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 힘 빼고 ‘포용의 리더십’으로 돌아온 홍명보
  • 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0.30 11:05
  • 호수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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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을 17년 만의 K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재기 성공’
“브라질월드컵 실패가 내 축구 인생에서 가장 아끼는 시간”

10월16일, 춘천송암스포츠타운에서 강원FC를 꺾으며 2022 K리그1 우승을 확정한 홍명보 울산 현대 감독은 기자회견 중 난데없는 물세례를 받았다. 울산의 막내뻘 선수인 설영우·김민준이 난입해 홍 감독에게 물을 뿌려대며 환호한 것이다. 당황한 표정에 특유의 뻗친 머리가 가라앉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홍 감독은 “내 저것들 이럴 줄 알았다”며 미소를 지었다. 원정 온 1000여 명의 울산 팬 앞에서 헹가래를 칠 때도 설영우가 홍 감독의 머리끄덩이를 잡은 게 포착됐다. 우승의 환희였지만 한때 대한민국 최고의 카리스마라고 불린 홍 감독과 서슴없이 장난치는 젊은 선수들의 모습은 신선한 장면으로 다가왔다.

“물먹는 것보다는 맞는 게 훨씬 나은데요?” 홍 감독의 우승 소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뼈아픈 실패나 좌절을 의미하는 은어인 ‘물먹다’는 무려 17년간 울산이라는 팀을 괴롭힌 표현이었다. K리그의 명문으로 통하지만 우승 횟수만 놓고 보면 초라해졌다. 1996년과 2005년 단 두 차례에 불과했다. 최대 라이벌 포항 스틸러스는 5회고, 같은 현대가(家)지만 2000년대 들어서야 본격적인 도약을 한 신흥 강호 전북 현대도 무려 9회의 우승에 성공한 터였다. 울산은 준우승만 10회를 한 K리그 최고의 2인자였다. 2005년 이후 무려 17년간 ‘비원(悲願)’과 같았던 우승을 향한 울산의 한(恨)은 홍 감독 부임 2년 차에 드디어 풀렸다.

ⓒ연합뉴스

축구협회 개혁 주도한 행정가 면모에 호평 이어져

홍명보 감독은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한국 축구 사상 첫 메달 획득이란 성공신화를 쓰며 선수에 이어 감독으로서 한국 축구사 영광의 페이지를 장식했다. 하지만 2년 뒤 브라질월드컵에선 치명적인 실패를 경험했다. 한없이 커 보였던 대한민국의 축구 영웅은 무수한 오명 속에 천길 낭떠러지로 추락했다. 인생의 가장 큰 시련을 겪은 뒤 휴식기를 가져야 했다. 2016년 항저우 감독으로 전격 부임하며 중국 프로축구에 도전했으나, 이 역시도 결과적으론 실패로 끝났다.

2017년 말에는 행정가로 일선에 복귀했다. 러시아월드컵 예선 과정에서의 여러 실책으로 대한축구협회에 대한 여론이 부정적으로 변하자 정몽규 회장은 쇄신을 약속하며 새로운 인물을 행정 일선에 배치했다. 홍 감독은 축구협회 행정을 총괄하는 전무이사를 맡았다. 슈트 대신 청바지를 입고 출근하는 행정가 홍명보에 대해서는 호평이 이어졌다. 홍콩에서 감독·기술위원장으로 성공하며 해외에서 국제적 감각을 키워가던 비주류 축구인 김판곤을 대표팀 전력강화위원장으로 선임하며 시스템을 바꿔갔다. 김 위원장은 홍명보 전무의 신뢰 속에 전문성을 갖춘 소위원회를 구성해 대표팀 운영, 유소년 발굴 등 각 파트의 역량을 끌어올렸다. 그 결과 2017년부터 2019년까지 한국 축구는 아시안게임 우승, 20세 이하 월드컵 준우승, 17세 이하 월드컵 8강 등 역대급 성과를 냈다.

10월23일 울산 문수축구경기장에서 하나원큐 K리그1 우승팀인 울산 현대 선수들과 홍명보 감독이 우승컵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연합뉴스

카리스마 최소화+수평적 팀 문화 장착…다시 빛난 리더십

대표팀 운영이라는 축구협회의 가장 큰 임무를 김판곤 위원장에게 맡긴 홍 전무는 한국 축구계의 여러 갈등과 병폐를 해소하는 데 집중했다. 지방 축구협회와 각종 대회를 방문해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유소년, 학원 축구에서 발생하는 각종 트러블로 학부모나 지도자들이 항의 방문하면 직접 자신의 방으로 초대해 설명과 설득을 하기도 했다. 벨기에·프랑스·크로아티아 등을 방문해 선진 유소년 육성 시스템을 관찰해 국내 실정에 맞춘 도입도 추진했다. 축구협회 내부에는 행정가 홍명보가 오랜 시간 함께 일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2020년 말, 홍 전무는 3년간의 행정 업무에 마침표를 찍었다. 정몽규 회장의 가장 큰 목표였던 대한축구협회장 3선이 확정된 직후였다. 2020년 통산 9번째 K리그1 준우승에 그치며 또 한 번 좌절한 울산은 김도훈 감독과의 결별을 내부적으로 확정하고, 홍명보 감독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다시 현장 지도자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울산 사령탑에 부임한 홍명보 감독은 위닝 멘털리티를 세우는 작업부터 하겠다고 취임 일성에서 밝혔다. 우승을 위한 마지막 경쟁에서 전북을 비롯한 경쟁자들에게 번번이 무너진 이유를 분석, 체질 개선을 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러나 부임 첫해인 지난 시즌 전북과의 마지막 맞대결에서 2대3으로 패했고, 그 차이를 좁히지 못하며 준우승에 그쳐야 했다.

2022 시즌을 앞두고 애제자인 국가대표 센터백 김영권을 필두로 아마노 준, 레오나르도 등 특급 외국인 선수를 보강해 전북에 필적하는 스쿼드를 갖췄다. 변수도 있었다. 시즌 준비가 막바지에 들어가던 찰나에 이동경과 이동준은 독일로, 오세훈은 일본으로 이적했다. 새 시즌을 위한 구상이 상당 부분 깨진 상황. 선수단 안팎이 불안해할 때 홍 감독은 전체 미팅에서 일장 연설을 했다. “나는 지금도 충분히 팀이 강하다고 믿는다. 여러분과 내가 서로를 이해하는 단계에 왔기 때문이다. 몇몇 선수의 이탈로 흔들리지 않을 테니 서로를 믿고 가자”고 말했다.

팀 운영 방식과 선수단 문화도 과거보다 포용력이 커지고 투명해졌다. AFC 챔피언스리그에서의 부진을 제외하면 좀처럼 선수들 앞에서 카리스마로 대표되는 자신의 이미지를 드러내지 않았다. 매주 두 차례 주장 이청용과 부주장들을 코칭스태프 회의에 참석시켜 운영 계획과 전술적 의도를 더 디테일하게 선수단과 공유했다. 미디어를 상대할 때도 궁금증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숨기지 않았다. 브라질월드컵 당시 ‘의리 축구’라는 프레임에 갇혀 가림막 뒤에 숨은 패거리 문화로 외부에 이미지화된 것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선수단 내부에도 수평적 문화가 자리 잡았다. 서브 골키퍼 조수혁은 3년 전부터 팀 내부의 다양한 모습을 소개하는 유튜버로 활동 중인데, 홍 감독은 그 활동을 적극 권장했다. 구단에서 제작하는 다큐멘터리 《푸른파도》는 호평을 받았다. 시즌 중 라커룸이나 훈련장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시리즈물인 《푸른파도》는 홍 감독의 협조 속에 원활히 진행됐다. 오히려 《푸른파도》를 통해 어떤 과정을 거쳐 팀이 승리하는지, 패배했을 때는 어떻게 극복하는지가 생생하게 전달되며 팬들과 상호작용이 이뤄졌다. 선수단은 이청용·박주영을 중심으로 휴식 시간에 캠핑을 떠나는 등 건전한 문화를 꾸려 갔다.

울산에 17년 만의 우승을 안긴 공을 인정받아 홍 감독은 2022 시즌 K리그1 감독상도 수상했다. 수상 후 그는 “성공과 실패는 밖에서 평가한다. 내년에 트로피를 못 들면 실패했다고 할 것이다. 나 자신은 그 경험을 토대로 다음 단계로 어떻게 나아가지는지에 따라 성공과 실패를 말하고 싶다. 브라질월드컵을 내가 축구 인생에서 가장 아끼는 시간으로 삼는 이유다”고 말했다. 감독으로서 정점에 섰던 8년 전의 판단과 선택, 그것이 촉발한 결과를 가슴 한편에 넣고 돌아온 그는 새로운 고민 앞에서 그 실패를 꺼내 성공의 길을 찾아가는 불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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