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 카르텔 소탕 소재가 한국 사회를 만났을 때, 《수리남》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9.17 11:05
  • 호수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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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집단이라는 생태계 속 치열한 생존기
여성 캐릭터 묘사의 아쉬움은 남아

남아메리카 북쪽의 열대국 수리남. 국명조차 생소한 이 나라에서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대규모 마약 밀매 조직을 운영한 한국인이 있었다. 그리고 국정원과 손잡고 마약 거래 브로커로 위장, 그를 잡아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또 다른 한국인도 있었다. 《수리남》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 실화를 모티프로 만든 드라마다. 6부작에 걸친 주인공 강인구(하정우)의 ‘수리남 생존기’는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시리즈, 액션 누아르 장르에 꾸준한 애정을 피력해온 윤종빈 감독의 연출작이라는 중요한 두 개의 뿌리를 지닌다.

넷플릭스 드라마《수리남》 포스터·스틸컷ⓒ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드라마《수리남》 포스터ⓒ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드라마《수리남》 포스터·스틸컷ⓒ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드라마《수리남》 스틸컷ⓒ넷플릭스 제공

수리남 배경에 한국 사회의 DNA 이식

《수리남》의 출발점은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연히 ‘수리남의 한국인 마약왕’ 실화를 접한 하정우는 윤종빈 감독에게 작품으로 만들어볼 것을 제안했다. 두 사람은 《용서받지 못한 자》(2005)로 나란히 연기와 장편 연출 데뷔를 치른 뒤 《비스티 보이즈》(2008),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2012, 이하 《범죄와의 전쟁》), 《군도: 민란의 시대》(2014, 이하 《군도》) 등에서 호흡을 맞춰온 바 있다. 영화로 기획됐던 애초의 방향성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을 만나 플랫폼에 배급 가능한 오리지널 시리즈로 바뀌었다.

극 중 본격적 사건은 강인구가 친구의 동업 제안을 받아들여 수리남으로 떠나면서 벌어진다. 두 사람은 수리남에서 죄다 버려지는 홍어를 잡아들여 한국에 판매하는 사업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다. 그러나 현지 적응은 만만찮다. 신변 보호를 명목으로 돈을 요구하는 현지 군인은 물론, 중국 폭력조직의 협박까지 이어진다. 이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사람은 한국 목사 전요환(황정민). 현지 교민 사회는 물론이고 수리남 정부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덕분에 강인구는 잠시 위기를 모면한다.

전요환의 진짜 정체는 곧 드러난다. 그는 범인 인도 조약을 피해 수리남으로 도망친 뒤 마약 유통을 장악한 암흑가의 대부다. 한국으로 홍어를 실어 나르던 배에서 코카인이 발견되면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된 강인구는 그 모든 사건의 배후에 전요환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분을 삭일 길 없던 강인구는 전요환을 잡는 데 협조하면 교도소에서 나갈 수 있게 해주겠다는 국정원 요원 최창호(박해수)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활극을 표방한 《군도》를 제외한 윤종빈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는 동일한 구조가 발견된다. 군대(용서받지 못한 자), 호스트바(비스티 보이즈), 폭력조직(범죄와의 전쟁), 안기부(공작) 등에 이르기까지 폐쇄적 남성 생태계를 다양하게 다뤄왔다는 점이다. 불온의 역학관계로 지탱되는 세계에서 개인은 비정한 시스템과 손잡거나, 폭력과 부정에 물드는 방식으로 살아남는다. 인물들의 생존 방식은 곧 감독이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처럼 보인다. 미래를 향한 불가해한 예측이 과제로 남아있는 동시대보다 이미 결론이 도출된 과거 시제에서 당대를 해석하는 방식의 연출을 선보인다는 점 역시 특징으로 꼽을 만하다.

《수리남》은 이 같은 감독의 장기가 최적으로 발휘될 수 있는 면모들을 갖춘 작품이다. 윤종빈 감독은 전체 사건의 외양을 무리하게 키우기보다 캐릭터 드라마로 파고드는 방식을 택했다. 배경은 수리남이지만, 작품 전체의 DNA는 한국 사회의 그것이다. 드라마는 수리남으로 가기 전 강인구가 한국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은 인물이었는지 묘사하는 데 상당 시간을 할애한다. 그의 선택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성공을 향한 욕망 사이에 있다. 수리남으로 향하는 것은 과거 외화벌이를 위해 해외로 나갔던 세대의 생존방식을 닮아있다.

넷플릭스 드라마《수리남》 포스터·스틸컷ⓒ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드라마《수리남》 스틸컷ⓒ넷플릭스 제공

속고 속이는 싸움…드라마 전반의 긴장감 높여

실화와는 달리 전요환이 자신만의 궤변이자 믿음에 집착하는 목사로 극화된 것 역시 검은돈과 결탁한 사이비 종교라는 한국 사회의 부조리 중 하나를 이식한 결과로 읽힌다. 마약왕의 흥망성쇠를 다룬 뼈대 자체는 넷플릭스를 지금과 같은 위상으로 만든 시리즈인 《나르코스》와 같지만, 작품의 구체적 결이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다. 말하자면 《수리남》은 전 세계에 통용 가능한 마약 카르텔 소탕 소재가 한국 사회 고유의 필터들을 진하게 통과한 결과물이다.

2000년대 초반 마약 유통과 판매를 둘러싸고 한국, 중국, 수리남 현지와 미국까지 얽힌 채 벌어지는 각 조직과 개인의 속고 속이는 싸움.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작전을 수행하는 이들의 심리전은 《수리남》의 중요한 골자다. 감독이 ‘마피아 게임’이라 표현했듯 각 캐릭터는 자신의 진짜 정체와 속셈을 숨긴 채 서로에게 접근한다.

국정원의 작전에 투입된 ‘언더커버’임을 감춘 채 전요환에게 접근하는 강인구, 마약왕의 정체 대신 믿음을 설파하는 목사로 위장한 전요환, 국정원 요원 신분을 숨기고 위장 작전을 진행하는 최창호, 중국 조직의 편이었다가 전요환의 전도사가 된 변기태(조우진), 투명해 보이다가도 일순간 어떤 속셈을 감추고 있는지 의심을 부르는 전요환의 개인 변호사 데이빗(유연석), 전요환을 향한 반감으로 강인구와 손잡았지만 언제 어떻게 변심할지 모르는 중국 갱단 두목 첸진(장첸) 사이의 음모와 배신 드라마. 이는 6부작 전체를 이끄는 핵심 동력이다. 판을 키운 해외 로케이션과 대규모 총격 액션은 부차적 재미에 불과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연기 구멍’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의 밀도 높은 열연 역시 《수리남》의 강점이다. 무시무시한 악의 에너지를 뿜는 황정민과 느슨하게 여유를 밀어넣는 특유의 박자감을 뽐내는 하정우가 극과 극의 앙상블을 이루는 사이, 조우진과 장첸의 연기가 적확한 순간에 강조점을 찍으며 인상적으로 돋보인다. 특정 캐릭터에 반전의 열쇠를 심어둔 방식은 시청 이탈을 방지하며 끝까지 집중을 유지하게 만드는 장치다.

전요환의 의심과 강인구의 위기 극복이라는 반복된 구조에서 오는 피로감이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흡인력 있는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지금까지 윤종빈 감독이 보여준 남성 집단 세계와 확연하게 다른 무언가까지 발견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는 일말의 아쉬움이 남는다. 그 안에서 여성 캐릭터가 묘사되는 방식 역시 여전히 무성의에 가까울 정도로 무심하다. 단순히 연출자의 시선이 한국 사회의 남성 중심 카르텔이 견고하게 작동되던 시대에 가닿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기엔, 지나치게 자주 발견되는 미진함이다.

《수리남》, 넷플릭스의 새로운 구원투수로 등극할까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한국 시리즈 《오징어 게임》이 미국 에미상의 역사를 새로 썼다. 비영어 드라마 최초로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에미상에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이정재) 트로피를 들어올린 것. 올 2분기에만 100만 명에 달하는 가입자가 감소하는 등 부진을 겪고 있는 넷플릭스는 덕분에 오랜만에 체면치레를 했다. 기존 콘텐츠 수급보다 잘 만든 오리지널 시리즈 하나가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기도 하다. 한국 콘텐츠를 주목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수리남》에도 긍정적인 신호다. 동영상 서비스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공개 사흘 만에 TV쇼 부문 글로벌 6위, 닷새 만에 3위에 등극하는 등 초반 기세가 심상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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