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천재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3.07.1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삼성, 인재 영입·관리에 온 힘…국적 안 가리고 초특급 대우
명의 천재가 수십만, 수백만을 먹여 살린다.” 10년 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고 외쳤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그가 10년 만에 던진 화두는 천재 경영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줄곧 이회장은 핵심 인재를 확보하고 양성하는 것이 최고경영자의 임무이자 능력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핵심 인재가 빠져나갈 경우 문책하겠다고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삼성 임원진은 해외 출장을 갈 때면 점찍어둔 인재를 만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업무가 되었다.

이건희 회장의 인재 영입 계획에 따라 채용된 대표적인 사례로 황창규 삼성전자 사장이 꼽힌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 책임연구원을 거쳐 인텔에서 일하던 황박사는 1989년 삼성 인사팀의 레이더망에 걸려들었다. 유명 학술지에 발표된 반도체 개발 논문 수십 편이 삼성의 눈길을 끌었던 것. 삼성은 황박사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3년 동안 삼고초려했다. 황박사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일본과의 경쟁심을 자극하는 고도의 심리전을 펴기도 했다.


삼성으로 자리를 옮긴 황사장은 세계 특허 10여 건을 소지하고, 1기가 D램과 300mm 웨이퍼 양산 등 세계 기록을 거푸 갈아치우고 있다.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회장은 삼성에는 아직 천재급 인재가 없지만, 황사장은 삼성이 자랑하는 준 천재급 인재라고 치켜세웠다.

비슷한 사례로 정통부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진대제 삼성전자 사장이 있다. 또 미국 유나이티드 테크놀로지에서 항공기 엔진 사업을 총괄한 삼성전자의 송지의 메카트로닉스센터장, 오라클의 엔지니어 출신인 삼성SDS 이철환 상무, 골드먼삭스 홍콩지점장을 지낸 삼성증권 최희문 상무 등이 꼽힌다.
인재를 영입할 때 국적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난해 말 삼성화재는 도쿄해상에서 동남아·중국을 전담하던 가와시타 도시키를 영입했다. 삼성 계열사인 제일기획도 미국인 마이클 문과 스티브 쇼름을 글로벌 전략팀장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했다. 이들은 각각 대표이사 수준의 연봉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국내 삼성 사업장에서 일하는 우수 외국인 인력은 5백명이 넘는다. 최근에는 기초 과학 기반이 탄탄한 러시아·중국·인도의 인재들이 집중 표적이 되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해외 핵심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전담 부서까지 꾸렸다.

우수한 인재들이 최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관리 시스템’도 눈여겨 볼 만하다. 삼성은 핵심 인재를 S(Super)급·H (Head)급·A급 세 그룹으로 나누어 집중 관리한다. S급은 높은 잠재력과 뛰어난 성과를 올리는 인재. 세계 일류 기업 근무자 중 사장급 대우가 가능한 사람이거나 국내 ‘톱5 대학’의 수석 혹은 5위 내 인력으로 규정되어 있다. 삼성이 관리하고 있는 S급 인재들은 천여명인데, 삼성전자에만 4백여 명이 포진하고 있다. 구조조정본부에 근무하는 직원은 모두 S급에 해당한다.

삼성이 인재를 관리하는 근간은 성과에 걸맞는 과감한 보상이다. 삼성전자 최고경영자의 경우 지난해 1인 평균 52억5천7백만원을 보수로 받았다. LG전자 최고경영자의 평균 연봉은 7억2천만원이었다.
매년 분야 별로 뽑는 ‘자랑스러운 삼성인상’ 수상자에게는 상금 5천만원과 1계급 특진을 부여한다. S급에는 연봉 상한선도 적용하지 않는다. 인재들에게는 돈을 아끼지 말라는 이회장의 지시 때문이다. 삼성카드는 미국 월가 출신인 30대 고객관계관리(CRM) 전문가에게 10억원이 넘는 연봉을 주고 있다.

삼성은 그룹 차원에서 인재 영입을 위한 매뉴얼을 만드는 등 ‘천재 경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LG그룹 구본무 회장은 “천재보다는 미래를 내다보고 경영을 잘할 수 있는 최고경영자를 육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일반 직장인들도 ‘천재론’보다는 ‘최고경영자 육성론’에 훨씬 더 공감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룹 핵심부도 천재 경영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한 연구원은 “천재나 사장 등 스타들에게 막대한 돈을 투자하는데, 직원들의 상대적 박탈감도 고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삼성의 토양 자체가 천재들이 활동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소리도 나온다. 전직 삼성 임원은 “경쟁 업체로 자리를 옮긴 상당수 인재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 삼성의 기업 문화와 정책에 불만을 품은 천재들이다”라고 말했다.

6월 말 한 준 천재 임원이 회사를 떠난 것을 이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전명표 부사장은 루슨트테크놀로지 최고전략 담당자를 거쳐 삼성전자로 스카우트된 대표적인 S급 인재. 그는 삼성전자의 미래 핵심 사업인 디지털 홈네트워크를 전담하는 디지털솔루션센터장을 맡아 최근 KT와의 전략적 제휴를 성사시키고는 홀연히 짐을 쌌다. 회사측에서는 전부사장이 ‘이제 쉬고 싶다며 회사를 떠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천재가 크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라는 소리가 잦아들지 않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