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 인기 기업 '섬성', 1등 CEO '이건희'
  • 장영희 기자 (jjang@e-sisa.co.kr)
  • 승인 2000.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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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일반인 대상 선호도 조사/ 가장 싫어하는 대기업·최고 경영자는 현대와 김우중
삼성과 이건희.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기업과 최고경영자(CEO)이다. 최고 경영자 하면 한국인은 가장 먼저 현대 창업자 정주영 전 명예회장을 떠올리지만, 그는 호감도에서 이건희 회장에게 뒤진다. 흥미로운 대목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기업과 최고경영자가 가장 싫어하는 기업·경영자와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삼성과 현대, 이건희·정주영·김우중 씨는 한국인이 좋아하면서도 싫어하는 애증의 대상인 셈이다. 이같은 사실은 〈시사저널〉이 여론조사 전문 기관인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지난 1월15∼17일 '한국인의 기업·최고경영자(CEO)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 드러났다.
이번 조사에서 한국인들이 이건희 회장을 가장 선호한 이유는 그의 경영 능력을 인정한 것이지만, 그가 한국의 최대 기업군인 삼성을 이끌고 있다는 점 역시 떼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1987년 아버지이자 삼성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경영권을 승계했다. 올해로 14년째인 이건희의 삼성은 선대 회장 때보다 놀랍도록 커지고 단단해졌다.

1993년부터 이회장의 경영 철학이자 '자식과 마누라 빼고는 다 바꿔 보자'는 슬로건으로 널리 알려진 '질경영'은 재계 전문가들로부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버지가 만든 삼성전자를 한국의 대표 기업이자 세계 일류 기업으로 발전시킨 공로 역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연령 별로 보면 50대가 이회장에 대해 가장 후했고 30대가 가장 박했다. 고 이병철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CEO 4위에 오른 점도 흥미롭다. 삼성의 1,2 세대 오너 경영인이 한국인의 뇌리에 얼마나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고 이병철 회장과 같은 1세대 경영인인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다. 비록 이건희 회장에게 밀렸지만, 1,2위 차가 오차 범위에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1위나 진배없는 2위다. 한국인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그의 도전 정신과 개척 정신을 높이 산다. 그가 한 시대를 풍미한 걸출한 경영자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패착은 경영 일선 은퇴를 선언한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두 아들에게 그룹 경영권을 맡기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지난해까지도 그가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믿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국인들이 정씨를 이건희 회장 못지 않게 좋아하면서도, 싫어하는 경영자로 두 번째로 많이 꼽은 이유는, 사회적 공기인 현대를 좌지우지한 '황제 경영'의 폐해를 절감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왕회장'으로 불린 그는 현대 내에서 제왕적 지위를 누렸다. 그의 말은 곧 법이었다. 지난해 형제간 경영권 분쟁을 초래한 근본적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실제 싸움의 당사자인 그의 아들들보다 책임이 더 크다. 지난해 12월 7개월 만에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으로 경영 일선에 복귀한 정몽헌 회장은 싫어하는 기업인 4위를 차지했다. 딴살림을 차려 능력 있는 오너 전문 경영인으로 평가받겠다고 포부를 밝힌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또한 일곱 번째에 올랐다. 싫어하는 기업인 명단에 현대 삼부자가 모두 거론된 것은, 지난해 경영권 분쟁이 일반 국민들에게 얼마나 부정적 영향을 미쳤는지를 잘 드러낸다.
정씨가에서 매우 흥미로운 인물은 정몽준 의원이다. 그는 비록 1.7% 응답률(8위) 밖에 얻지 못했지만, 최고경영자도 아닌 그가 좋아하는 최고경영자 명단에 낀 것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 현직 국회의원이자 대한축구연맹 회장인 정몽준 의원은 현대중공업 고문 직함을 가진 대주주(10.3%)일 뿐이다. 2002년 월드컵 조직위 공동위원장으로서 월드컵을 준비하느라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차세대 대선 주자로서 간혹 정치적 발언을 하는 정의원을 향한 일반 국민들의 이런 평가는 의외로 비칠 수도 있다. 여기에는 그에 대한 대중적 인기가 작용한 측면이 있는 듯하다.

이번 최고경영자 선호도 조사에서 드러난 최대 관찰 포인트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다분히 양면적이다. 대우가 사실상 공중 분해되었는데도 그를 좋아하는 한국인은 적지 않았다. 일 중독자라는 별명처럼 30여 년간 미친 듯이 일한 김씨는 한마디로 샐러리맨의 우상이었다. 열심히 일하면 대우와 같은 대기업의 총수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다른 직업군보다 직장인 집단에서 유독 그에 대한 선호도가 높게 나타난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한국인이 가장 싫어하는 경영인이기도 했다. 그는 인치 독단 경영의 대명사였다. 그는 모든 것을 혼자 판단하고 결정하는 대우의 머리이자 손발이었다. 유능했지만 정치자금 수수에서 단골로 오르내리는 등 편법과 변칙을 서슴지 않았다. 그가 1990년대 초반부터 내세운 '세계 경영'은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세계 경영에 대해서는, 한국 기업들에게 글로벌 경영의 중요성을 웅변했다는 긍정적 평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의 추진 방식이었다. 그는 이헌재 전 재경부장관이 주장했듯이, 내실을 다지는 구조 조정을 생략한 채 확장 경영을 거듭해 화를 자초했다. 쓰러진 대우 계열사들에 결과적으로 공적 자금 21조원이 투입되었으며, 1년 반이 흐른 지금까지도 대우는 국가 경제에 짐이 되고 있다.

기업에 대한 선호도 역시 최고경영자 선호도와 흡사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기업인이듯이 한국인들은 삼성을 가장 좋아한다. 한국인에게 강렬하게 각인된 삼성의 현재 위상은 단적으로 지난해 경영 지표에서 잘 드러난다. 삼성의 지난해 매출액은 1백20조원(수출 3백20억 달러)이나 되었으며, 사상 최대의 순익을 기록했다. 순익 규모는 무려 8조원으로, 삼성이 지금까지 기록한 순익 규모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았다. 이제 독주라는 말이 나올 만큼 누구도 삼성이 부동의 1위 재벌 자리로 올라섰다는 데 의문을 갖지 않는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군으로 성장한 삼성의 전신은 1936년에 세워진 삼성상회. 오늘날의 삼성을 만든 전초 기지는 1969년의 전자 사업이었고, 여기에 1980년대 들어 반도체에 손을 대면서 삼성은 재계 정상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삼성에 이어 한국인이 두 번째로 좋아하는 기업은 LG. 최초 상기도 면에서 LG는 현대에 한참 밀리지만, 선호도 순위에서는 현대를 가볍게 눌렀다.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대목. LG는 현대가 지난해 9월 자동차 소그룹 계열 분리를 시작으로 중공업·전자·금융 부문이 떨어져 나갈 예정이고, 대우가 사실상 공중 분해되었기 때문에, 일단 안정된 2위 자리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지난해 차세대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에서 탈락해 최대 주력 사업인 통신 사업에 브레이크가 걸렸지만, LG가 어떤 식으로든 활로를 모색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재미있는 것은 LG 경영자에 대한 평가 대목이다. LG는 삼성이나 현대에 비해 이른바 '팬'은 적은 대신 거부감 또한 적은 것이 특징이다. 매우 좋아하는 사람도 매우 싫어하는 사람도 적은 것이다. LG 선호도가 중복 질문 항목에서 응답률이 크게 높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경영자에게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좋아하는 기업인 5∼6위에 오른 구자경·구본부 부자는 LG의 기업 선호도보다 저평가되고 있다는 인상을 풍긴다. 응답률이 김우중 전 회장에 비해 절반도 안되는 것이다.

'썩어도 준치'라고, 현대에 대한 한국인의 지지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다. 지난해 50년 역사 중 가장 어려운 시절을 보낸 현대는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올해를 맞았다. 비록 내년까지 그룹이 사분오열될 처지이지만, 정몽헌 회장이 주축이 될 현대는 14개 계열사를 갖추고 재계 4위 그룹으로 거듭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부채 규모를 줄이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그룹 회생의 관건이다.

1980년 유공(현 SK(주))과 1996년 한국이동통신(현 SK 텔레콤)을 인수하면서 에너지와 정보통신 부문에서 최강자가 된 SK는 삼성을 바짝 따라붙을 잠재력 있는 재벌로 떠오르고 있지만, 성장 추세에 비해 일반 국민의 선호도는 다소 떨어진다. 기업인 분야에서 SK를 대표하는 전문 경영인인 손길승 SK텔레콤 회장이 구본무 회장과 같은 응답률을 얻었지만, 그룹 경영권을 승계할 것으로 보이는 최태원 SK(주) 회장은 10위권에 들지 못했다.

어떤 기업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유도 주목할 만하다. 응답자의 절반 가까이가 삼성·LG·현대를 좋아하는 이유로 '제품 및 서비스가 좋아서'를 꼽았다. 자신이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부분에서 강한 인상을 받는 것이다. 그 뒤를 '좋은 기업 이미지'와 '합리적 경영'이 이었다. 대기업군 별로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현대가 다른 그룹에 비해 국가 및 사회에 대한 기여도가 높게 평가된 것이나, SK가 품질 서비스보다 기업 이미지 면에서 더 많은 점수를 받은 것이 좋은 예다.

지역 별로는 부산 사람들이 삼성을, 광주와 대전 지역 사람들이 LG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사업장이 몰려 있기 때문인지 울산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현대를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싫어하는 이유도 설득력이 있다. 현대·대우·삼성은 모두 부실 및 부도덕한 경영으로
채찍을 맞았다. 현대와 대우는 유동성 위기로, 삼성은 이재용씨 변칙 세습 건과 삼성자동차 부실건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현대와 대우에는 경영진 문제를, 삼성에는 지역 경제는 망친 점을 훨씬 많이 지목한 것도 눈에 띈다. 대구 지역 사람들이 삼성을, 부산 사람들이 현대를 싫어한다는 응답률이 높은 것도 이채롭다. 인천과 광주 지역에서 대우를 유독 싫어하는 것으로 나타난 결과는 김우중 호장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인천과 군산에 대우차 공장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번의 기업·최고경영자 선호도 조사 결과는 한국 경제에 실재하는 그들의 영향력을 재어본다는 의미를 갖는다. 기업이 늘 명멸을 거듭해 왔듯이 그들의 순위는 내년에도 부침할 것이다. 세계적으로 기업은 대체로 10년 안에 70%가 사라지고, 20년간 생존하는 기업은 10%에 불과하다. 한국 기업 가운데 30년 넘게 번창한 기업은 2.88%에 불과하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1965년 10대 기업에 들었던 기업 가운데 현재 생존한 기업은 단 하나도 없다. 삼성·LG·현대·SK는 이 바늘구멍을 뚫고 승승장구하며 한국인에게 사랑받고 있다. 이들을 움직이고 있는 이건희·구본무·정몽헌·정몽구·손길승 회장에 대한 선호도는 기업 성패와 맥을 같이할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재벌이 대변혁하는 과정에서 기업의 운명을 가른 중요한 요인은 대기업 총수들의 리더십과 이들에 대한 국민의 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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