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우크라 전쟁, 종전은 아니라도 휴전 가능성은 있다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2.18 10:05
  • 호수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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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 일변도 젤렌스키의 입장 변화 감지
‘미국식 핵 선제타격’ 위협하는 푸틴과 겨울 담판 가능성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곧 해를 넘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혹한 속에서 전쟁 중단 담판을 할 수 있을까? 12월 중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와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의미 있는 움직임이 각각 나오면서 ‘명예로운’ 평화협상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우선 젤렌스키 대통령이 12월11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그리고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터키) 대통령과 릴레이 통화를 했다는 사실이다. 젤렌스키는 이 세 지도자와 자주 대화했지만, 하루에 연쇄 접촉한 것은 이례적이다.

주목할 점은 세 지도자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협상을 위한 나토 측 핵심 인사라는 사실이다. 바이든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최대 군사·경제 지원국인 미국의 지도자이고, 마크롱은 초지일관 우크라이나에 러시아와 협상하라고 요구해 왔으며, 에르도안은 지난 7월 유엔과 함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곡물 수출 재개 합의를 이뤄냈다.

(왼쪽)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TASS 연합·EPA 연합

젤렌스키, ‘정의로운 평화’에 동의

심지어 마크롱은 우크라이나와 충돌할 정도로 협상을 강조해 왔다. 6월4일 자국 언론 인터뷰에서 “러시아에 굴욕감을 줘서는 안 된다”며 “그래야 외교적 수단으로 출구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해 우크라이나의 반발을 샀다. 최근인 12월3일에도 프랑스 TF1 방송 인터뷰에서 “유럽이 미래의 안보 틀을 준비할 때”라며 “우리는 어떻게 동맹과 회원국을 보호하고 러시아가 협상 테이블에 들어왔을 때 어떻게 (안전) 보장을 제공할 것인지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해 우크라이나의 비난에 직면했다. 젤렌스키는 그런 마크롱과 이날 1시간 가까이 통화하고, 이날 밤 대국민 연설에서 “마크롱 대통령과 국방·에너지·경제·외교에 관해 매우 의미 있는 대화를 했다”며 “다음 주에 중요한 결과들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눈에 띄는 것은 젤렌스키가 이날 바이든과의 통화에서 유엔 헌장의 근본 원칙에 기반을 둔 ‘정의로운 평화’에 동의했다는 사실이다. 전쟁을 끝내는 유일한 길은 러시아가 2014년 2월 합병한 크림(우크라이나어로 크름)반도를 우크라이나가 수복하고, 러시아 침략자를 패퇴시키는 것뿐이라고 주장해온 젤렌스키가 바이든과의 통화에서 비록 원론적이지만 평화를 이야기한 것은 눈길을 끌 수밖에 없다. 백악관은 젤렌스키의 발언을 환영했다.

젤렌스키는 11월 초 종전 협상론이 나오자 우크라이나 영토의 완전성 회복(점령지 반환)과 러시아의 전쟁 배상금 지급, 러시아에 대한 전쟁범죄 책임 추궁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조건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는 러시아가 받아들일 가능성이 거의 없는 내용이라 사실상 협상을 거부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날 통화에서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러시아의 미사일을 막을 수 있는 방공 미사일(미사일 요격용 패트리엇 미사일)을 공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겨울을 앞둔 지난 10월부터 러시아의 드론과 미사일 공격으로 전기·급수 등 생활 인프라가 대대적으로 파괴된 우크라이나에 미사일 요격 무기체계는 경제 지원과 함께 ‘생존 필수품’이 아닐 수 없다. 젤렌스키는 바이든과의 통화에서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전례 없는 원조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고 이날 대국민 연설에서 밝혔다. 미국이 겨울나기가 힘들어진 젤렌스키에게 이 두 가지를 당근으로 제시하며 ‘정의로운 평화’, 즉 협상을 압박했을 가능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에르도안과의 통화에선 흑해 곡물 수송 보장안을 둘러싸고 ‘매우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눴다고 밝혔다. 로이터통신은 이날 릴레이 통화와 관련해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이 10개월째 질질 끌고 있는 상황에서 ‘외교’ 활동이 증가했다”고 평가했다. 전쟁의 키워드가 군사에서 외교로 전환하고 있는 셈이다.

젤렌스키가 평화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배경에는 우크라이나 인프라에 대한 러시아의 미사일·드론 집중 공격으로 우크라이나 국민의 상당수가 현재 전기·난방이 없는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12월13일 프랑스 파리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뉴스가 나왔다. 마크롱 대통령 주재로 전 세계 46개국과 24개 국제기구 관련자가 모여 우크라이나에 10억 유로(약 1조3800억원)를 지원하기로 했다는 사실이다. 4억1500만 유로(약 5700억원)를 에너지 부분에, 나머지를 보건의료·물·교통 등에 각각 쓰기로 했다는 사실은 혹한기 우크라이나 국민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짐작하게 한다. 유럽연합(EU)은 젤렌스키의 요청을 받아들여 전력 사용을 40%나 줄이는 3000만 유로(약 415억원) 상당의 LED 전구 3만 개와 전기발전기를 보내기로 했다. 이런 긴박함은 젤렌스키를 협상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크림반도가 평화협상의 최대 걸림돌”

문제는 푸틴 대통령의 태도다. 푸틴은 12월9일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에서 열린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정상회의 기자회견에서 핵무기 사용과 관련해 “미국은 선제타격 개념을 갖고 있고, 무장해제 타격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며 “자국 안보를 위한 미국의 이런 개념을 (우리도) 채택하는 문제를 생각하고 있다”고 서방을 압박했다. 푸틴은 “선제타격은 지휘시설을 파괴할 의도에서 하는 것으로, 러시아의 순항미사일과 극초음속 시스템은 미국보다 더 현대적이고 더욱 효율적”이라며 구체적인 무기 시스템까지 언급했다.

발언은 핵 윤리학에서 말하는 ‘핵무기 선제사용 금지(No First Use)’ 원칙의 폐기를 의미해 국제사회가 우려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소련 붕괴 뒤 선제타격은 하지 않고 대신 적에게 핵공격을 받을 경우 핵으로 보복한다는 원칙을 확립했다. 하지만 푸틴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수시로 핵무기를 입에 올리며 우크라이나와 서방을 압박해 왔다.

그동안 푸틴은 지난 9월초 우크라이나 동북부 하리키우·도네츠크·루한스크 등 3개 주에서 우크라이나군의 대대적인 역습으로 러시아군이 무질서하게 밀려난 뒤와 11월10일 남부 헤르손에서 철수한 직후 등 전세가 불리할 때마다 핵무기를 언급했다. 권위에 대한 도전을 원천봉쇄하면서 서방의 우크라이나 추가 지원을 억제해 보려는 의도로 보인다.

한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정전 조건이 좁혀질 가능성이 적은 상황에서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기디언 라크만 국제 담당 칼럼니스트는 12월12일 “평화협정까지 가지 않더라도 한국처럼 (정전협정으로) 전쟁을 일시 중단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11일에는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크림반도에 대한 격렬한 요구가 러시아-우크라이나 평화협상 가능성을 희박하게 한다”고 양비론적으로 비판했다. 전쟁의 정당성이나 국제법 위반보다 전투행위의 조속한 중단에 무게를 둔 지적이다. 평화협상론은 이렇게 무르익고 있다. 관심은 실질적인 행동의 개시 시기에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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