품의 엄숙미보다 익살미로 관객에게 다가가

9년 전 노르웨이에서 만난 미술가 우고 론디노네가 총천연 형광색 인물 조각상으로 국내에서 전시를 연다. 다듬지 않은 암석 덩어리 위에 작은 암석 파편을 얹어 사람의 형태를 짐작게 하는 인물상 다섯 점이 국제갤러리(서울점)에 세워졌다. 겉보기에 암석처럼 보이는 이 조각의 재료는 석회암 파편을 3D로 확대한 뒤 주물로 뜬 청동이다. 전시 제목에 쓰인 《바다의 수녀와 수도승(Nuns and Monks by the Sea)》(4월5일~5월15일, 국제갤러리 서울·부산)은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대표작 《바다의 수도승(The Monk by the Sea)》에서 따온 것일 게다. 미술사에서 친숙한 도상을 가져오되, 속세와 등진 수도승의 금욕주의를 표현한 19세기 화가의 그림과 정반대 질감을 담은 자신만의 수도승을 가져왔다. 우고 론디노네의 자칭 수도승 조각상들은 절제되지 않은 형광색의 파랑, 노랑, 빨강으로 몸통과 머리통을 채색해 소비사회의 표상처럼 대체됐으니 말이다.

모난 암석 형태의 청동 조각에 형광색을 입힌 이번 작품의 예시로 2016년 그가 미국 라스베이거스 네바다사막 위에 조성한 《세븐 매직 마운틴스(Seven Magic Mountains)》를 들 수 있다. 우고 론디노네의 국내 개인전이 개막한 다음 날인 4월6일 방탄소년단 RM이 라스베이거스 콘서트 일정을 앞두고,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렸던 그 야외 전시장이기도 하다.

공공 조형물의 형태로 제작된 이 대형 작품은 실제 바위에 형광색 페인트를 칠해 층층이 쌓은 7개의 돌탑이다. 어딜 봐도 선사시대 거석 기념물을 연상시킬 효과를 주려고 세운 육중한 돌탑인데, 울퉁불퉁한 암석의 표면마다 현대 소비문화를 선도하는 네온색을 입힌 모양새가 대단히 비현실적인 경관을 연출한다. 상상해 보라. 광활하고 황량한 미국 서부의 무채색 광야에서 도무지 마주치리라 기대할 수 없는 10m 높이의 커다란 형광색 덩어리를. 자연경관과 대비를 이루는 이 뜬금없는 형광색 돌탑에 굳이 해석을 달자면, 소비사회의 욕망과 현대적 기복을 구시대 거석 기념물에 투영한 조형물쯤 되려나.

네바다사막에 세운 형형색색 돌탑이나, 국내 전시에 소개된 수도승이라는 이름이 붙은 암석 형태의 인물상은 모두 현대미술이 쌓아온 관람의 피로를 해소시키는 효과를 낸다. 현대미술을 과잉 해석하려는 문화적 관행이 분명 있다. 과잉 해석이 초래한 현대미술에 대한 난해함은 역설적으로 현대미술을 고급 문화의 난공불락으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러니 현대미술은 스스로 난해한 요새 안에 가두려는 면까지 있다. 이 난해한 성채의 틈새에서 발견해낸 것이 우고 론디노네 스타일의 작품이 아닐까 한다. 

전시장에 세워진 조각마다 붙어있는 ‘수도승’이라는 명칭은 관객이 작품으로 들어가는 입간판 같은 것이다. 수도승이라는 밑밥을 깐 작품이지만, 바닥에 세워놓은 울퉁불퉁 다듬어지지 않은 암석 덩어리를 닮은 형체로부터 인체를 어림짐작해 떠올릴 순 있을지언정 수도승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이 심상에 떠오르진 않을 게다. 그런데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은 작품이다. 팔다리 없이 울퉁불퉁한 암석 파편 몸체 위에 자그만 암석 파편을 얹고, 형광 노란색 몸통에 형광 하늘색 머리를 얹은 후 《blue yellow monk》라 이름을 붙이는 식이다.

2013년 노르웨이 전시 모습ⓒ반이정 제공

난해함에 허우적대는 현대미술 관행에 경종

우고 론디노네의 수도승 조각이 재현하는 건 수도승이 아닐 것이다. 그의 조각이 재현하는 건 물질감과 색채라는 조형의 본질에 있다. 그것은 주류 현대미술이 오랫동안 방기해온 시각예술의 원형이기도 하다. 모든 전시장마다 작품 해설문을 구비해 놓곤 한다. 하지만 읽어도 무슨 뜻인지 감이 오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감상을 방해하는 비문이기 일쑤다. 불필요한 해석의 부담에서 벗어나 단순한 외형의 덩어리와 색채에만 오로지 집중하고 체감하는 것. 우고 론디노네의 조각 작품 감상법은 해석 과잉이 초래한 피로감과 불만을 털어내는 체험이다.

수도승이라는 고결한 이름이 붙은 덩어리에서 팔다리 붙은 인물이 아닌 암석(을 흉내 낸 청동이지만)의 육중한 부피감을 체감하고, 수도승의 신성함에 연연하지 않고 명도 높은 형광 원색의 질감을 가까이에서 만끽하면 된다. 쓰다 보니 길어졌는데, 우고 론디노네의 작품은 조형의 단순미에 집중시켜 현대미술 관람의 익숙한 피로감을 털어내준다. 긴 말이 필요 없는 즉물적인 감각 덩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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