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꼭 숨은 전두환 "돈주머니"
  • 주진우 (ace@sisapress.com)
  • 승인 2003.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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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 대통령은 얼마 전까지 수시로 골프를 치고 지인들의 경조사 때에는 경조금을 듬뿍 내놓기도 했다. 이처럼 씀씀이가 큰 그가 사법부에 제출 한 재산 명세는 단돈 21만9천원이었지만, 검찰은 대통령 퇴임
11월2일 일요일 오전 11시. 전두환 전 대통령(72)이 서울시 연희동 외국인학교에 모습을 드러냈다. 경호원을 대동한 전씨는 간편한 운동복 차림에 배드민턴 라켓을 들고 있었다. 일요 배드민턴 모임은 최근 전씨의 유일한 공식 행사다. 1시간30분 만에 운동은 끝났다. 12시30분께 전씨가 학교를 빠져나갔다. 회원들도 전씨를 따라 사저로 가 점심을 먹었다. 점심 시간 동안 이 일대는 교통이 통제될 정도로 북적였다. 매주 회원들의 점심은 전씨가 대접한다.

재산 명시 신청이 있던 지난 5월까지만 해도 전씨의 자택은 항시 북적였다. 월요일에는 참모진이 모여 회의를 했다. 비서진은 이 회의를 ‘국무회의’라고 불렀다. 화요일에는 골프를 치고, 수요일에는 산행을 했다. 보통 5공 측근과 각료들의 친교 모임인 ‘연희산악회’ 회원 40여명이 따라 나섰다. 목·금 요일에는 다시 골프장에 나갔다. 토요일에는 간간이 회원들과 배드민턴을 쳤고, 일요일에는 주로 결혼식 등 경조사를 챙겼다. 전씨 비자금을 수사했던 한 검사는 “전씨가 1주일에 사용하는 돈은 2천만원에서 5천만원 가량이다”라고 말했다.

손자 운동회 때는 학부모에게까지 도시락 돌려

그동안 전씨는 유난히 큰 씀씀이로 뒷말이 무성했다. 경조사에서 남들보다 동그라미를 한 개 더 붙인 봉투를 내놓았고, 수십 명을 대동한 채 골프와 여행에 나섰다. 손자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운동회가 열리면 교사와 학생은 물론 학부모 전원에게 도시락을 돌리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는 싸늘한 주변의 시선에 자중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5월 이후 골프장 출입 횟수를 줄이다가 지난 9월부터는 “욕먹어 가면서 골프장 나갈 필요 없다”라며 아예 골프채를 놓았다. 최근에는 명동으로 치과 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것을 제외하고는 바깥 나들이를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전씨의 한 측근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연희동에 대해 공격적인 언론과 사람들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전직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해 연금과 각종 수당을 국가로부터 지원받는다. 하지만 전씨는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되어 국가 보조가 모두 중지되었다. 최근 이순자씨(64)가 자서전 집필을 마치고 몇몇 신문사와 출판을 논의하고 있어, 성사되면 전씨 집안은 몇 년 만에 첫 공식 수입을 쥐게 된다.

전재산이 29만1천원뿐이라고 주장하는 전씨. 그마저도 휴면 계좌 3개에 자고 있던 돈이었다. 하지만 전씨는 그동안 돈에 관한 한 전혀 구애받지 않았다. 대통령 재임시와 같이 전씨는 “김군아!” “이군아!” 하고 부르기만 하면 모든 일이 척척 진행되었다. 검찰은 전씨가 청와대에서 갖고 나온 비자금이 수천억원 규모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한 수사 관계자는 최소 1천4백억원 이상의 비자금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비자금을 누가 관리하고 있을까.

전씨는 능력보다는 인맥과 의리를 중시한다. 측근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안기부장과 경호실장을 지낸 장세동씨와 안현태씨다. 그러나 이들이 비자금을 관리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지난 대선에서 전씨의 만류를 뿌리치고 출마를 강행한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아직까지 연희동을 찾지 않고 있다.

측근보다 친인척 더 챙겨

전씨가 의리보다 중시하는 것은 혈연이었다. 5공 정부가 들어서자 친인척이 막강한 권한을 휘둘렀다. 동서 홍순두씨는 시내버스 회사 배차 주임을 하다가 대한통운 사장 자리에 올랐고, 사촌형 순환씨는 고향에서 정미소를 하다 일약 양곡가공협회장이 되었다. 둘은 그나마 친척 가운데 ‘전공’을 찾아간 경우였다.

1996년 4월 비자금 관련 공판에서 전씨는 “평소 불우 이웃을 돕는다는 차원에서 못사는 친인척 1천여명을 관리해 왔다”라고 말했다. 1996년 비자금 공판에서는, 비자금을 관리한 친인척들의 이름을 공개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들에게 피해가 갈 것이기 때문에 밝히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비자금 관리자가 친인척일 가능성에 무게가 쏠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선 장남 재국씨(43)가 눈에 띈다. 불경기 속에서 뚜렷한 수익원 없이 사업 확장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과, 검찰 수사에서 재국씨 회사 설립 자금에 전씨의 비자금이 유입된 단서가 포착된 점 등이 재국씨를 의심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시공사를 운영하고 있는 재국씨의 부동산 재산은 약 100억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자식들이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은 의혹덩어리다. 재국씨 아들(14)은 시가 10억원이 넘는 땅 86평을 서교동에 소유하고 있다. 재국씨 딸(17)도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1백16평짜리 음식점 지분 70%(30억원대)를 소유하고 있다. 전씨측은 외할아버지가 유증했고, 증여세를 완납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외손주에게 20억원 이상의 유산을 남긴 김종록씨(1997년 사망)는 사망 당시 서울 강남의 13평형 아파트에서 살았다. 또 전두환씨가 재국씨 장모 김경자씨에게 1985년부터 매달 3백만∼1천만 원을 생활비로 지급한 점을 감안하면 설득력이 크게 떨어진다. 전씨가 퇴임하기 1개월 전 김경자씨가 한국투자신탁에 자신 명의의 계좌를 통해 전씨의 비자금 일부를 관리해온 점을 보면, 김씨가 전씨의 재산을 관리하고 돈을 받았다는 의혹을 살 만하다. 서울 서부지원 민사26단독 신우진 판사는 “전씨 가족의 재산 명시 신고가 허위라는 의심이 든다. 재국씨 등 가족 재산과 시공사 확장의 비밀에 대해서는 검찰 수사가 필요하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친인척 가운데 관심이 쏠리는 인물은 형 기환씨(75)와 동생 경환씨(61)다. 돼지를 치는 농사꾼이었던 기환씨는 동생이 정권을 잡자 경찰 인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이른바 ‘노량진 수산 시장 강탈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요즘 기환씨는 별다른 사업을 하지 않고 서초동에서 소일하고 있다. 그러나 전씨가 형 기환씨에게 매년 수천만원씩 생활비를 주었던 점을 들어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사람도 있다. 전씨는 명절과 제사 때 서초동 기환씨 집에 가 점심을 먹곤 한다.

그러나 여러 측면에서 기환씨보다는 경환씨에게 무게 중심이 더 많이 쏠린다. 정치에 뜻이 있던 경환씨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정계를 노크했다. 2000년 총선에서는 국민회의와 민국당 그리고 자민련까지 그에게 구애했다. 경환씨의 선거를 도운 한 지인은 “경환씨는 돈을 함부로 썼다. 표만 잡을 수 있다면 돈은 얼마든지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라고 말했다.

동생 경환씨·처남 이창석씨에게 눈길

경환씨는 1993년부터는 <경상매일신문> 회장으로 나섰지만 얼마 못 가 신문사에서 손을 뗐다. 지난해에는 새마을운동중앙본부 주변인 서울시 화곡동에 사무실을 내고 중국 하이난 성에 사업을 추진하다가 정리했다. 지금은 서울시 종로구 팔판동 자택에서 소일하고 있다. 경환씨는 서울 강남터미널 옆 구 청록빌딩의 실소유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르본시티로 이름이 변경된 이 건물은 대지 1천2백60평, 건물 4백80평으로 평당 공시지가가 2천6백만원에 이르는 금싸라기 땅이다. 르본시티의 한 관계자는 “실소유자인 전경환씨가 땅을 팔아 몇 사람을 거친 후 르본시티에서 인수했다. 아직도 경환씨의 자금 일부가 남아 있는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경환씨는 이 건물에 대해 59억원의 근저당을 설정해 놓은 상태이다.

집안이 별 볼 일 없던 전두환씨는 처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처가 생활도 10년이나 했다. 때문인지 처남 이창석씨(53)에게 쏠리는 눈은 예사롭지 않다. 1995년 전씨 비자금 수사에서 가장 먼저 수사선상에 오른 인물도 이창석씨였다. 검찰은 금융실명제 직후 이씨가 전씨의 비자금 2백억원 가량을 실명으로 전환해 주었다는 설을 집중 추궁했으나 이씨가 이를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일과 창원광업 등 포스코 계열사에 납품하는 회사를 운영하던 이창석씨는 재국씨가 운영하는 시공사와 1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삼원코리아라는 유통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삼원코리아는 ‘DENON’ ‘JAMO’ ‘MIRAGE’ 등 오디오 마니아를 위한 고급 오디오를 수입해 판매하는 회사다. 한 오디오 전문가는 “상위 클래스를 위한 전문 오디오로 일반인에게 호응도가 높은 알짜 브랜드다”라고 말했다.

창석씨는 시공사 계열사인 리브로 설립 초기 36.67%의 지분을 보유한 최대 주주로 전씨 집안 사업에도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창석씨 지분은 재국씨에게 고스란히 넘어가 2002년 12월31일 현재 리브로의 주식은 재국씨가 36.05%, 창석씨는 7.65%만을 소유하고 있다. 형제가 아닌 친척 가운데 재국씨와 직접 사업상 연이 닿는 사람은 창석씨뿐이다.

전두환씨가 타는 에쿠우스 승용차도 이씨 회사 소유로 되어 있고, 전씨 사저 경호원 회식비도 창석씨의 카드로 계산된다. 이 때문인지 전씨 주변에서는 창석씨가 전씨의 비자금 상당 부분을 관리하고 있다는 말이 공공연히 떠돈다. 이에 대해 창석씨의 한 측근은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 퇴임 후 장인인 이규동씨가 전씨의 뒤를 봐줬다. 재원은 충남 논산의 땅 가운데 일부인 약 70만평을 팔아 마련했다. 2001년 사망하면서 이규동씨는 아들 창석씨에게 ‘전씨를 잘 모시라’고 유언했다. 이를 받들어 창석씨가 전씨의 생활비와 품위유지비 등을 주고 있는 것으로 안다.” 전씨측의 한 관계자는 “전씨의 비자금은 한푼도 없다. 때문에 비자금 관리자라는 말도 난센스다. 다만 처남 창석씨가 여유가 있어 자발적으로 돕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창석씨가 사업에 크게 성공한 데다가 유산을 많이 물려받았다고 덧붙였다.

창석씨가 전씨 비자금 관리자라는 의혹에 이창석씨의 부인 홍정녀씨는 “그것에 대해서는 드릴 말이 없다”라고 말했다. 연희동을 경제적으로 후원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바깥양반이 하는 일은 아는 게 없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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