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사 노무현, 또 죽다 살다
  • 이숙이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3.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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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재신임을 받겠다고 선언한 후 정국이 요동치고 있다. 일부에서는 벌써부터 불신임을 상정하고 개헌론까지 들먹이는 형국이다. 이런 불확실성 때문인지 국민들은 여론조사에서 재신임 쪽에 손을 들어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 ‘재신임’ 선언을 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이를 정치적 ‘꼼수’ 정도로 치부했다. 측근 비리로 궁지에 몰리자 위기 타개책을 짜낸 것일 뿐, 진짜 물러날 생각은 없으리라는 관측이 우세했다.

하지만 노대통령은 재신임 화두를 던진 지 3일 만에 곧바로 시기와 방법까지 내놓았다. 12월15일을 전후해 국민투표로 결판을 내자며 기선을 제압한 것이다. 그는 또 불신임을 받을 경우 미련 없이 물러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청와대 참모들은 이런 노대통령의 결정이 대통령 직에 대한 일종의 결벽증에서 비롯되었다고 입을 모은다. 어영부영 5년을 뭉개느니 이번 기회에 국민의 심판을 받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참모는 노대통령이 후보 때부터 “끌려 다니는 대통령은 하지 않겠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전했다.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협상 때 정후보측이 요구하는 여러 조건에 끝까지 사인하지 않은 것도 ‘조건 달린 대통령은 하지 않겠다’는 고집 때문이었다는 얘기다.

노대통령은 재신임 선언 직후 당혹해 하는 참모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으로 알려진다.

"노무현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라와 국민은 항상 이겨야 한다. 노무현을 내세워 이길 것인가, 아니면 대안을 찾을 것인가, 국민이 결정해 달라는 얘기다.”이 얘기를 전한 청와대의 한 고위 인사는 노대통령이 측근 비리 때문에 1년 만에 그만두는 일이 생기면, 다음번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비서가 100만원만 받아도 대통령 꿈을 접어야 할 것이라면서, 노대통령은 자기 희생을 통해서라도 그런 정치 환경을 만들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무튼 주사위는 던져졌다. 대통령이 시기와 방법까지 못박은 마당에 어떤 식으로든 재신임 절차는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남은 것은 노대통령이 재신임을 받았을 때와 불신임 받았을 때를 대비하는 일이다.

재신임을 받을 경우, 노대통령은 그동안의 악재를 툴툴 털고 새출발하는 힘을 얻게 될 것으로 보인다. 노대통령은 이미 10·13 시정연설에서 재신임이 확인될 경우 곧바로 내각과 청와대 비서진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겠다고 선언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 개혁을 위한 각종 법과 제도를 정비하는 작업도 병행할 것으로 보인다. 노사모 등 친노 그룹이 재결집하고 노대통령의 개혁 드라이브가 탄력을 받게 되면, 그 영향력이 내년 총선에까지 미칠 가능성이 크다.

반면, 노대통령이 불신임을 받고 하야하게 될 경우 상황은 매우 복잡해진다. 헌법 제68조 2항은 ‘대통령이 궐위된 때 또는 대통령 당선자가 사망하거나 판결, 기타의 사유로 그 자격을 상실한 때에는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선거한다’라고 규정했다. 대통령 ‘하야’는 이 조항에서 ‘궐위’에 해당한다. 따라서 정국은 곧바로 대선 체제로 전환되고, 각당은 대통령 후보 선출에 돌입하게 된다.

노대통령은 당초 내년 1~2월쯤으로 거론되던 재신임 시기를 12월15일께로 앞당기면서, 그 이유를 각당이 후보 경선을 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대통령이 불신임을 받게 되면 보궐선거는 내년 총선(4월15일)과 동시에 실시하는 것이 좋은데, 그러려면 최소 넉 달 전에는 재신임이 결판 나야 두 달 동안 각당이 후보 경선을 하고, 나머지 두 달 동안 공식으로 대선을 치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계산이다. 이 경우 노대통령은 각당이 후보를 뽑는 두 달 동안 대통령 직을 유지하면서 국정 이양을 준비하게 된다.

대선을 치른 지 불과 1년 반 만에, 그것도 60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새 대통령을 뽑게 될 경우, 다음 대통령은 ‘졸속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염려다. 그동안 각당 후보가 선출된 후에도 최소 5~6개월은 텔레비전 토론 등 여러 검증 과정을 거쳤는데, 그것이 단 60일로 압축될 경우 부실 논란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이 때문에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아예 대안(대통령 후보)을 제시해놓고 불신임 운동을 펴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각에서는 미국에 가 있는 이회창 전 후보를 모셔와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씨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는 점은 ‘상황 변경의 논리’에 묻히는 분위기다.

이명박 서울시장·손학규 경기도지사·김혁규 경남도지사 등 차기 주자를 내세우자는 움직임도 있다. 그러나 이들 거물급 단체장들이 대거 대통령 선거에 나설 경우 지방 행정 마비는 불 보듯 뻔하다. 가뜩이나 차기 총선에 출마하려는 단체장들로 지방 정가가 어수선한 판에, 이들까지 가세할 경우 내년 총선이 끝나자마자 유권자들은 또다시 대규모 단체장 보궐선거를 치러야 한다.

대통령 선거가 제대로 치러진다고 해도, 새 대통령의 임기를 놓고 논란이 발생할 소지가 크다. 새 대통령의 임기가 5년이냐, 아니면 물러난 대통령의 잔여 임기냐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는 탓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정국을 혼란스럽게 만들 변수는 바로 개헌 논쟁이다. 정치권의 대표적 내각제론자인 한나라당 홍사덕 총무는 최근 한 라디오 방송에 나와 “봄에는 씨 뿌릴 얘기를 하고 가을에는 추수 얘기를 해야 한다”라면서 지금은 내각제를 거론할 때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이는 표정 관리용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개헌론 자체가 노대통령에 대한 불신임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지금부터 개헌을 얘기하면 너무 속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불신임이 결정되고 나면 내각제·이원 집정부제·대통령 4년 중임제 같은 개헌론이 만발할 것으로 보인다. 한 내각제론자는 이제 대통령제의 한계가 드러났다면서, 노대통령에 대한 불신임이 확인될 경우 곧바로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한나라당 이동복 의원은 아예 이번 재신임 투표를 내각제 개헌안과 연계하자는 방안을 제시했다. 내각제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된다면 현행 대통령 중심제의 수장인 노대통령이 재신임을 얻은 것으로 간주하고, 아니면 불신임으로 간주해 내각책임제로 전환하자는 주장이다.
박상천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에서는 이원 집정제 형식의 절충형 내각제를 추진할 움직임이고, 대통령제를 유지하자는 쪽에서는 이 기회에 4년 중임제로 바꾸자며 벼르고 있다. 노대통령 재신임 국면이 16대 국회의원 임기 말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점에서 개헌론자들에게는 이번 재신임 국면이 개헌을 밀어붙일 호기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탓일까. 불신임 여론이 높으리라는 세간의 예상을 깨고,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점점 더 노대통령을 재신임하겠다는 여론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재신임 선언 직후 실시된 각 언론사 여론조사에서는 재신임이 불신임보다 2~6% 포인트 많은 것으로 나타났으나, 10월12일 실시된 3차 여론조사 결과 그 차이가 20% 포인트 이상 벌어졌다. 그렇다고 노대통령 지지도까지 높아진 것은 아니다. 노대통령의 국정 수행 능력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20~30% 대에 머무르고 있다.

재신임과 지지도 편차에 대해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대통령 하야로 인해 초래될 수 있는 국정 혼란에 대한 불안감이 크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노대통령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대통령이 중간에 그만두는 불안정한 상황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 김헌태 소장은 “보수층은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지만, 대통령 직을 흔들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대다수 여론조사에서 노대통령 지지도가 매우 낮은 5060 세대가 3040 세대보다 오히려 재신임 쪽을 많이 선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각에서는 한나라당이 대안 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갤럽 김덕구 상무는 “20%대에 머무르고 있는 한나라당 지지도가 만약 30~40% 수준으로 높았다면 재신임 여론도 달라졌을 것이다”라며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지만 야당에도 큰 희망을 걸지 않는 유권자들은 대안 없이 쉽게 불신임 쪽에 표를 던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렇듯 여론이 노대통령에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자, 한나라당을 비롯한 반노(反盧) 진영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28쪽 딸린 기사 참조). 특히 가급적 빨리 재신임 투표를 하자며 서두르던 최병렬 대표의 처지가 매우 난감해졌다. 자칫 노대통령에 대한 재신임은 재신임대로 해주고 총선을 앞두고 정국 주도권까지 내주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재신임 절차를 조기에 마무리하자던 민주당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양당은 입장을 바꾸어 대통령 측근의 비리를 먼저 파헤치자는 쪽으로 입을 모으고 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반노 진영은 갖은 논리를 동원해 아예 재신임을 무산시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벌써부터 민주당에서는 국민투표의 위헌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자민련은 노대통령 스스로 하야하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권이 재신임 절차를 지연 또는 무산시키는 쪽으로 몰아갈 경우 ‘당리당략에 따라 말을 바꾼다’는 여론의 역풍을 각오해야 한다.

사즉생(死則生)이라고 했던가. 노대통령이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걸고 던진 재신임 승부수가 단 며칠 사이에 정적들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재신임 카드가 반짝 카드로 끝날지, 정국을 반전시키는 결정타가 될지, 친노 대 반노 간 샅바싸움이 팽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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