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도 울고 가는 그들만의 세상
  • 주진우 기자 (acsisapress.comkr)
  • 승인 2003.04.1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입을 옷이 마땅치 않으면 해외에 나가 구입하고, ‘유기농’ 딱지가 붙은 식품이면 아무리 비싸도 주저없이 산다. 불경기를 모르는 ‘부자 특별구’ 서울 강남 타워팰리스 주민들이 이즈음
사람들이 도무지 지갑을 열지 않는다.” “외환위기 때보다 경기가 더 안 좋다.” 거리에서, 시장에서 연신 볼멘 소리가 터져 나온다. 경기가 본격적으로 불황 국면에 들어섰고 이라크 전쟁·북한 핵 등 악재가 겹치면서 시민의 지갑이 굳게 닫혔다. 재래 시장과 백화점은 물론 그동안 승승장구하던 대형 할인점·인터넷 쇼핑몰 업계도 불황 대열에 합류했다. 외환 위기 때 호화 쇼핑으로 눈총을 샀던 부유층마저 씀씀이가 눈에 띄게 조심스러워져 명품 매장이 즐비한 서울 청담동 거리에도 발길이 뚝 끊겼다. 하지만 불경기니 소비 위축이니 하는 말이 통용되지 않는 곳이 있다. ‘귀족 커뮤니티’로 통하는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 사람들에게 불황은 그야말로 강 건너 불이었다. 타워팰리스에 사는 김 아무개씨(27·대학원 휴학생)는 3월30일 친구 3명과 함께 하와이에 다녀왔다. 주말을 이용한 2박3일 짧은 여행이었다. 여행 목적을 묻자 그는 “봄옷이 마땅치 않아서”라고 말했다. 김씨는 친구나 가족과 1년에 대여섯 번 정도 해외 여행을 하는데, 이때 쇼핑을 하는 편이라고 했다. 그래서 한국 백화점에는 갈 일이 없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 그는 고급 레스토랑에 갔던 것과 천 달러짜리 와인을 산 것이 가장 즐거웠다고 했다. 한국에서 1주일 전에 예약해 두었다는 이 유명 레스토랑에서 김씨 친구는 100 달러짜리 지폐 50장을 한 끼 저녁 값으로 지불했다.

사흘 동안 김씨가 쓴 돈은 약 천만원. 같이 간 친구들도 돈을 많이 썼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자기는 지극히 검소한 사람이라고 했다. “한 친구는 쇼윈도에 진열된 5백만원이 넘는 조르지오 아르마니 수트를 사면서 옆에 진열된 3백만원짜리 드레스를 여자 친구 선물로 샀다.BMW를 타는 친구는 2억원짜리 ‘죽이는 페라리’를 보고 사려고 했다. 지금 그 친구는 그 차를 들여올 궁리를 하고 있다.”

김씨와 그 친구들의 경우처럼 알짜 부자들은 불황을 모른다. 김씨는 “이 동네에서는 불황이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했다. 오히려 지금이 부자들에게는 호시절이라는 소리도 들린다. 시중에 돈이 없을 때는 자연히 돈 있는 사람들이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다. 외환 위기 때에는 부동산 가격이 떨어져 애를 먹었지만 지금은 부담도 거의 없다. 1회 이용료가 100만원에 달하는 피부미용 클리닉, 일본에서 전문가를 모셔온 마사지 업소 등 상류층 전용 시설에는 손님이 차고 넘친다. 그래서 천만원 이상을 보증금으로 내는 회원제를 통해 사람을 걸러내는 실정이다. 타워팰리스 사람들은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자산관리 서비스인 프라이빗뱅킹은 그다지 믿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의 정보가 유출될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대신 부동산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타워팰리스 앞에 위치한 한 부동산중개업소 사장은 “쓸 만한 부동산이면 무조건 잡아 달라는 주문이 크게 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융통이 쉽고 위험 부담이 적은 금 모으기에 부자들은 부쩍 관심을 두고 있다.

이들은 북한 핵 문제로 환율이 불안한 양상을 보이자 달러 사재기에 나섰다. 1년 만기 외화예금 금리는 연 1%대로 원화예금 금리(연 4.5%)보다 훨씬 낮아 이자에서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달러화 선호 심리는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고 한다. 아예 투자처를 해외로 돌려 해외 유명 펀드에 직접 투자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최근 미국의 석유회사 주식을 샀다는 박 아무개씨(52·금융업·타워팰리스 거주)는 “돈을 벌겠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내 돈을 잃고 싶지 않아서다. 어차피 해외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 달러가 필요하고 노후를 외국에서 보낼 생각도 있어서 앞으로 재산의 일부는 달러로 운용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타워팰리스 귀족들의 세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먹거리다. 그들은 자신에 대한 투자, 특히 먹는 것에 집착했다. 박씨의 저녁 식탁에는 한 병에 10만∼20만 원 하는 와인이 빠지지 않는다. 건강을 생각해 야채를 많이 먹는데 그날 그날 팔당 상수원 보호 지역 유기농가가 재배한 채소가 반드시 올라온다. 박씨가 좋아하는 거위간 ‘푸아그라’가 종종 식탁에 오르기도 한다. ‘푸아그라’는 재료 값만 100g에 10만원이 넘는다.

타워팰리스 주민들은 음식을 잘 시켜 먹지 않는다. 짜장면의 경우 단지가 복잡하고 검문이 심해 도착할 때면 항상 면이 불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단지 내에 위치한 중국집 ‘친친 팰리스’가 인기 있는 음식점 중 하나다. 이 곳에서는 4만∼5만 원대 정식이 가장 잘 나간다고 한다. 중학생들끼리 와서도 대부분 코스 요리를 주문한다고 했다. 단지 앞에서 만난 김희진양(중학교 2학년)은 “친구들끼리 중국집에 가서 탕수육과 짜장면을 시키는 촌스런 애들은 없다”라고 말했다. 친친 팰리스의 탕수육은 작은 것이 2만3천원, 큰 것은 3만5천원 그리고 짜장면 한 그릇은 6천원이다.

제과점도 유기농 제품과 고가 전략으로 파고들었다. 타워팰리스 단지 옆에 위치한 ‘김영모 과자점’에는 첨가 물질이 전혀 없고 호밀로만 자연 발효시킨 유기농 빵 제품만 10여 가지에 이른다. 또 모차르트 음악을 들려주면서 발효시킨 ‘모차르트 식빵’도 인기다. 김영모 사장은 “유기농 빵과 가격이 비싼 고급 케이크류가 다른 점포보다 훨씬 많이 나간다”라고 말했다. 타워팰리스 단지 내에 있는 신세계백화점이 운영하는 슈퍼마켓 ‘스타수퍼’는 이들의 식생활을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슈퍼가 자랑하는 쇠고기는 일본 유명 고기 회사의 ‘화우’ 방식으로 생산되었다. 소들에게는 곡류와 맥주 찌꺼기를 주로 먹이고, 병은 항생제 대신 한약재로 다스린다.

출하 직전 한 달 동안은 독방에 넣고 스트레스를 줄여 육질을 좋게 한다. 가격은 100g당 8천∼9천 원. 동네 슈퍼마켓의 한우 제품보다 두 배 이상 비싼 값이다. 소는 독방에 가두어 기른 것이지만 닭들은 야산에서 기른 토종이다. 이 닭들이 야산에 낳아놓은 달걀도 짚으로 엮어 판다. 그 옆에 진열된, 인삼 엑기스를 넣은 오리알인 정삼란은 6개에 7천7백원. 달걀이 냉장고 안에 진열되어 있다는 것이 이채롭다.

야채 코너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친환경’ ‘유기농’이라는 문구다. 주먹만한 딸기가 보기에도 먹음직했지만 이 슈퍼에서는 구석 자리에 밀려나 있었다. 가운데 자리는 작고 못 생긴 유기농 딸기 차지이다. 야채 코너 점원은 “유기농이라는 딱지가 붙지 않으면 손님들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라고 말했다. 야채 코너 가운데 최근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신선 코너. 밭에서 오전 6시에 수확한 채소를 오전 11시부터 판다. 스타수퍼에서는 수입품 비중이 80~90%다. 라면 자리는 이탈리아산 스파게티가, 커피 자리는 영국산 홍차가 차지하고 있다. 수입품 가운데서는 특히 일본 제품의 종류가 다양하다. 스타수퍼 식품 매장에서 가장 잘 나가는 품목은 단연 치즈와 와인이다. 치즈·와인 코너의 하루 매출액은 4백만∼5백만 원. 이는 강북의 대형 백화점 치즈·와인 코너의 두 배 반에 이르는 매출액이다. 슈퍼 바로 맞은편에 대형 와인숍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타워팰리스 사람들이 얼마나 와인을 즐겨 찾는지 짐작할 수 있다. 대부분 해외 거주 경험이 있는 타워팰리스 거주자들에게 와인과 치즈는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이라고 한다. 저녁 밥상과 다과상에 치즈와 와인이 빠지지 않는다. 타워팰리스 옆에 위치한 대림 아크로빌에 사는 한 성형외과 의사는 “이 동네에서 손님은 방문할 때 와인을 가지고 가고, 손님을 치르는 집에서는 안주로 치즈를 내놓는 것이 일상화했다”라고 말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위기 상황이다 싶으면 최고급 치즈와 와인을 사재기한다. 비싸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좋은 제품이 공급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거다.” 타워팰리스에 사는 정 아무개씨는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 날, 단지 내에 있는 와인 가게에 들렀다가 와인을 사재기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타워팰리스에 사는 대학원생 정영욱씨(28)는 “스크류바가 먹고 싶어 슈퍼에 갔는데 그런 종류의 아이스바는 아예 없었다. 너무 고급 식품에만 신경 쓰다 보니 꼭 필요한 것은 빠트렸다. 참 이상한 슈퍼다”라고 말했다. 스타수퍼를 찾은, 서울 신촌에 사는 신미희씨(26)는 ‘달나라’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곳은 불황은 물론 한국이라는 생각도 잊게 했다”라고 말했다. 타워(tower) 팰리스는 불황이 미치기에도 너무 높이 솟아 있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