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권종’ 안착한 5만원권, 무엇을 바꿨나
  • 조유빈 기자 (you@sisajournal.com)
  • 승인 2022.05.04 10:00
  • 호수 1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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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과 유통, 지하경제 논란까지
5만원권 관련 이슈 톺아보니

화폐에는 세 가지 기능이 있다. 교환의 기능, 가치 척도의 기능, 가치 저장의 기능이다. 본래 화폐는 교환을 주목적으로 탄생했다. 상품 가치를 화폐로 나타내게 되면서 물건에 가격이 매겨졌다. 그렇게 화폐는 경제를 움직이는 하나의 수단이 됐다. 현재 한국의 최고액권인 5만원권의 주 기능은 뭘까. 발행 비용을 줄이고 금융거래를 편리하게 하기 위해 탄생한 5만원권이 시중에 보이지 않는다. 90~100% 이상의 환수율을 보이는 다른 권종과 달리, 5만원권(17.4%, 2021년 기준)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단독] ‘신사임당’ 실종 사태…“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기사 참조). 경제적 불확실성이 확대되고 금리가 낮아지면서 5만원권은 가치를 ‘저장’하는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현금의 지하경제 유입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고 있지만, 사실 5만원권 환수율에 대한 문제가 언급된 것은 처음이 아니다. 5만원권이 발행된 2009년부터 2022년에 이르기까지 화폐경제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5만원권의 발행과 유통을 둘러싼 배경과 논란들을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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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만원권 발행의 역사…10만원권은?

5만원권은 2009년 발행됐다. 1973년부터 2009년까지 무려 36년 동안 최고액권의 자리를 지킨 것은 1만원권이었다. 1970년대에 비해 물가는 13배 이상 뛰었고, 1인당 국민소득은 100배로 증가한 상황. 경제 규모가 커졌음에도 1만원권이 최고 액면 화폐라는 것은 문제로 제기됐다. 한 번 쓰면 재사용이 불가능한 수표의 발행 비용 문제부터, 고액권을 발행하면 1만원권 발행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도 거론됐다. 그러나 물가 인상과 부패 조장 우려 등을 이유로 발행은 번번이 흐지부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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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23일 5만원권 지폐가 시중에 유통되기 시작했다.ⓒ연합뉴스

정부가 고액권 발행을 사실상 수용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꾼 것은 2006년부터다. 한국은행은 2007년 최고액권인 10만원권과 함께 우리나라 화폐 체계에 맞는 5만원권 발행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겠다고 했다. 한은 자문위원회를 통해 10만원권 도안의 인물로는 백범 김구, 5만원권 인물로는 신사임당이 선정됐다. 인물 선정 과정에 대한 논란도 일었지만 5만원권 발행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10만원권 발행은 무산됐다. 당초 10만원권의 앞면에는 김구 선생의 초상화를, 뒷면에는 대동여지도의 목판본을 넣기로 했는데 목판본에는 독도 표시가 없었다. 한은은 국민 의견을 받아들여 지도의 필사본을 바탕으로 독도를 그려 넣기로 했으나, 정부의 요청에 의해 발행 작업이 중단됐다. 정부는 대동여지도에 대한 논란, 경제 여건상 발행이 시급하지 않다는 점, 물가 불안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 등을 이유로 10만원권 발행을 무기한 보류했다. 5만원권의 유통 경과와 파급 효과를 지켜보면서 발행을 다시 논의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전문가들은 1972년 5000원권이 등장한 지 1년 만인 1973년 1만원권이 등장한 사례를 근거로 중장기적으로 10만원권이 등장할 것으로 전망했지만, 13년이 지난 현재까지 10만원권은 발행되지 않았다.

5만원권의 등장과 함께 각 은행의 현금자동입출금기(ATM)도 대대적으로 변경됐다.ⓒ연합뉴스

# 5만원권이 바꾼 유통·가계 지도

5만원권의 등장은 수표의 존재감을 지웠다. 신분 확인과 이서 등 불편함을 유발하는 수표의 자리를 5만원권이 대체했다. 금융권에서는 5만원권의 등장과 함께 현금자동입출금기(ATM)가 대대적으로 변경되면서 비용이 수반됐지만, 수표 제조와 발행이 줄어들면서 감소하는 비용(연 2800억원)이 더 컸다. 1만원권 여러 장을 가지고 다니는 개인의 불편함도 줄었고, 전체적인 현금 유통 물량이 감소되면서 금융기관, 유통업체 등의 현금 관리비용도 직간접적으로 감소했다. 출시 당시에는 황색 계통의 색상 때문에 5000원권과 잘 구분해 사용해야 한다는 주의사항이 강조됐지만, 새로운 화폐에 익숙해지면서 민원도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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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원권 유통 초기에는 황색 계통의 색상 때문에 5000원권과 구분해 사용해야 한다는 주의사항이 강조됐다.ⓒ연합뉴스

5만원권 발행이 카드결제기 보급률이 늘어난 시기와 겹쳐지면서 거스름돈 보유량도 문제가 됐다. 대형마트와 편의점은 거스름돈으로 사용할 현금 보유량을 늘렸다. 역시 거스름돈 문제가 수반될 수밖에 없었던 택시업계에서는 카드택시 전환율이 높아졌다. 유통업계는 5만원권 도입으로 4만원대 이상의 상품 소비가 늘어날 것으로 기대했다. 신권 발행 이후 대대적인 4만9000원 기획전이 열렸다. 실제로 백화점의 5만원 수준 매출은 5만원권 출시와 함께 급상승했다.

‘배춧잎’도 옛말이 됐다. 세뱃돈의 기본 단위는 5만원으로 바뀌었고, 경조사에 사용하는 현금 역시 5만원이 기본 단위가 됐다. 5만원권이 출시된 뒤 시장조사기관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화폐 활용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결과, ‘5만원권이 축의금이나 세뱃돈의 단위를 더 커지게 했다’는 데 57.3%의 응답자가 동의했다. 2인 이상 가구의 월평균 경조사비가 5만원을 넘은 것도 5만원권 출시 이듬해인 2010년부터다(국세청 가계동향). 5만원권은 2017년부터 발행 장수 기준으로 전체 지폐 중 비중이 가장 높아지면서 중심권종으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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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금이나 로비 수단으로 5만원권이 악용되는 경우가 드러나면서 지하 경제 확대를 막을 대책 마련 필요성도 대두되고 있다ⓒ연합뉴스

# 지하경제 키운다는 우려는 왜 나왔나

이렇게 5만원권이 중심권종이 되면서 화폐 발행과 유통 비용은 줄어들었고 편의성도 올라갔다.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긍정적 취지로 발행됐지만, 고액권이 지하경제를 키운다는 지적도 나오기 시작했다. 공급한 돈이 한은으로 돌아오지 않으면서다. 시사저널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양경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한은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22년 3월까지 5만원권의 전체 환수율은 44.5%에 그친다. 최근 환수율은 더 낮다. 2020년 24.2%, 2021년 17.4%로 환수율이 급락했고, 올해 1~3월 환수율도 27.4%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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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부터 2022년 3월까지 5만원권의 전체 환수율은 44.5%에 그친다.ⓒ연합뉴스

한은은 5만원권을 보유하는 현상이 경제적 불확실성과 저금리 기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상속세와 증여세 등 세금 부담을 덜기 위해서인 경우도 많다. 실제로 고액 세금 체납자 집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5만원권 다발이 발견된 사례들이 존재한다. 5만원권이 본격적으로 ‘돈맥경화’를 초래했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은 비자금이나 로비 수단, 은닉 자금으로 5만원권이 악용되는 경우가 드러나면서다. 2011년 전북 김제시의 마늘밭에서 발견된 110억원은 인터넷 불법 도박 사이트 수익금으로 밝혀졌다. 재벌그룹 사무실에서 70억원대 비자금이 발견됐을 때도, 여의도 물품보관소에서 도박 사이트 불법 자금 11억원이 발견됐을 때도 5만원권 뭉치가 드러났다. 추적이 불가능한 현금인 데다 1만원권에 비해 훨씬 작은 공간에 보관이 가능하다는 특성 때문에 대가성 현금이나 은닉 자금으로 5만원권이 이용되는 것이다.

한은은 5만원권의 지하경제 유입설을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코로나19 확산, 저금리 기조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추정하며, 지하경제와의 상관관계를 직접적으로 식별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한은의 입장이다. 그러나 환수율 문제는 최근에만 제기된 것이 아니다. 공급 첫해인 2009년(7.3%)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2014년 환수율은 25.8%에 그쳤다. 박근혜 정부가 지하경제 양성화 대책을 발표한 이후다. 당시 가정용 금고 판매도 본격적으로 늘어나는 등 현금 보유 현상이 짙어졌다.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보고서를 통해 “우리나라의 지하경제 비중이 상승한 시점이 2009년 하반기 고액권 지폐인 5만원권이 발행되고 화폐 유통 속도가 지속적으로 하락하기 시작한 직후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이후부터 지하경제 및 음성적 거래 확대 방지를 위한 연구조사와 대책 마련의 필요성은 본격적으로 대두됐다. 이에 대해 한은은 “지하경제를 일률적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데다 추정방법에 따라 규모의 편차가 클 수 있기 때문에 지하경제와 관련한 통계를 생산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라진 5만원, 금고 속에서 잠잘까…금고 판매량 ‘껑충’

돌아오지 않는 5만원권은 어디에서 잠자고 있을까. 민간이 보유하고 있는 현금은 지난해 9월 기준으로 148조8000억원에 이른다. 2001년부터 한은이 관련 통계를 작성한 이후 역대 최대 수준이다. 금융시장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현금을 품속에 두려는 심리는 안전한 ‘보관 공간’에 대한 수요로도 나타났다. 바로 금고다. 금고 열풍은 우리보다 앞서 초저금리 시대에 진입한 일본에서 먼저 발생했다. 일본에서는 2016년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하면서 연간 금고 판매량이 62% 급증한 바 있다. 금고 판매 증가율은 시중에 돈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치인 셈이다.

2021년 주요 백화점의 가정용 금고 매출은 2020년에 비해 50% 이상 성장세를 보였다. 수요가 늘면서 금고의 디자인과 기능도 다양해졌다. ⓒ연합포토
2021년 주요 백화점의 가정용 금고 매출은 2020년에 비해 50% 이상 성장세를 보였다. 수요가 늘면서 금고의 디자인과 기능도 다양해졌다. ⓒ연합포토

우리나라에서도 금고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양경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국은행·국세청·통계청 등에서 받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금고 제조업의 매출 과세표준은 2566억2100만원으로 전년의 1273억1200만원과 비교해 101.56% 증가했다. 관세청 수출입통계 분석도 금고에 대한 수요를 방증한다. 2021년 금고 수입액은 전년 대비 20% 가까이 증가한 492만2000달러로 나타났다.

과거에는 금고가 부유층의 전유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일반 가정에서도 사용하는 추세다. 2021년 주요 백화점의 가정용 금고 매출은 2020년에 비해 50% 이상 성장세를 보였다. 신혼부부와 1인 가구를 대상으로도 판매량이 늘어나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에 따르면 지난해 1~6월 2030세대의 개인 금고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44% 늘어났다. 수요가 늘자 제품군도 다양해졌다. 인테리어 가구처럼 디자인된 금고부터 와이파이를 탑재해 경고 메시지를 발송하는 등 스마트 보안 기능을 갖춘 모델까지 나와 소비자 선택의 폭도 넓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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