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측근들 ‘잠 못 이루는 밤’
  • 나권일 기자 (nafree@sisapress.com)
  • 승인 2003.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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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억 달러 폭로·대북 송금·나라종금 사건 등 수사 줄이어
송광수 검찰총장이 평검사로 일하던 1980년대 초반의 일이다. 대구 출신으로서 서울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사시 13회 엘리트인 송검사는 어느 날 한 언론사의 고위급 인사와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인연을 잘 맺어둔다면 검사로서 앞날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자리였다. 송검사의 학교 선배이기도 한 그 인사가 친분을 돈독하게 하자며 폭탄주를 건넸다. 송검사는 “선배가 주는 잔이니 한잔은 받겠습니다. 하지만 더 마시면 저한테는 술이 아니라 독입니다”라며 술을 마신 뒤 바로 맥주잔을 뒤집어놓았다. 좌중의 분위기가 썰렁해졌고, 술잔을 건넨 인사가 도리어 무안해질 정도였음은 물론이다. “검사가 가장 적성에 맞는다”라는 송광수 검찰총장의 ‘배짱’과 ‘소신’을 드러내는 일화 한토막이다.

평소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강조했던 송광수 총장이 취임하면서 검찰이 사정 칼을 빼어들었다. 그동안 미진했던 검찰 수사가 급물살을 타고 있고, 정치권 일각에서는 ‘4월 사정 한파설’이 돌고 있다. 검찰 수사는 정치권, 특히 민주당 구주류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들을 겨냥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지난 4월3일, 송광수 총장은 민주당 설 훈 의원이 제기했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20만 달러 수수 의혹이 ‘청와대 기획 폭로’설로 번지자 피해자 추가 고소가 있다면 검찰이 재수사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자 설 훈 의원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해 재판을 벌이고 있는 윤여준 한나라당 의원은 의혹의 진원지로 알려진 김현섭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 등을 고소하겠다고 밝혔다.

정치권에서는 대통령 친인척 관리 업무를 맡은 민정수석실이 정보기관의 보고가 거쳐가는 통로라는 점을 감안해, 당시 김현섭 민정비서관이 정보기관의 첩보를 먼저 입수한 뒤 김희완 전 서울시부시장의 간접 확인을 거쳐 설 훈 의원에게 제보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본다. 만약 20만 달러 수수 폭로와 이회창씨와 관련한 ‘빌라 게이트’ 폭로가 정보기관의 도움을 받은 것이라면 국정원 2차장 산하 정보 수집 부서가 또 한번 요동할 수 있다.

검찰은 당시 이재신 민정수석이나 박지원 비서실장이 김현섭 비서관의 ‘폭로’를 사전에 알고 있었느냐는 점도 수사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최규선·김홍걸 관련 의혹이 한창 제기되던 지난해 4월8일, 김현섭 민정비서관을 인터뷰했던 대전 지역의 언론인 ㄱ씨는 “김비서관이 인터뷰 도중에도 민정수석을 비롯해 청와대 수석실과 최규선씨 사건에 대해 여러 차례 통화하는 것을 보았다”라고 말했다. 현재 미국 헤리티지 재단 연구원 자격으로 워싱턴에 머무르고 있는 김현섭 전 비서관은 “사실이 아닌 부분도 있으나 지난 것은 모두 함구하겠다”라고 말해 장기 체류 가능성을 시사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4월16일 출범하는 ‘대북 송금 특검’ 조사를 앞두고 있다. 송두환 ‘남북 정상회담 관련 비밀 송금 의혹 사건 등의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는 지난 4월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특검의 수사 대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김 전 대통령은 “특검을 해도 걱정 없다. 책 잡힐 일은 없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1989년 서경원 전 의원 밀입북 사건 때 김대중 평민당 총재를 조사한 뒤 불구속 기소해 법조계에서 ‘DJ 주임검사’로 불리는 이상형 서울고검 검사(54)는 “DJ는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는 거짓말쟁이다”라며 특검이 제대로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대북 송금 사건을 수사했던 서울지검 형사9부는 3월26일, 박지원 전 비서실장과 임동원 전 청와대 외교안보통일 특보·한광옥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기호 전 청와대 경제노동복지특보·이근영 전 금융감독위원장·김보현 국정원 3차장 등 김대중 정부의 핵심 인사들을 출국 금지시켰다.

검찰은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들과 관련한 의혹도 다시 뒤지고 있다. 지난 4월4일, 대검 중수부(부장 안대희)는 ‘나라종금 로비 의혹’을 재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안희정·염동연 씨는 1999년 나라종금 대주주인 김호준 전 보성그룹 회장으로부터 각각 2억원과 5천만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의 나라종금 수사는 동교동계의 또 다른 중진 인사도 겨냥하고 있다. 민주당 주변에서는 나라종금이 퇴출 저지를 위해 정치권에 전방위 로비를 벌였다는 의혹의 핵심에 동교동계 실세이던 중진 ㅎ씨가 있다는 설이 파다하다. 지난해 나라종금의 ‘비자금 관리 내역서’를 확보하고도 본격 수사를 주저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검찰은 강도 높은 수사를 위해 대검 산하 공적자금 합동단속반장을 민유태 중수1과장 체제에서 김수남 중수 3과장 체제로 바꾸었다. 대검 공적자금 수사반의 정치인 수사와 별개로 서울지검 형사9부는 ‘SK글로벌’ 사건과 관련해 정치 자금 수수 인사 명단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민주당 인사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검찰 칼날에 동교동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부터였다. 지난해 5월3일, 동교동계 좌장 권노갑 전 의원은 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수원지검 특수부 곽상도 부장검사는 지난 2월, 대양상호신용금고 실소유주인 김영준씨로부터 1억원을 받은 민주당 김방림 의원을 구속한 뒤 3월21일에는 또 다른 알선 수재 혐의로 추가 기소했다. 동교동계 인사인 이윤수 의원도 3월25일 알선 수재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검찰 수사가 민주당에 집중되는 데 대해 동교동계 인사들은 지난 3월 검찰 인사에서 영남 출신 간부들이 요직을 장악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지난해 호남 출신 검찰 간부의 대표 주자였던 김승규·김학재 고검장은 옷을 벗었고, 정충수·박종렬·조규정 지검장은 ‘좌천’성 인사를 당했다. 현재 호남 출신으로 김종빈 대검 차장·이기배 대검 공안부장·문성우 서울지검 2차장 검사가 버티고 있지만 김대중 정부 때보다 영향력이 크게 퇴조했다. 노무현 대통령이나 강금실 법무부장관과 ‘코드’가 맞는 것으로 알려진 손진영 서울고검 검사나 성영훈 법무부 검찰1과장, 조희진 법무부 검찰국 검사는 모두 비호남 출신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이후 검찰 수사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말해 왔다. 강금실 법무부장관은 “(외압으로 비칠 수 있는) 전화는 내가 받아 처리하겠다”라며 ‘방패’ 노릇을 자임했다. 송광수 검찰총장과 고시 동기인 ㅇ변호사는 “송총장에게는 정치적 외압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강성’ 검찰총장을 만난 민주당 인사들의 시름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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