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친 전쟁에 덮치는 테러, 깊어지는 ‘러-우크라 전쟁’ 고통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9.03 16:05
  • 호수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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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소모전 치닫는 전쟁, 후방·민간으로 확대 예상…양국, 은밀한 공작 시작돼

러시아 극우 이데올로그 알렉산드르 두긴(60)의 딸인 다리야 두기나(29·두긴의 여성형)가 8월20일 오후 9시45분쯤 차량 폭탄으로 숨진 사건은 가뜩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몰아가고 있다. 두기나는 모스크바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30km쯤 떨어진 교외 지역 볼쉬예바조미에서 몰고 가던 도요타 랜드크루저가 폭발하면서 사망했다. 러시아 언론들은 두긴과 두기나가 현지에서 같은 차로 모스크바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마지막에 따로 출발하면서 두기나만 사고를 당했다고 보도했다.

폭탄을 장착한 주체는 두기나보다 아버지 두긴을 노렸을 가능성이 크다. 두긴은 지정학적 전략으로 러시아의 팽창과 유라시아 맹주 지위 회복을 주장해온 극우 민족주의 이데올로그이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2014년 크림반도 합병과 지난 2월 우크라이나 침공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있다. 두기나는 모스크바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인터넷과 방송 등에서 아버지의 사상을 알려왔으며,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강력하게 옹호해 왔다.

주목되는 점은 이 모녀를 상대로 러시아 심장부인 모스크바 교외에서 자동차 폭탄이라는 ‘프로의 솜씨’로 공작이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마피아나 비밀공작원 등이 이용하는 잔혹한 방식이다. 보복이나 경고를 하기 위한 잔혹극일 가능성이 커 보이는 이유다.

ⓒTASS 연합EPA 연합
8월23일 러시아 극우 이데올로그 두긴이 딸 두기나의 애 도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두기나는 8월20일 고속도로에 서 차량 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TASS 연합

러시아, 발 빠르게 우크라 요원 배후 지목

문제는 두긴이 우크라이나 침공의 의사결정권자가 아니며, 숨진 두기나는 더더욱이나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방 언론들이 ‘푸틴의 두뇌’ ‘푸틴의 정신적 안내자’ 등으로 부르는 두긴은 사실 러시아에서 별다른 공직을 맡지 못했다. 사실상 푸틴의 정당으로 연방하원(두마) 450석 중 356석, 상원 170석 중 146석을 차지한 거대 집권당 전러시아인민전선(ONF) 소속도 아니다. 2002년 극우 국가볼셰비키당에서 분리해 자신의 정당인 유라시아당을 창당했지만 의석은 전무하다.

주목할 점은 두긴이 집단보다 개인을 우선시하는 서구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민주주의를 극히 혐오하는 ‘증오의 이데올로그’라는 사실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북미·서유럽 안보동맹인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를 개인주의·자유주의를 퍼뜨리는 해양 세력의 전위대로 여긴다. 나토 회원국인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는 물론 가입을 시도하는 우크라이나를 점령과 합병 대상으로 보는 위험하고 호전적인 인물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두긴 부녀를 노렸을까.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사건 이틀 뒤인 8월22일 용의자와 구체적인 행적을 제시했다. FSB는 43세 우크라이나 여성 나탈랴 보우크가 우크라이나 극우 성향 군사조직인 아조우연대 소속 비밀요원으로 암살을 주도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보우크는 카자흐스탄 여권을 들고 러시아와 왕래가 비교적 자유로운 우크라이나 친러시아 세력 장악 지역인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에서 미니쿠퍼를 몰고 딸과 함께 7월23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두기나가 사는 건물의 아파트를 한 달간 임차해 살면서 두기나의 일정을 조사했다.

장기 대기·잠복·관찰은 1979년 1월22일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발생한 알리 하산 살라메(암호명 아부하산)의 자동차 폭탄 암살을 연상시킨다. 팔레스타인인인 살라메는 1972년 뮌헨올림픽 때 이스라엘 선수단 납치·학살을 기획해 이스라엘 대외 정보·공작기관 모사드의 보복 대상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한 노파가 베이루트의 아파트를 장기 임차하고 살라메의 차량을 관찰했다. 폭탄이 터진 직후 노파와 고양이는 이 도시에서 영영 사라졌다. 결국 두기나 암살에 정보·공작기관의 고전적인 공작 기법을 동원했다는 이야기다. 프로의 개입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FSB는 8월31일 공범인 남자도 공개했다. 이들은 주차장을 빌려 전문가급 장비를 다루며 급조폭발물(IED)을 제조했으며, 두긴의 가족 행사에 따라가 차량에 이를 장착했다. 보우크는 원격장치로 강력한 폭탄을 터뜨린 뒤 에스토니아로 출국했다. 입국과 출국도 프로급이다. FSB는 보우크가 용의주도하게도 입국 시에는 차량에 DPR 번호판을, 모스크바에선 카자흐스탄 번호판을, 그리고 출국할 때는 에스토니아 번호판을 각각 부착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러시아의 발표 내용에는 이상한 점이 여럿 눈에 띈다. FSB가 이처럼 보우크의 행적을 미리 파악했거나, 재빨리 추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도 사건을 막지 못한 건 이해하기 어렵다. 더욱이 FSB는 보우크의 아파트에서 발견했다며 그의 아조우연대 ‘대령’ 신분증 등을 제시했다. 문제는 지난 5월 러시아군에 포로로 잡힌 아조우연대 최고지휘관인 데니스 프로코펜코는 중령이고, 후임인 임시지휘관 니키타 나도치는 심지어 소령이라는 사실이다. FSB의 발표가 급조됐다는 의혹을 지우기 쉽지 않은 이유다. 암살 공작을 위해 파견된 비밀요원이 왜 우크라이나 군인 신분증을 모스크바까지 들고 가서 작전 뒤 아파트에 두고 떠났는지는 더욱 설명하기 힘들다.

ⓒTASS 연합EPA 연합
4월6일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으로부터 탈환한 우크라이나 키이우 북서쪽 부차 마을에서 주민들이 파괴된 러시아 군용 장비 곁을 지나가고 있다.ⓒEPA 연합

우크라, “프로파간다일 뿐” ‘러 자작극’ 주장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은 “허구의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프로파간다일 뿐”이라며 러시아 발표를 일축하고, 오히려 러시아의 자작극이라고 되받았다. 우크라이나 주장대로 이번 사건이 러시아의 모략극이라면, 두긴 모녀를 희생시킬 정도로 러시아가 다급한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러시아로서는 서방의 제재로 군수공장을 돌릴 반도체 등 정밀부품 확보가 쉽지 않은 지금의 상황에서 다른 출구를 모색할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테러 가능성을 배제할 수만은 없다는 지적도 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주목받는 우크라이나 해외정보국(SZR)을 살펴보면, 2004년 설립돼 그 연혁은 짧지만 사실상 1919년 우크라이나의 1차 독립선언 당시부터 러시아·폴란드 등에 맞서 암살·사보타주·게릴라전 등 ‘어둠의 전쟁’을 벌여온 민족주의자들의 비대칭 공작 전통을 충실하게 잇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 크림반도 등에서 벌어진 러시아 병참기지 폭발과 친러시아 지도자 살해 등 사보타주와 암살의 배후로도 의심된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상대로 생존하고 의지를 실현하려 할 때 필사적으로 동원하는 방식이다. 우크라이나에 장기전은 불리할 수밖에 없고, 서방이 지원한 무기로 러시아의 지구전 전략에 언제까지 맞설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8월24일로 개전 6개월을 맞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갈수록 소모전·자원전으로 흐르는 상황에서 일어난 이런 비정규 작전은 여러모로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향후 이런 테러가 자주 벌어져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될 수도 있다. ‘거대 회색곰’ 러시아에 맞서 ‘고슴도치’ 우크라이나가 전선을 후방과 민간 부문으로 확대할 것으로 예상할 수도 있다. 피를 뿌리는 양측의 은밀한 공작이 이제 막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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