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나서 혼란 부채질한 골
  • 김광동(나라정책원 원장.정치학 박사) ()
  • 승인 2003.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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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신임 국민투표’ 반대론/‘자격’ 정당성 아닌 ‘업적’ 정당성 찾아야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 심판을 통해 ‘축적된 국민 불신’을 해소하고 도덕적 신뢰를 바탕으로 한 국정 수행을 위해 재신임을 묻겠다고 했다. 그러나 국민이 재신임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평가 대상과 방법이 분명하거나, 아니면 최소한의 재임 기간이라도 지났어야 한다. 신임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중요한 평가 기준부터 모호하기 때문에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재신임을 묻겠다고 한 첫 기자회견에서 노대통령은 20년 ‘집사’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의 금품 수수 문제를 거론하며 국민 심판으로 도덕성을 회복하고 사면을 받겠다고 했다. 그런데 다음날 기자회견에서는 여소야대에 따른 장관 해임안 및 감사원장 인준 거부 등에 따른 ‘국정 혼란’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고 나섰다. 노대통령은 자신의 도덕성을 평가해 달라는 것인지, 다수 야당의 비협조를 심판하라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지난 몇 개월 간의 국정 수행을 평가해 달라는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제 집권 7개월을 갓 넘긴 노무현 정부가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총선을 몇 달 앞둔 시점에서 재신임을 묻겠다는 것은 국가 안정의 중심이 되어야 할 대통령이 나서서 혼란을 부채질하는 격이다. 신임 여부를 묻고 싶었다면 6개월 뒤 예정된 내년 총선 결과와 연계했어야 옳다. 임기가 고정된 대통령 재임중의 선거는 항상 중간평가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재신임되었을 때의 ‘독단’과 불신임되었을 때의 ‘혼란’을 다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자세를 가다듬고 국정 운영에 매진해 그에 따른 성과(achievements)를 국민에게 돌려야 마땅하다.

지금 우리 경제 상황은 최악이다. 노대통령이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약속한 성장률 7%와 지난 2/4분기 성장률 1.9%는 천양지차이다. 더구나 우리 사회는 지금 이라크 파병 문제나 새로운 한·미 동맹관계 설정 문제에서부터 행정 수도 이전 및 북한 핵 문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국가적 난제를 앞에 두고 있다.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고, 노대통령이 재신임받는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민주주의 체제는 선거에 의해 당선되었다는 것만으로 정권의 정통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집권 기간의 국정 수행 결과에 따라 정권의 정통성이 확보되고 대통령의 성공이 좌우되는 것이다. 당선된 대통령이 도덕적 모범을 보이고 국민에게 약속한 것을 정책으로 실현하며 국가 번영을 위해 노력하는 것도 다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국민에 의해 선택된 대통령의 의무이다.

그런데 ‘업적’의 정당성을 쌓아야 할 시점에서 다시 ‘자격’의 정당성 차원으로 되돌아 가려고 하는 것은, 주어진 임기 5년 동안 안정과 일관성에 기반을 두고 나라를 이끌어 가라는 헌법 취지와도 맞지 않는다. 비록 노대통령 지지도가 집권 초 92%에서 25% 전후까지 하락하기도 했지만, 지지도 변화는 어느 나라에서나 있는 것이고, 지지도가 낮다고 국정을 수행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대통령 직(presidency)은 국민을 위해 헌신하고 책임지는 자세에 의해 강화되는 것이지 재신임을 받았다고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국민이 노대통령을 재신임한다고 하더라도 국정 수행이 잘 되고 지지도가 올라간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는 데 문제의 본질이 있다.

국민의 신뢰를 받고 효율적인 국정 수행으로 나라를 이끌 책임은 오직 노대통령 자신에게 있다. 지난해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나 집권 초 높은 지지를 받을 때도 우리 정당 구조나 언론 구조는 지금과 다름없었다.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노대통령은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 “대통령, 하야 안한다”는 발언 등으로 대통령 직을 희화화하더니 급기야 재신임 정국까지 오고 말았다.

더구나 재신임 방식은 이 문제를 처리할 헌법 혹은 법률 기반이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재신임 절차에서부터 국민의 분열을 가속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무정부적 국정 공백이 확산될 가능성은 더욱 커졌다.

어쨌든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났다. 국민투표 부의권을 가진 대통령이 재신임 문제를 공론에 붙인다는 것 또한 책임 있는 자세는 아니다. 노대통령은 먼저 재신임 평가 기준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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