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기억을 통제할 수만 있다면?
  • 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6.05 13:00
  • 호수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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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로는 드물게 SF적 소재 다룬 《넥스트 투 노멀》
5명의 등장인물로 무대 압도한 힘은 ‘보편성’

공상과학(SF)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소재 중 하나가 기억에 관한 것이다. 의학기술이 발전해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고 행복한 기억만 남겨두는 시대가 온다거나, 아예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주입할 수 있다는 상상이다. 영화 《토탈리콜》(1990)에서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연기한 주인공 더글러스 퀘이드가 기억 제공 서비스 회사를 통해 자신의 뇌에 새로운 기억을 주입해 이른바 ‘사이버 휴가’를 즐기던 모습이 대표적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기능신경외과 로리 파이크로프트 박사는 현재 인간의 기억에 관여하는 뇌파를 전자적으로 제어함으로써 기억상실증이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등을 치료할 수 있는 ‘기억 보조장치’에 대해 연구 중이다. 가까운 미래에는 실현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이 연구에 대해 관심이 식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평생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을 겪을 수 있고, 이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망각이 가장 좋은 치료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 엠피엔컴퍼니 제공
현재 공연 중인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의 한 장면ⓒ엠피엔컴퍼니 제공
ⓒ 엠피엔컴퍼니 제공
현재 공연 중인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의 한 장면ⓒ엠피엔컴퍼니 제공

잊고 싶지만 소멸하지 않는 아픈 기억

뮤지컬에도 ‘잊고 싶지만 소멸하지 않는 아픈 기억’을 소재로 한 작품이 있다. 2009년 브로드웨이에서 개막하고 토니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한 《넥스트 투 노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15년 초연을 가졌고, 현재 4번째 공연이 광림아트센터 BB대홀에서 진행 중이다. 이 작품은 뮤지컬 소재로는 드물게 정신과에서는 양극성 장애, 일반적으로 조울증이라고 부르는 마음의 병을 가진 엄마 캐릭터가 주인공을 맡고 있다. 널을 뛰는 듯 심한 진폭을 가진 기분 변화로 인해 환자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했고, 주변 사람들 특히 가족을 힘들게 한다.

오프닝 장면부터 등장하는 주인공 다이애나는 어떤 특별한 이유 때문에 이 병을 16년째 앓고 있다. 바로 18년 전 지금의 남편 댄과 다이애나 사이에 혼전임신으로 세상에 일찍 태어났지만 불과 생후 8개월 만에 장폐색으로 사망한 자신의 아들 게이브를 여지껏 잊지 못하고 그의 혼령과 함께 집 안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집안의 성(姓)은 착한 사람이란 뜻의 ‘굿맨(Goodman)’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체 이 집구석은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없나!”라는 탄식이 나올 만하다. 엄마 다이애나는 30대 후반의 여성으로 권태기 없이 여전히 남편과 섹스를 즐기고, 담당 정신과 남자 의사와의 로맨스를 상상하기도 하는 열정 넘치는 육체를 가진 여인이다. 동시에 18년 전 그 비극의 기억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나약한 정신을 가졌다. 딸의 어머니로서, 남편의 아내로서 여느 가정과 다름없이 평범하게 분주한 아침식사를 마련하는 전업주부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내면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가족을 불안하게 만드는 캐릭터다.

남편 댄 역시 먼저 떠나보낸 아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는 아내의 조울증이 낫기를 바라며 우울증 병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채팅방에서 정보를 구하고, 회사 여직원들에게는 유능한 정신과 의사를 수소문하는 등 일상에서 어깨가 무거운 책임감을 지고 자신을 많이 희생하는 인물이다.

고등학생 딸 나탈리는 16세지만 본 적도 없는 오빠의 존재 때문에 집안에서 자존감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예일대 입시를 준비하는 모범생이었던 나탈리는 전공인 클래식 피아노 연주에 흥미를 잃고, 부모와 말다툼을 벌이는 시간도 점점 늘어난다. 급기야 엄마의 치료제 중에서 마약 성분이 있는 약을 빼돌리는 등 아슬아슬한 일탈을 감행한다. 아들 게이브의 혼령은 18세의 다 큰 몸을 가진 남자로 등장해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연인처럼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지만, 그의 육체는 이미 ‘굿맨 패밀리’에 속하려야 속할 수 없는 망자일 뿐이다.

작품 속에서 다이애나가 통원치료를 받는 과정이 여러 번 나오는데 전문적인 진단을 내리는 의사가 등장해 진지하면서도 코믹하게 치료 과정을 보여준다. 나탈리의 남자친구인 헨리가 그나마 멀쩡해 보이지만 점점 일탈해 가는 여자친구를 보며 함께 미쳐 가자고 이야기한다. 그도 정상은 아닌 인물이다.

ⓒ연합뉴스
2013년 3월18일 오후 서울 마포구 더 스테이지에서 열린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연습실 공개에서 주연배우 태국희, 박칼린, 남경주, 이정열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연합뉴스

10년에 걸쳐 대본 완성하면서 유사 사례 조사

정신질환을 앓는 주인공과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는 주변 캐릭터들을 합쳐도 총 5명만 무대에 등장하는 이 작은 작품이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보편성에 있다. 통계적으로 양극성 장애는 전세계 인구의 1% 정도가 평생 한 번 앓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비율은 살인 등 자극적이고 특별한 상황에 처해 있는 여타 작품의 주인공에 비해 더 일반적인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그리고 이 작품의 작가 브라이어 요키는 10년에 걸쳐 대본을 완성하면서 유사한 증상의 환자나 이 분야 전문 의료 종사자들의 자문을 받는 등 작품 속 치료 과정을 묘사하는 데 공을 들였다. 특히 웬만한 정신 치료가 실패로 돌아가자 의사가 무리하게 다이애나에게 전기충격 치료를 시도하는 장면은 전체를 통틀어 긴장을 고조시킨다. 실제로 우울증 환자의 뇌에 전기충격을 줌으로써 일부분의 기억상실을 유발하고 이를 통해 트라우마를 함께 제거하려는 시도는 아직도 미국의 일부 병원에서 계속되고 있다. 이들 대다수가 중년 여성이라는 사실에 작가가 주목해 이를 극본에 반영했다고 한다.

이 가족은 말미에 미래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디딘다. 하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치유하는 길을 택한다는 점에서 다른 가족이 희생하며 눈물을 자아내는 신파와는 온도 차이가 있는 일종의 ‘차가운 신파’다. 제목도 이들이 앞으로 결코 평범해질 수는 없겠지만 ‘평범함 그 근처 어디’(Next to Normal)로 괜찮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박칼린과 최정원, 남경주, 이건명, 이정열 등 베테랑 뮤지컬 배우들이 굿맨 집안의 부모 역할로 출연 중이며 3층으로 구성된 세련된 무대 디자인과 록음악을 연주하는 밴드의 음악도 이 작품만의 스타일을 만들어준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는 낙마 사고를 당한 뒤 ‘절대적이고 완벽한’ 기억력을 갖게 된 농부 푸네스가 등장한다. 그의 뇌에는 모든 기억이 없어지지 않고 쌓이기만 한다. 오히려 망각하지 못해 불행이 시작된다. 갓난 아들을 잃은 생생한 기억 때문에 조울증을 앓는 다이애나에게도 망각이라는 선물이 필요할 것 같지만 이 뮤지컬은 그 또한 다른 불행의 씨앗이 될 것이라는 반대의 경고를 담고 있다. 기억하면서도 추모하고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이 최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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