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뒤흔든 ‘이건희의 꿈’
  • 장영희 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3.07.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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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이라는 기업의 경제적 영향력을 지렛대 삼아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설계하려는 것일까. 삼성 이건희 회장이 오랜 침묵을 깨고 ‘천재경영론’과 ‘2만달러론’이라는 화두를 꺼내들었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지금 한국에 없다. 6월28일 평창 겨울 올림픽 유치를 거들기 위해 체코 프라하로 출국했던 이회장은 IOC 총회에 뒤이어 7월3일부터 스웨덴·독일 등을 방문하고 있다. 삼성그룹 관계자에 따르면, 이회장은 이른바 ‘마의 1만 달러’ 시대를 현명하게 탈출했던 유럽 선진국들의 성공 요인을 점검할 것이라고 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뉴스 메이커인 이회장에게 접근하려고 국내 언론은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성공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의 행적은 대부분 베일에 가려 있다. 삼성 본관의 집무실이 아니라 대부분 서울 한남동 자택에 칩거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은둔의 카리스마’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하지만 최근 이회장은 예전과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한국 사회를 향해 직접 말을 걸었다.

삼성 신경영 10주년을 기념하는 사장단 회의가 열렸던 6월5일 저녁, 회의장인 신라호텔로 들어선 이건희 회장에게 기자들이 ‘한말씀 해달라’고 요청했다. 아예 말하지 않거나 입을 연다 해도 신경영 10주년의 의미와 성과에 관해 말할 것이라는 기자들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회장은 기자들에게 대뜸 “마의 1만 달러가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라고 물었다. 이회장은 10년 내에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에서 2만 달러로 가야 하며 (그렇게 못하면) 1만 달러도 지키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 날 사장단 회의에서 이회장은 두 가지를 강조했다. 하나는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였고, 다른 하나는 나라를 위한 천재 키우기였다. 삼성 신경영 10주년에 맞추어 각종 특집 기사를 준비했던 언론들은 신경영의 성과보다 이회장의 두 가지 화두를 전달하기에 바빴다. 6월과 7월 ‘1만 달러 여기서 주저앉나’ ‘천재경영론’ 따위 특집과 칼럼 기사가 봇물 터진 듯 쏟아져 나왔다. 언론의 관심이 너무 뜨거워 삼성 관계자들조차 부담스러워할 지경이었다. 이처럼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는 인물이 대통령말고 또 있을까. 재계의 한 관계자는 가히 ‘이건희 시대’라고 평했다.

이건희의 천재론은 6월5일부터 세상에 알려졌지만, 6월25일부터 시작한 <동아일보>의 ‘인간포석 인사의 세계’라는 시리즈물을 통해 세부 내용이 알려졌다. 비록 만나지는 않았지만, 이회장이 이 신문이 보내온 질의서에 네 차례에 걸쳐 의욕적으로 답한 것이다. 재계 일각에서는 <동아일보>가 ‘사돈 언론사’(둘째 사위인 김재열 제일모직 상무가 김병관 사주의 둘째 아들)여서 도와주었을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삼성측은 이를 부인했다. 인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주위의 진언과 상관없이 이회장 본인이 말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이회장이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그가 회장 자리를 승계한 1985년으로 거슬러올라갈 정도로 오래되었다. 이회장은 이병철 선대 회장에게 이른바 ‘잡종강세론’을 주장했었다. 공채 출신을 우대하는 순혈주의를 지켜가면서도 인재를 과감히 영입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렇다면 인재라는 개념이 최근 천재로 진화한 배경은 무엇일까. 그가 역설하는 천재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이회장이 말하는 천재는 끼가 있고 놀기 잘하고 공부도 효율적으로 하고 창의성이 뛰어난, 한마디로 빌 게이츠 같은 사람이다. 이회장은 빌 게이츠라는 한 명의 천재가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2.7%, 총납세액의 1.8%를 차지하는 마이크로소프트를 일구어냈다면서, 그런 천재가 3명만 나오면 우리 경제는 차원이 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미 이회장은 지난 5월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통해 삼성 경영진에게 천재급 인력 셋을 확보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회장이 인재에서 천재라는 극적인 개념으로 방향을 튼 까닭에 대해 삼성측은 세상이 워낙 급변하고 있어 사업 방향을 예측할 수 없어서라고 설명한다. 경쟁력의 원천인 천재급 인재를 확보하고 있다면 앞으로 무슨 사업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 천재경영론의 요체이다.

이회장의 천재론은 재계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기업의 최고경영자가 인재 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야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또 이회장만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재계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천재론이 한창 부각되던 6월23일 (주)LG 구본무 회장은 최고경영자 육성론을 펼쳤다. 구회장은 “천재는 따돌림을 당하기 쉽고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어 천재보다는 미래를 내다보는 경영을 잘할 수 있는 CEO를 육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재계는 이회장이 기업 경영 수준을 넘어 국가 차원의 인재 육성에 힘을 보태겠다는 말에 주목하고 있다. 천재 한 명이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이회장의 천재경영론을 국가 경영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한 대통령 측근은 노무현 대통령이 실·국장급 이상 공직자 간담회에서 언급한 개혁 주체 세력 만들기를 기업의 핵심 인재 키우기로 해석하기도 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회장의 천재경영론이 앞으로 몰고올 변화를 이렇게 관측한다. “매우 특별한 사람인 천재의 효용성을 꾀하려면 필연적으로 평등주의· 형평성 논리를 깨야 한다. 천재경영론이 득세할수록 형평성 논쟁을 불러들일 것이며 교육 등 정부 정책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천재육성론에 이어 이회장이 나라 살리기 차원에서 언급한 것이 마의 1만달러론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회장이 마의 1만 달러 벽을 넘어 2만 달러를 달성하자고 강조한 날인 6월5일 노무현 대통령도 이기명 선생에게 보내는 서신을 통해 2만달러론을 처음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일각에서는 국정 최고책임자와 재계의 리더가 같은 날 2만 달러 시대를 언급했다며 참여정부와 삼성의 교감설을 제기했다.

노대통령이 이회장 혹은 삼성에 설득되어 2만달러론을 국정 비전으로 받아들였다는 재계 일각의 주장은 과연 맞는 것일까. 재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삼성경제연구소가 지난 5월께 2만 달러 시대에 관한 보고서를 청와대에 전달했으며, 그 후 이회장이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서 2만달러론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권오규 정책수석은 “삼성과 교감했다는 주장은 순전히 농단이다”라고 일축한다. 청와대의 다른 한 관계자도 “노대통령은 선거 전략으로 채택하지 않았을 뿐 후보 시절부터 2만달러론에 큰 관심을 가졌었다”라며 삼성과 연결짓는 시각을 강하게 부정했다.

노대통령이 삼성 혹은 이회장의 영향을 받아 2만달러론을 국정 비전으로 삼지는 않았다 해도 삼성이 청와대 등에 2만달러론 채택을 적극 요청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국정 비전이 뭔지 답답해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꿰뚫어본 삼성이 2만 달러가 피부에 와 닿는 국정 비전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안다”라고 전한다. 잘사는 사회라는 보편적 희망을 가장 쉽게 표현한 것이 노대통령의 2만달러론이고 보면 삼성측 논리와 전혀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재계의 중평이다.
참여정부와 삼성이 의미 있는 수준의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정부는 삼성이라는 기업 집단의 경제적 영향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삼성으로서는 이재용 후계 구도를 연착륙시켜야 하며, 무노조 경영 시비 같은 아킬레스건을 방어해야 하는 현실적 필요성이 있다. 지난 5월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할 때 이회장과 삼성 계열사들이 적극 도왔던 것이나, 2월 중순 삼성경제연구소가 노대통령 측근의 요청으로 4백 쪽에 달하는 국정 아젠다를 전달한 것이 협력의 좋은 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작성한 ‘CEO 인포메이션’ 같은 연구보고서가 청와대에 올라가고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가 있느냐. 미국 정부가 헤리티지 재단 같은 두뇌집단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처럼, 청와대도 삼성 등 여러 연구소의 견해를 참고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 관계자는 삼성만큼 훈련된 인력과 정보를 가진 집단도 드물다고 말해 묘한 여운을 남겼다.

노대통령이나 이회장이나 똑같이 2만 달러 시대를 열어가자고 역설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많이 다르다. 노대통령은 국가 개조를 해야 2만 달러를 달성할 수 있다고 외치고 있다(28쪽 상자 기사 참조). 반면 이회장은 노조 등 사회 집단의 제몫 찾기라는 벽을 깨뜨려야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회장과 전경련이 주장하는 2만 달러 담론은 단순하게 지금보다 두 배로 잘살자는 청사진이 아니다. 이회장의 2만달러론은 ‘선 성장 후 분배론’을 함축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2만달러론을 주장한 원조는 이회장이 아니다. 지난 2월부터 전경련이 자기네들이 주창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천재로 업그레이드되기는 했지만 인재경영론도 크게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회장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무게가 실리고 거대한 논쟁까지 예고하고 있다. 그만큼 그가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 크다는 반증이다.

물론 이건희 회장을 주목하는 것은 그가 삼성그룹 총수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를 필두로 삼성그룹 각 계열사가 국민 경제에서 차지하는 거대한 영향력을 지렛대로 삼아 이회장은 그가 꿈꾸는 세상을 설계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세계 석학이나 최고경영자의 책이나 직접 만남을 통해 혹은 몇 시간을 꼼짝 않고 골똘히 생각해 만들어낸다는 경영 구상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곳은 삼성경제연구소이다.

최근 한 일간지는 ‘싱크탱크’를 연재하면서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을 제치고 삼성경제연구소를 가장 먼저 거론했다. 정부 정책을 ‘추수’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견인’하고 있다는 주장마저 나올 정도로 참여정부 들어 삼성경제연구소의 위상은 높아졌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이회장의 특별 지시로 이미 지난 5월부터 시작한 2만달러론 연구를 7월 안에 끝낼 계획이며 인재경영론(천재론)에 대한 체계적 연구도 진행 중이다.

이회장은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를 돌아보고 있다. 2년 전 스웨덴·핀란드 같은 작지만 잘사는 나라에서 배워야 한다는 이른바 ‘강소국론’으로 화제를 뿌렸던 이회장의 귀국 여행 가방에 또 무엇이 담겨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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