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 위기 때마다 반복되는 밀 ‘독립 선언’
  • 김상철 경제 칼럼니스트(전 MBC 논설위원) (ls@sisajournal.com)
  • 승인 2022.05.28 14:00
  • 호수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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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정권마다 밀 자급률 높이려 안간힘 썼지만…
생산 기반과 원가 취약해 한계만 절감

한국전쟁이 끝나고 우리를 먹여 살린 것은 미국의 원조였다. 1955년 5월 한미 잉여농산물협정이 체결됐다. 이후 미국산 잉여농산물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당시 미국산 잉여농산물은 한국 곡물 생산량의 40%를 차지했으며 그 가운데 밀은 70%였다. 덕분에 밀가루 값은 쌀의 6분의 1 수준으로 쌌다. 어려운 형편에 많은 사람이 먹거리를 밀가루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 역시 ‘분식 장려’라는 이름으로 밀가루 음식을 반강제로 ‘권장’했다. 쌀이 부족해 억지로 먹어야 했던 밀가루 음식이었다. 차츰 밀가루는 빵과 국수로 변해 우리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수제비와 칼국수도 이때 밀가루를 구하기 쉬워지면서 서민 음식이 된 경우다. 세월이 흘러 그 귀하던 쌀이 남아돌게 된 요즘, 우리는 다시 ‘우리 밀’을 찾는다.

밀 가격 급등으로 식량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5월23일 오후 인천시 중구 대한제분 인천공장에서 밀가루 포대가 지게차에 실려 운반되고 있다.ⓒ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밀 가격 급등

최근 계속되는 식량 위기 우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체감도가 낮은 이유도 주식이 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밀을 찾는 수요도 만만치 않다. 밀의 1인당 연간 소비량은 33kg 정도로 쌀의 59kg을 잇는다. 하루 한 끼 이상을 밀로 만든 음식으로 식사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국내 생산이 거의 없다. 2021년 통계에 따르면 밀 자급률은 0.8%다. 99%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식량 자급률이 낮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위험한 일이다. 무엇보다 식량은 어느 나라에서나 자국 소비가 우선이다. 밀의 경우 전 세계 생산 대비 19~22%만 교역이 이루어진다. 게다가 상위 5개국의 수출 비중이 60%를 넘어 주요 생산국에서 문제가 생기면 바로 수급 불안과 가격 급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실제로 국제 밀 가격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후 급등했다. 시카고 선물거래소에서 지난 1월 톤당 284달러였던 밀 가격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인 2월 296달러, 3월 407달러로 뛰었다. 지난해 평균인 258달러와 비교하면 56% 올랐다. 4월 평균은 391달러로 잠시 상승세가 꺾이는 듯했지만, 최근에는 다시 지난달 평균가를 웃돌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지난 3년 동안 전 세계 밀 수출에서 30%를 차지해 왔다. 지금 상태에서 미국이나 호주, 캐나다 중 한 곳이라도 흉작이 되면 밀값은 한 단계 더 뛸 것이다. 우리는 식용 밀의 48%를 미국, 44%를 호주, 8%를 캐나다에서 수입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밀의 자급률 제고를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부는 식생활 서구화와 소비 품목 다양화 등으로 인해 전체 양곡 소비가 감소함에도 밀 소비가 꾸준히 유지되고 있는 점을 고려해 이미 2020년 밀 산업 육성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대규모 예산을 투입해 밀 자급률을 높인다는 계획이었다. 기본계획이 세운 25년까지의 밀 자급률 목표가 5%다. 윤석열 정부가 세운 밀 자급률 목표는 2027년까지 7.0%다. 자급률을 높인다는 계획 자체야 문제가 없지만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밀 산업 육성 기본계획에서 제시된 2021년 밀 자급률 중간목표는 1.7%였지만, 실제 자급률은 0.8%로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생산 기반이 워낙 취약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밀 농사가 시작된 것은 무척 오래전이다. 최소한 삼국시대부터라고 한다. 하지만 밀이 우리나라에서 주곡 위치를 차지한 적은 없다. 재배하기는 했지만, 생산량이 무척 적었다. 무엇보다 여름에 고온인 우리나라에서는 잘 자라지 않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밀은 좀 춥고 건조한 기후라야 잘 자란다. 고온에 약한 밀은 우리나라에서 재배가 어려운 곡물이다. 밀 재배 북방한계선은 충청도를 넘지 못한다. 쌀이나 보리, 조 등 주곡 생산이 워낙 중요했기에 굳이 생산성이 떨어지는 밀을 어렵게 재배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쌀은 원산지가 인도와 동남아 일대인 아열대성 작물이다. 잡초나 병충해에는 약하지만, 노동력을 많이 투입하면 면적 대비 더 많은 양의 식량을 생산해낼 수 있다. 옛날에는 쌀농사가 밀 농사와 비교해 10~20배나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요즘도 단위면적당 칼로리 생산량을 비교하면 벼가 밀의 3배에 이른다고 한다. 굳이 밀을 생산하기 위해 애써야 할 이유가 없었다.

재배가 어려우니 우리와 다른 나라는 생산원가도 차이가 난다. 우리 밀과 수입 밀의 가격 차이는 작년까지 3배 이상이었다. 국제 밀값이 최근 크게 올랐고 환율효과까지 있어 격차가 좀 줄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차이는 2배 이상이다. 결정적인 것은 자급률 제고가 목표대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90% 이상을 수입해야 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고민이 많지만 손 놓고 있을 수만 없는 일이다.

식량 위기가 발생했을 때 현재와 같은 시스템으론 대응이 어렵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미 기상이변에다 생산량 급감, 가격 상승 등이 겹치자 세계 주요 곡물 생산국들은 문을 닫고 있다. 우리에게는 아픈 경험도 있다. 1980년 당시 전두환 정권은 그해 여름 냉해로 쌀 생산량이 급감하자 쌀을 구하기 위해 정권의 사활을 걸어야 했다. 당시 쌀 생산량은 355만 톤으로 전년의 3분의 2 수준이었다. 결국, 급하게 구하기는 했으나 도입 가격은 국제 시세의 두 배가 넘었다. 대안을 마련하려면 국내 곡물 증산 기반 확대도 중요하지만, 자급률을 높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5월1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식량안보회의에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사무총 장(왼쪽)이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은 토니 블링크 미국 국무부 장관ⓒEPA 연합

국가 곡물 조달 시스템 구축해야

궁극적으로 해외 곡물 메이저 등에 의존하는 수입 방식을 벗어나 국내 민간기업과 공공기관이 합동으로 곡물 유통사업에 진출해 곡물의 일정 부분을 독자적으로 도입할 수 있다면 바람직할 것이다. 이른바 국가 곡물 조달 시스템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식량 자주권 확보를 위해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추진했던 ‘한국판 카길’ 사업은 결국 실패했다. 정부와 민간이 합작기업을 세워 곡물 유통 본고장 미국에까지 진출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한 번 실패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포기할 일도 아니다. 당시 실패의 원인으로는 기업에 맡기지 않고 정부가 직접 주도하면서 짧은 시간에 성과를 내려고 지나치게 조급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면서 우리도 곡물 수출국에서 안정적으로 곡물을 직접 확보할 수 있는 현지 조달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그동안 추진해 왔던 해외 농업 개발도 새로운 접근 방법이 더 바람직할 수 있다. 종합상사를 앞세우는 일본의 사례는 검토해볼 만하다. 글로벌 인플레이션 쇼크가 이어지면서 물가가 가장 중요한 경제문제로 부상했다. 앞으로 기후변화가 지속되고 탄소중립 정책이 강화되면 세계적으로 식량 수급에 어려움이 더 커질 수 있다. 밀뿐만이 아니다. 밀과 함께 국내 곡물 수입의 95%를 차지하는 콩과 옥수수도 대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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