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人3色’ 회화의 뉴트렌드 현장을 가다
  • 반이정 미술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0.30 15:05
  • 호수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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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 회화의 인습 배격한 허수영·유현경·정상곤 작가의 개인전 눈길

세라믹 타일로 천장을 빼곡히 수놓은 페르시아 건축물 장식이나 영국 빅토리아 시대 디자이너 윌리엄 모리스와 미술공예운동이 유행시킨 꽃과 이파리 패턴의 태피스트리며 벽지며 직물은, 화면을 빈틈없이 채우는 장식 기술이다. 장식으로 꽉 채운 화면 구성은 스토리텔링에 의미를 두지 않고, 높은 장식성에 집중하는 시각예술로 귀결된다. 패턴으로 촘촘하게 메운 화면은 보는 이에게 압도감을 주기에, 이런 시각예술을 일컬어 ‘공백 공포(Horror vacui)’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공백 공포 효과를 주는 시각예술은 안정된 수요를 가지고 있다. 우리 주변에는 균일한 무늬로 디자인된 의상과 일상품, 갖가지 배경화면이 있다. 미국 모더니스트 화가 잭슨 폴록이 바닥에 캔버스를 깔고 그 위에 물감을 흩뿌려 완성한 액션 페인팅도 균일한 패턴을 만든 점에서, 공백 공포 효과를 지닌 회화라 할 수 있다.

허수영 《무제 03》ⓒ임장활+학고재갤러리 제공
작품 앞에 선 허수영ⓒ임장활+학고재갤러리 제공

‘공백의 공포’ 효과 주는 시각예술

허수영 개인전(10월14일~11월19일, 학고재 갤러리)의 출품작에도 같은 미적 효과가 배어있다. 화초로 가득한 숲, 곤충 무리로 가려진 하늘, 불꽃처럼 빛나는 꽃으로 채운 밭, 풀잎마다 알알이 맺힌 이슬, 무한개의 별로 뒤엉킨 우주까지. 그려진 대상은 있되 구체적인 스토리를 담지 않는, 균질한 화면이 주는 시각적인 압도감을 주는 그림. 별이나 꽃, 곤충처럼 별나지 않은 자연을 옮긴 풍경화로 묶일 법하지만, 인공물의 흔적도 인적도 일절 없이 자연의 디테일의 총합으로 완전체에 이른 그림이니만큼, 새로운 스타일의 자연 그림이라 하겠다. 실존하는 대상을 그렸으되 스토리텔링 역할을 제한한 그림이어서, 형상을 그린 출품작에 달린 제목 대부분이 ‘무제’다.

허수영의 균질한 구상회화는 추상회화에 가깝다. 일부 작품에 적힌 제작연도가 5년 혹은 10년이 넘는 완성 기간으로 표시돼 있다. 같은 풍경을 사계절 동안 같은 캔버스에 옮기다 보니, 중첩된 물감의 나이테가 형성돼 화면이 두툼하다. 그림을 완성한 이후 작가의 마음에 변화가 생겨 새로운 덧칠로 새로 탄생한 그림도 있다. 대상을 객관적으로 옮기는 게 아니라, 그리는 대상과 그리는 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결과일 것이다.

미디어아트가 미술계의 절대 주류이던 시절이 있었다. 대략 2010년 전후로 회화 장르가 미술상 공모전이나 창작 스튜디오 입주 작가 선발 현장 등에서 선전하기 시작했다. 지루한 러닝 타임에 심각한 주제를 담는 미디어아트에 긴 피로감이 쌓였다고 생각한다. 회화의 반등을 이끈 데는 극사실풍 회화처럼 ‘잘 그린 그림’과 대중 선호도가 높은 팝아트풍 그림처럼 아트페어 부스에서 고정된 지분을 차지한 그림들의 몫이 컸다. 그런데 내가 주목하는 또 다른 경향은 회화의 오랜 인습에서 벗어나, 그림의 스토리텔링을 지우거나, 구상 대 추상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난 부류다. 필시 형상을 옮긴 그림이건만 전체적인 기운은 추상화의 질감을 지닌 회화가 출현했다.

허수영도 그런 경우다. 혹은 날 때부터 인터넷과 스마트폰 생활을 내면화한 세대가 지닌 ‘포스트 인터넷 미감’이 반영된 작품이다. 이처럼 새로운 회화에는 이전 세대에선 발견되지 않던 세대 특정성이 있다. 이 같은 회화의 변모에 대해 나는 ‘새로운 회화’라는 이름을 지었다. 내 컴퓨터에는 그런 스타일의 작품이나 작가를 보관하는 새로운 회화라는 폴더가 있다. 그만큼 새로운 회화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허수영이 인공물과 인적을 지우고 오로지 자연을 묘사한 디테일의 총합만으로 공백 공포 효과를 주는 새로운 풍경화를 만들었다면, 유현경은 세부 묘사를 무시하고 윤곽 없이 헐거운 경계선과 텅 빈 여백을 지닌 인물화와 풍경화를 그려왔다. 일례로 앞에 앉은 그림 모델을 하나도 닮지 않게 묘사하는 것에 더해, 작가가 모델로부터 받는 감정을 그림에 반영하는, 전적으로 주관적 초상화라 하겠다. 생김새를 결정하는 이목구비가 유현경의 초상화에선 때때로 지워져 빈 얼굴만 나타나기도 한다. 어딘지 덜 끝난 듯 보이는 마감 처리 하며 여백이 화면의 절반을 넘거나 과감한 붓질로 공간을 나눈 화면에선, 동양화와 서양화의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유현경 《둘(Two)》ⓒ이길이구갤러리 제공

2010년 전후 회화 강세와 함께 나타난 현상

나는 인연이 닿아 유현경의 그림 모델을 수차례 설 일이 있었는데, 미완으로 끝나 작업실 재방문을 약속하고 헤어진 그림이 있었다. 당시에는 미완으로 결정된 그림을 계속 바라보니 작가의 마음에 들어 재방문할 필요가 없다는 얘길 들었다. 실제로 나를 그린 그 초상화는 전시에도 출품됐다. 작가의 주관이 전적으로 중요한 그림. 10월 중순께 서울 강남 일대 전시장 두 곳에서 개인전을 마친 유현경의 전시 제목은 각각 ‘유현경 그림’(이길이구 갤러리)과 ‘그림, 만나는 방법 하나’(호리아트스페이스/AIF라운지)였다. 두 개인전의 제목마다 그리는 이의 자의식과 그리는 행위 자체를 앞세운 새로운 회화를 느끼게 된다.

2010년 전후 회화의 강세와 함께 나타난, 새로운 회화에는 기성 회화의 인습을 따르지 않는 세대 특정성이 있다. 그렇다 한들 회화를 향한 새로운 시도가 지금처럼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이전 세대에서 없었을 리는 없다. 정상곤(1963년생) 개인전 《보잘것없는 풍경_다시 읽기》(10월19일~11월9일, 칼리파갤러리)는 세대로 나누면 새로운 회화 세대로 분류되긴 어렵지만, 새로운 회화 변모의 먼 시발점쯤 될 법하다. 전시 제목에서 대놓고 밝힌 대로 정상곤이 택한 풍경은 묘목의 품종이 대단치 않거나 품종의 고유성을 살리지 않고, 그리는 이의 심경을 투사하는 매체로 나무를 선택한 경우처럼 보인다. 그 점에선 인물의 고유성을 살리지 않고, 그리는 이의 심경을 투사하는 매체로 모델을 선택한 유현경의 초상화와 맥을 같이한다.

정상곤 《해질녘》ⓒ정상곤 제공

정상곤의 풍경화는 야산의 흔하디흔한 수목을 고른 만큼 풍성하고 화려한 자연을 보여줄 의사가 없다. 실 뭉치처럼 처리된 잔가지 묘사와 이미 그려진 부위를 하얀색으로 지워버린 듯한 그림도 있다. 전시장에서 작가와 방문객이 나누는 대화를 어깨너머로 듣자니, 유독 어둡게 처리된 어떤 풍경화에 대한 질문과 모친상을 당한 직후의 감정이 반영됐다는 작가의 답이 오갔다. 또 이제 지인들의 부고를 자주 접하면서 ‘이젠 내 차례’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는 말도 이어졌던 것 같다. 그 심경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심경을 투사하는 일기장 같은 미술 창작이자, 아무나 알아보기 힘든 비언어의 고백록. 그의 그림과 통하는 소수만이 이심전심으로 연결되는 플랫폼으로서의 그림. 그게 미술(가)이 누리는 사소하지만 독보적인 호사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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